권력형 성폭력 사건에 일본 '발칵'
뿌리 깊은 여성 인권 경시 풍조 탓
성 차별에 뒷짐 일본 정부도 문제
'플라워 데모' 여성들 외침도 계속
뿌리 깊은 여성 인권 경시 풍조 탓
성 차별에 뒷짐 일본 정부도 문제
'플라워 데모' 여성들 외침도 계속
일본의 국민 MC로 불리는 전 아이돌 그룹 스마프(SMAP)의 리더였던 나카이 마사히로가 2020년 2월 21일 도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취재진 질문을 듣고 있다. 도쿄=지지·EPA 연합뉴스
지난해 연말부터 일본 사회가 '국민 MC' 나카이 마사히로 성추문 사건으로 떠들썩하다. 나카이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배우 겸 가수 기무라 다쿠야와 구사나기 쓰요시(초난강)가 속한 전설적인 아이돌 그룹 '스마프(SMAP)'의 리더다. 탁월한 진행 실력과 재치 있는 입담으로 오랫동안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 황금 시간대를 장악했고, 일본 방송계와 연예계에서 '큰손'으로 불리며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지난해 12월 사건을 처음 보도한 일본 주간지 여성세븐, 슌칸분슌 등에 따르면, 일본 민영 방송사 후지TV 여성 아나운서 A는 2023년 6월 나카이 자택에서 그와 원치 않는 성관계를 가졌다. 후지TV 실세인 편성부장 B는 A에게 나카이와의 만남을 주선하면서 성 상납을 강요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보도 이후 A 외에도 나카이와 B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추가 폭로가 이어졌고, 일본 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은폐 시도에 사태 일파만파
후지TV가 사건을 은폐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A가 1년 전 사측에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후지TV가 조사도 하지 않고 나카이를 계속 방송에 출연시켰던 것이다. 사건이 일파만파 커지자 80여 개 기업이 이미지 훼손과 자사 제품 불매 운동을 우려하며 후지TV에 광고를 중단했다. 하루종일 광고 없이 프로그램만 방영되는 전무후무한 사태가 석 달간 이어졌다.
연간 영업이익(2023 회계연도, 2023년 4월~2024년 3월)이 335억 엔(약 3,210억 원)에 이르는 대형 방송사가 존폐 기로에 섰다. 결국 후지TV 가노 슈지 회장과 미나토 고이치 사장은 모든 책임을 지고 동반 사퇴했다. 나카이도 연예계에서 퇴출됐다.
일본 대표 경제단체인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 도쿠라 마사카즈 회장은 "후지TV 내부에서도 '기업 문화를 바꿔야 한다', '철저한 사내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며 "기업들은 인권 문제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고 공개 비판하기도 했다.
여성 아나운서를 접대부 취급
1월 17일 도쿄 오다이바 후지TV 사옥 앞에 걸린 후지TV 깃발과 일본 국기인 일장기. 도쿄=AFP 연합뉴스
일본인들은 이번 사건을 한 개인의 일탈이나 비위 행위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여성 아나운서에 대한 성적 대상화, 성차별은 비단 후지TV만이 아니라 일본 방송계에 만연한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 민영방송 여자 아나운서는 TBS방송에 "선배 PD의 부탁으로 여자 아나운서 3명이 스포츠 선수들과의 회식 자리에 나갔는데, 다음 날 그 PD가 '유흥업소 직원들처럼 접대해 주길 바랐는데 어제 너무 성의 없었다'고 호통을 쳐 매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민영 방송사 영업부 여직원도 "광고업체 간부가 회식 자리에서 '나와 불륜 관계를 맺어 주면 광고를 또 계약하겠다'고 말해 상처를 입었다"며 "남자 선배들에게 고민을 털어놨지만 '너 인기 많은 거 아니까 그만 자랑하라'며 웃음거리만 됐다"고 토로했다.
"성 비위, 개인 일탈 아닌 구조적 문제"
서지현 검사가 2019년 1월 29일 국회에서 열린 '미투 1년 좌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법조계에서도 여성 검사가 상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 재점화됐다. 첫 보도는 지난해 4월이었지만, 그해 연말 "피해 검사를 지켜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며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성폭행 피해를 폭로한 검사 C를 돕겠다고 나선 지지자들은 올해 1월 27일 "엄정한 수사와 제3자에 의한 조사를 요구한다"며 5만9,000명이 참여한 서명을 일본 법무성과 최고검찰청(한국 대검찰청에 해당)에 제출했다.
이 사건은 7년 전인 2018년 9월에 발생했다. 당시 오사카지검장이었던 기타가와 겐타로는 부하 직원 C가 회식 도중 "술에 취해 집에 가겠다"며 택시에 탑승하자, 그를 따라가 택시에 함께 탄 뒤 기사에게 "내 관사로 가 달라"고 말했다. 만취해 쓰러진 C는 기타가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정신을 차린 C가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기타가와는 "이제 너도 내 여자가 됐다"며 멈추지 않았다. C는 이튿날 동료 검사들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기타가와를 그만두게 할 수 없다'는 무력한 대답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심지어 기타가와는 C에게 "마음이 풀릴 때까지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뻔뻔한 말만 늘어놓았다.
그러다 기타가와는 2019년 11월 돌연 사직서를 제출했다. 충격에 빠져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던 C는 지난해 4월 기타가와를 신고했다. 기타가와는 지난해 7월 성폭행 혐의로 기소됐고,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C는 가해자 엄벌을 요구하며 서명에 동참해 준 지지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개인 사건이 아닌 조직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며 검찰을 강하게 질타했다.
유엔 "성평등" 권고에… 일본 "돈 뺀다" 으름장
나루히토(왼쪽) 일본 일왕과 마사코(가운데) 왕비가 1월 17일 일본 고베에서 열린 한신대지진 30주기 추모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고베=지지·AFP 연합뉴스
후지TV 성 상납 사건과 전 오사카지검장 성폭행 사건은 일본 사회에 뿌리 깊은 여성 인권 경시 풍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지적이 많다. 일각에서는 두 사건이 비슷한 시기에 공론화된 만큼 '일본판 미투(MeToo·권력형 성범죄 피해 사실 폭로) 운동'이 확산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적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서지현 검사 성폭력 피해 사건'을 계기로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사회 분위기는 아직 뜨뜻미지근하다. 엑스(X)를 비롯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부서 회식 때 상사 옆자리에는 늘 여직원을 앉힌다', '이번 기회에 여직원을 접대 수단으로 여기는 적폐 문화가 사라지길 바란다'는 글이 여럿 올라왔지만, 여성 인권 운동이나 시민들의 연대로 이어지지는 않는 모습이다.
타인의 일에 개입하기를 극도로 꺼려하고 집회·시위 참석 등 사회 비판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는 일본 특유의 문화와 정서를 고려하면 사회 운동으로 발전하기 힘들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오랜 기간 젠더 평등 문제를 연구해 온 저널리스트 하야시 요시코는 "일본에서는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주장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 평소 '인권'과 '권리'라는 표현도 잘 쓰지 않는다"며 "피해자나 약자가 서로 연대하기 어려운 구조라 페미니즘이 자리 잡기도 어렵다"고 진단했다.
세계경제포럼(WEF) 2024년 세계 성 격차 지수(GGI). 그래픽=송정근 기자
성차별 문제에 소극적인 일본 정부 태도는 더 큰 문제다. 일본은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24년 세계 성격차 지수(GGI)에서 118위에 올라 있다. 심지어 중국(106위), 네팔(117위)보다도 성차별이 심한 나라로 분류됐다. 상위권에 포진한 핀란드(2위), 노르웨이(3위), 독일(7위), 영국(14위), 프랑스(22위) 등 주요 선진국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성 차별적 제도 개선이나 성 평등 인식 확산을 위한 노력에 매우 소홀하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지난해 10월 "남성만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 법 조항이 여성차별철폐조약 이념에 맞지 않다"며 개정을 권고했다.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도 담았다. 교도통신이 지난해 4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90%가 '여성 일왕을 찬성한다'고 답한 만큼 일본 국민도 동의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유엔 권고에 강하게 반발하며 올해 1월 말 "일본이 내는 기여금을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쓰지 못하게 해달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여성 문제 의식 점차 커질 것" 기대도
숙명여대 학생들이 지난해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에서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들이 나눠준 장미를 받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하지만 일본 정부의 뒷짐에도 여성들의 외침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며 여성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플라워 데모'가 대표적이다. 플라워 데모는 2019년 3월 후쿠오카·시즈오카·나고야지법이 각각 다른 성폭행 사건에서 모두 '가해자 남성에게 죄가 없다'고 판결하자 여성들이 반발하며 꽃을 들고 시위를 시작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 여성들은 지금도 '성폭력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꽃을 들고 거리로 나온다.
지난해 6월과 8월 오키나와현에서 주일 미군 병사에 의한 일본인 여성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정부가 사건을 오키나와현에 알리지 않은 사실이 지난해 11월 뒤늦게 알려지며 '은폐 의혹'이 일었다. 일본 여성들은 올해 1월 11일에도 오키나와현 나하시 거리에 꽃을 들고 섰다. "성폭력을 용서해선 안 된다"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저널리스트 하야시 요시코는 "나카이 성상납 사건은 '여성 문제를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일본 사회 내 비판 의식을 키웠다"며 "플라워 데모 같은 연대 움직임이 활성화되면 성폭행 피해를 막아야 한다는 인식도 더욱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