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구매한 장비도 유지관리·소프트웨어 美 의존"
미 안보보장 등에 업었던 美 방산업체 판매전략도 흔들
미 안보보장 등에 업었던 美 방산업체 판매전략도 흔들
덴마크 공군 기지의 F-35 전투기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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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연합뉴스) 김지연 특파원 = 오랫동안 미국 방위산업에 의존했던 유럽이 '트럼프 리스크'에 후회하고 있다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끊는 것을 본 상당수 유럽 국가 정부가 이미 구매한 미국산 무기를 계속 작동시키는 데 문제가 생기지 않을지 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한 뒤 아프간 정부가 탈레반 저지에 쓰던 블랙호크 헬기 등 군용기는 그대로 남았지만 미군 협력업체와 부품,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는 사라졌다. 단 몇 주 만에 이런 군용기 절반 이상이 발이 묶이고 말았다.
당시 한 미군 지휘관은 "협렵업자들이 철수할 때는 마치 젠가(나무 막대로 탑을 쌓고 하나씩 빼는 게임)에서 막대를 다 빼낸 후에 그대로 서 있기를 바라는 것과도 같았다"고 말했다.
유럽으로선 남의 일이 아닌 처지다.
전투기 조종사 출신 스웨덴 AI 방산업체 아비오니크 최고경영자(CEO) 미카엘 그레브는 "트럼프가 젤렌스키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면 그들(유럽)은 걱정해야 한다"며 "북유럽과 발트해 국가들은 '우리한테도 똑같이 할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논쟁은 미국이 항공기·무기 체계를 무력화할 '킬 스위치'(kill switches)를 은밀히 보유하고 있는지까지 번졌다. 전투기나 방공 미사일, 드론, 조기경보기 등 첨단 무기와 군 장비가 예비 부품과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리처드 아불라피아 에어로다이내믹 어드바이저리 이사는 입증된 바는 없다면서도 "약간의 소프트웨어 코드로 그런 걸 할 수 있는 것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저스틴 브롱크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 선임연구원은 "킬 스위치 같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라면서도 "대부분 유럽 군은 미국에 통신 지원, 전자전 지원, 심각한 분쟁 시 탄약 재공급에 의존한다"고 지적했다.
덴마크는 트럼프 대통령이 눈독을 들인 그린란드 방위 강화를 위해 미국산 F-35를 수용할 수 있도록 활주로를 확장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한 유럽의 첨단 전투기 절반 이상이 F-35, F-16 등 미국산이다.
이들 전투기는 미국에서 운용하는 자체 시스템을 통해 지속적인 업데이트와 유지보수 지원을 받는다. 이를 통해 임무 계획, 위협 데이터베이스, 유지보수 진단까지 관리한다.
방공 분석가 새시 투사는 "덴마크가 그린란드를 지킨다고 F-35를 보내는 게 의미가 있겠나"라며 "정교한 군 장비는 판매업체의 지원이 많이 필요하다. 지원이 중단되면 그 장비는 빠르게 멈추게 된다"고 말했다.
스위스 국방부는 최근 F-35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에 논란이 제기되자 이는 자율적으로 사용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미국의 데이터 통신 체계나 위치정보시스템(GPS) 위성 항법에서 완전히 독립적인 서방 전투기는 없다고 덧붙였다.
영국 해군 잠수함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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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핵 억지력에 대한 의구심도 이미 제기됐다. 영국의 핵 억지력은 미국과 공동 관리하는 트라이던트 미사일을 탑재한 잠수함에서 나온다.
닉 커닝엄 에이전시파트너스 분석가는 "이 미사일이 영국에는 중요한 취약점"이라면서 영국이 그 대신 프랑스 미사일 M51 사용 가능성을 따져봐야 한다고 주문했다.
많은 유럽 국가가 미국 드론 리퍼를 사용하며 이는 미국이 제공하는 위성 통신망과 소프트웨어 지원에 의존한다.
유럽의 공중 정보, 정찰, 감시 기능도 상당 부분 미국의 협력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지적된다. 영국의 정찰기 리벳 조인트, 노르웨이에서 사용되고 독일도 주문한 대잠 초계기 P8 포세이돈, 조기경보 통제기 웨지 테일, 드론 프로텍터 등이 그렇다.
한 국방 소식통은 유럽의 공중 정보 능력이 사실상 미국에 '저당' 잡혀 있다고 말했다.
더글러스 배리 영국 국제문제전략연구소(IISS) 선임 연구원은 "핵심 방위 파트너로서 미국에 대한 의존성에 분명한 우려가 있다"며 "미국 대외 정책의 돌변이 전 세계가 당연시했던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불확실성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미국 방산업계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 방산업체들이 그간 미 정부의 암묵적인 안보 보장을 마케팅 도구로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 방산업체 주가보다는 유럽 방산업체 주가가 급등했다.
방공 분석가 투사는 미국이 지원 중단 의지를 내보인 것이 미 방산업체의 판매 전략에는 치명적이라면서 "신뢰란 단 한 번만 깨질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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