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회담하고 있다. 이날 정상회담은 설전 끝에 파행으로 조기 종료됐다. 워싱턴=AP뉴시스
2025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3년을 맞은 이날 유엔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엔 총회에서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전면적 침략"을 명시한 결의안 두 건이,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는 '러시아의 침공'을 묵인한 채 "분쟁의 신속한 종결"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항구적 평화"만 강조한 결의안이 채택된 것입니다.
상반된 내용의 결의안들이 같은 날 유엔 회의장에서 통과된 셈입니다.
기현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한국
입니다. 누가 봐도 상반돼 보이는 결의안에 한국은 "상반된 성격의 결의안이 아니다"며 찬성표를 던집니다. 러시아 침공을 생략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도, 침공을 명시한 유엔 총회 결의안에도 찬성
을 한 것입니다. 도대체 정부의 의도는 무엇이고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요?'러 침공' 삭제한 미국, 책임 추궁 나선 유럽과 우크라, 양다리 걸친 한국
황준국 주유엔 한국 대사가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뉴욕=AP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문제였습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규탄하던 미국이 180도 태도를 바꿔버린 것이죠.
미국은 유엔 안보리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속히 중단시키자는 결의안을 발의
했습니다. 결의안은 찬성 10표, 반대 0표, 기권 5표로 가결 처리됐죠. 안보리가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결의를 채택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동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한 결의안은 러시아와 중국이 반대했거든요. 유엔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안보 정책결정기구에서 러시아의 전쟁 책임을 묵인하는 결의안이 채택된 것
입니다. 한국은 여기에 '찬성'
을 한 것이고요. 한국의 모순적 행보는 계속됩니다. 미국 주도 결의안에 기권했던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이사국들은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독립, 영토 보전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추가된 수정안을 제출
했습니다. 한국은 이 결의안에도 찬성
했죠. 이 결의안은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부결됐습니다. 한국은 우크라이나가 유엔 총회에 제안한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는 내용이 담긴 결의안에도 찬성
표를 던졌습니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우크라이나 사이 '양다리'를 걸친 셈
이죠. 우크라이나가 제안한 결의안은 찬성 93표, 반대 18표, 기권 65표로 채택됐습니다. 그러나
국제법적 구속력이 있는 안보리 결의와 달리 총회 결의는 사실상 선언적 의미
만 있습니다. 결국 유엔 헌장 7조에 따라 유엔 회원국이 이행해야 할 구속력을 갖춘 결의는 러시아의 침공을 묵인한 채 조속한 종전을 명시한 미국 주도의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결의안뿐이라는 거죠. "결의안 상충되지 않는다"지만…'가치외교' 스스로 저버린 정부
외교부 전경. 연합뉴스
우리 정부의 속내는 무엇일까요?
외교부 관계자는 "미국 측 결의안이 국제사회의 주요 현안인 우크라이나 전쟁의 조기 종식을 촉구(implore)하고 있는 등 우리 입장과 상충되지 않는다"며 "전쟁 종식을 위한 국제사회 지지와 의지를 모아야 할 시점이라는 점을 고려해 지지했다"고 해명합니다. 결국 어떻게 전쟁을 끝내느냐보단
일단 전쟁을 끝내고 보는 게 중요하다
는 논리입니다. 주목할 발언은 그다음입니다.
"한미관계와 북한 문제에 관한 한미 간 긴밀한 공조의 중요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결국 국제 질서와 원칙을 다루는 국제무대에서 한미 양자 관계를 고려해 기존의 입장을 뒤집었다는 의미입니다. 분명
외교부는 "유엔 헌장을 위배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력 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정권이 바뀐 것도 아닌데 하루아침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
졌습니다. '침략국가'에 면죄부를 주는 트럼프 대통령에 비위를 맞춰주는 모습
입니다. 한국의 '가치'는 어디에
이처럼
정부가 외교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바뀌었습니다.
그것도 우리의 정체성이 아닌
다른 국가 정상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애당초 '가치외교'를 외쳤던 것일까요. 단 한 번도 중추국가인 적이 없는데, 왜 'GPS(글로벌 증추국가·Global Pivotal State)외교'라는 휘황찬란한 단어까지 만들었던 것일까요.1950년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82·83·84호는 북한의 남한 침공을 규탄하고,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명시하고, 유엔군사령부를 구성하기로 한 역사적 결의안으로 남아 있습니다. 유엔 창설 이래 전쟁 수행을 위해 구성된 합법적 다국적 연합군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모두 한국을 위해 국제사회가 한 선택이었습니다(운 좋게도 이때 소련은 미국과의 갈등으로 모든 유엔 안보리 결의 회의를 보이콧하고 있었습니다).
유엔 안보리의 힘으로 생존한 대한민국이 이제는 비상임이사국에 다시 진입해 존재감을 뽐내려는 올해, 처음 보인 행보가 고작 '양다리 걸치기'입니다. 과연 이게 비상임이사국으로서 책임 있는 자세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 침공의 아픔을 떠올리며 6.25전쟁 때 어딘지도 몰랐을 한반도에 파병했습니다. 양다리 전략으로 국제사회에 오락가락하는 것으로 비치는 한국이 또다시 위기 상황에 처한다면 유엔 회원국들은 과연 한국을 위해 발 벗고 나서 줄 수 있을까요. 의문이 드는 대목입니다.
한국 외교 딜레마로 부상한 '미국'…고차방정식의 꼼수외교라도 동원해야 하는 현실
절망스러운 건 이것이 현실이라는 사실
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해 5월 23일 뉴욕 브롱크스 남부 선거 유세에서 청중에게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든다는 뜻의 트럼프 캠프 선거 슬로건)’ 모자를 던지고 있다. 뉴욕=AP 연합뉴스
이제 미국은 우리에게 외교 딜레마가 됐습니다. 1987년 비상계엄을 선포하려던 전두환을 저지하던 미국은 이제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멀리하면 할수록 한국의 안보·경제적 입지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당국자들은 '이단아'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질서를 마구잡이로 뒤흔드는 상황에서 한국이 운신할 폭이 넓지 않다고 말합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외교 고위 관료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굴욕을 당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결국 영국과 프랑스도 다시 미국과 협상하라고 하지 않나"라며 "냉혹하지만 그게 현실"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전직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한국은 국방에서부터 교역·문화·기술까지 미국과 상호 의존성이 강한 관계"라며 "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고난도 외교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고 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100일까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익명을 요구한 정치외교학 교수는 "규범이 무너지고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국제사회에 이미 진입했다"면서 "한국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하기 위해 고차방정식의 '꼼수'외교라도 동원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시기
"라고 진단했습니다. 하나같이 진단은 많지만, 결국 해법은 없습니다. 그만큼, 전문가라 불리는 이들에게도 앞길이 막막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위기의 시대, 한국 외교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이번 유엔 결의안을 둘러싼 '촌극'은 앞으로 우리 정부가 언제든 맞닥뜨리게 될 딜레마의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