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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라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명확히 보이는 건 단 하나, 간극이 커지고 있다. 대부분 지역의 집값은 몇달째 하락 중인데 강남 3구 아파트는 연일 신고가를 기록한다. 토지거래허가제가 풀린 지역 호가는 한 달 새 4억원이 올랐고 그 4억원은 대한민국 신입사원 평균 연봉의 10년 치보다 많다. 애석하게도 신입사원이 되는 것도 척박한 환경이다. 대기업 중 61%가 올해 신입사원 채용 일정을 발표하지 않았다. 소비 침체와 장기 불황으로 자영업자 폐업률은 코로나 때보다 높다는 기사와, 한 반도체 기업이 기본급의 1500%를 성과금으로 지급했다는 기사가 언론을 달군다. 슬금슬금 오르던 환율은 계엄 후 치솟아 내려올 줄 모르고, 환율을 결정하는 요소는 죄다 불안정하다. 수치로 표현되는 양극화의 간극이 더 벌어지니 불안이 커진다.

사람들은 불안할수록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한다. 팬데믹 시기에 작고 확실한 통제감을 주는 ‘루틴’이 흥행한 것처럼, 요즘은 ‘로드맵’이라는 단어가 안정제로 통한다. 노후대비, 조기은퇴, 커리어점프 로드맵… 가장 화제는 ‘대치동 로드맵’이다. 성공적 대입을 위한 이 로드맵의 시작은 4세다. 이르면 만 2세에 영어, 만 4세에 수학을 시작해 초등 3학년까지 영어를 끝내고 4학년부터 대입 경쟁에 뛰어드는 것이 이 로드맵의 여정. 이토록 불안한 시대, 우리 아이만큼은 안전하길 바라는 열망이 로드맵의 시작을 앞당긴다. 안전지대는 줄어들고 그곳에 닿는 길은 험난하다. 이때 ‘로드맵’은 오직 자본과 재능의 선택을 받은 소수만 ‘엘리트’층에 안착할 수 있다는 매력적 안전장치를 판다. 아웃풋을 우선하는 시스템은 인간성과 다양성을 소외시키고 그것이 초래할 부작용은 분명하지만 당장의 점수로 반영되지 않을 성질들엔 적당히 흐린 눈이 되기 쉽다.

국가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최고조였던 겨울 동안, 입시 시스템을 향한 믿음은 견고했던 걸까? ‘입시 로드맵’의 출발선에 여전히 많은 아이가 섰다. 계엄이 무엇인지도 모를 아이들이 영어유치원 입학시험인 4세 고시를 치렀다. 영어유치원에서 ‘martial law’라는 어휘를 배웠을지도 모를 아이들도 최상위 학원 등록을 위해 7세 고시에 임했다. ‘대치동 로드맵’은 대한민국 4세와 7세의 평균이 아닌 극소수의 이야기지만 이 자극성이 미디어의 선택을 받아 소란스럽게 퍼진다. 그 소란 속에서 5세 아이를 키우는 나는 고민이 깊다. 이 두려움이야말로 시스템 왜곡을 부추기는 동력인 걸 알면서도 마음이 흔들린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전보다 더 자주 수치로 가늠되는 간격에 주눅이 든다. 또 두렵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안일한 오만과 무책임일까봐. 이 순진성을 후회할 순간이 올까봐. 하지만 내겐 강렬한 믿음이 있다. 모순과 불평등투성이인 이 세계에서 자라나는 아이에게 진짜 필요한 건 ‘로드맵’이 아닌 ‘길을 잃어보고 또 찾는 경험’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고, 스스로 보고 느낀 기쁨을 나누고, 절망을 위로하는 언어를 배우기를. 무엇보다 탐험을 허락하며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기를 바란다.

물론, 성공 등식을 따르며 좋은 ‘숫자’를 얻는 이들과 비교하는 마음을 완전히 거둘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해서 삶의 의미를 찾는 훈련을 할 것이다. 세상이 불확실할수록 삶의 의미를 스스로 느끼며 성장한 사람이 가장 강력하다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정유라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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