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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 유명 영화로는 19일 뒤늦게 재개봉
620만 명 봤으나 투자배급사 사라진 ‘악운’
CJ ENM이 IP 대행사로 다시 볼 수 있게 돼

편집자주

‘수ㆍ소ㆍ문’은 ‘수상하고 소소한 문화 뒷얘기’의 줄임말로 우리가 외면하거나 놓치고 지나칠 수 있는 문화계 이야기들을 다룹니다.
배우 한석규는 ‘쉬리’에서 정보기관 정예요원 유중원을 연기하며 당대 최고 스타 자리를 확고히 다지게 된다. 삼성전자 제공


영화 ‘쉬리’(1999)가 재개봉합니다.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쳐 4K 고화질로 19일 새롭게 선보입니다. 명작들의 재개봉이 흔하디흔한 시대이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쉬리’는 다릅니다. ‘쉬리’는 주문형비디오(VOD)로 볼 수 없었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도 찾을 수 없는 영화입니다. ‘쉬리’를 다시 보려면 비디오테이프 정도로나 가능합니다. 전설적인 한국 영화로 꼽히는 데도 이번이 첫 재개봉이기도 합니다. ‘쉬리’는 왜 이제야 재개봉하게 됐고, 그동안 온라인으로 볼 수 없었던 걸까요.

한국 영화 산업을 바꾼 흥행작

배우 김윤진은 ‘쉬리’에서 남파 공작원 이명현을 연기하며 국내 영화에는 없던 여전사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삼성전자 제공


‘쉬리’는 한국 영화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 작품입니다. 한국 영화 산업화에 발판을 마련한 영화입니다. ‘쉬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자처한 첫 영화로 본격적으로 와이드릴리스(전국 동시 개봉)를 한 최초 한국 영화입니다. 큰돈을 들여 전국에서 폭탄을 대량 투하하듯 대규모로 개봉한 영화라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하면 할리우드 대작의 제작과 개봉 방식을 본뜬 영화입니다.

‘쉬리’ 이전 한국 영화는 개봉 방식부터 전근대적이었습니다. 주요 영화는 보통 서울 중심부 유명 극장에서 단관 개봉한 후 시차를 두고 수도권이나 다른 지방에서 개봉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지금처럼 화제작을 전국에서 대규모로 동시에 즐기지 못했던 겁니다. ‘쉬리’를 통해 현재 같은 개봉 방식이 본격적으로 도입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연진부터 화려했습니다. 당대 최고 스타였던 배우 한석규에 떠오르는 신예 송강호와 김윤진이 함께했습니다. 개성 넘치는 연기로 인기를 끌었던 최민식이 북한 특수부대 지휘관으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제작비는 마케팅비 등 포함해 30억 원으로 한국 영화 역대 최대 금액이었습니다. 내용이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기도 했습니다. 남파 공작원과 국내 정보기관 정예요원이 사랑하는 사이이고, 남북 화해를 막기 위해 북한 군부가 준동한다는 설정이었으니까요. 흥행작 ‘은행나무 침대’(1996)로 데뷔한 강제규 감독의 두 번째 영화라 눈길을 모으기 충분했습니다.

개봉 후 신드롬으로 칭해도 될 만큼 전국적 화제를 모았습니다. 관객 수는 620만 명(배급사 집계)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미국 재즈 가수 캐롤 키드가 부른 삽입곡 ‘When I Dream’이 크게 히트해 키드가 내한하기까지 했습니다. 한국 영화 산업은 ‘쉬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온 이유들입니다.

삼성영상사업단의 저주

최민식은 ‘쉬리’에서 남북 화해를 방해하려는 북한 특수부대 지휘관 박무영을 연기해 화제를 모았다. 삼성전자 제공


‘쉬리’ 투자배급사는 삼성영상사업단입니다.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이 1994년 영상산업 진출을 위해 야심차게 출범시킨 회사입니다. 1990년대는 세계 유수 전자회사들이 영상산업 큰손으로 부상하던 시기입니다. 일본 소니는 1989년 굴지의 할리우드 스튜디오 컬럼비아픽쳐스를, 마쓰시타전기는 1990년 또 다른 스튜디오 MCA(현 유니버설픽쳐스)를 각각 인수했습니다.

전자회사들이 영화사에 관심을 둔 건 TV와 비디오카세트리코더(VCR) 판매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국내 회사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대우전자, 선경(SKC) 등이 영화 산업에 잇달아 진출했습니다. 삼성영상사업단은 삼성그룹 내 흩어져 있던 여러 영상사업을 통합해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삼성영상사업단은 해외 영화를 수입하는 한편 한국 영화에 투자를 했는데요. ’돈을 갖고 튀어라‘(1995)와 ’정글 스토리‘(1996), ’퇴마록‘ ’약속‘(1998), ’태양은 없다‘(1999) 등이 대표적입니다.

삼성영상사업단은 한국 영화계 큰손으로 급부상했으나 하필 1997년 한국 사회를 뒤흔든 일이 발생합니다. IMF사태가 터지면서 많은 기업이 가혹한 구조조정 칼날 앞에 서게 됩니다. 대기업들은 돈이 되지 않거나 자잘한 사업은 과감하게 정리했는데, 삼성그룹에서 삼성영상사업단이 정리 명단에 오릅니다. 사업 철수가 결정된 상태에서 이미 투자한 영화 ’쉬리‘가 대박이 납니다.

사업 정리로 삼성영상사업단 내 자산은 삼성그룹 여러 회사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쉬리‘에 대한 지식재산권(IP)은 삼성전자에 귀속됩니다. 전담자가 있지도 않은 상태였으니 영화가 흥행하고도 IP를 활용한 후속 조치가 이뤄지기는 힘들었습니다. ’쉬리‘를 온라인으로 볼 수 없고 리메이크가 불가능했던 이유입니다.

OTT 출시, 드라마 리메이크도 가능해져

송강호는 ‘쉬리’에서 유중원의 헌신적인 동료 이장길을 연기했다. ‘쉬리’는 기존 한국 영화와 달리 사실적인 총격전 장면으로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삼성전자 제공


유명 투자배급사 CJ ENM이 중개자로 나서면서 20년 넘게 묻혀 있었던 ’쉬리‘가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됐습니다. CJ ENM이 ’쉬리‘ IP 활용을 위한 ’대행사‘로 나서게 된 겁니다. 삼성전자에 IP 소유권은 여전히 있으면서 ’쉬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 대중과 만날 수 있게 하는 작업은 CJ ENM을 통해서 가능해진 겁니다. ’쉬리‘의 극장 재개봉이 그 시작입니다.

필름으로 만들어지고 상영됐던 ’쉬리‘의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이 이뤄졌으니 IPTV를 통한 VOD 관람은 시간 문제입니다. OTT에서 ’쉬리‘를 볼 수 있는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이론상으로는 ’쉬리‘를 다시 영화로 만들거나 드라마로 새롭게 제작할 수도 있습니다. ’쉬리‘는 오래전부터 많은 드라마 관계자들이 탐내던 IP입니다. IMF사태의 후폭풍에 발목이 잡힌 ’쉬리‘를 극장에서 다시 볼 수 있다는 건 영화팬들에게는 분명 꿈같은 일입니다. 새로운 ’쉬리‘가 나온다면 더더욱 큰 행복을 줄 거라 믿어 봅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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