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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지갑'에 순해지는 음주 문화
탑골공원서 막걸리·소주 잔술 인기
대학가에선 새터에 '논알콜방' 마련
음주운전 경각심 하락 우려는 남은 숙제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인근 ‘소문난집’에서 기자가 소주 반병(2000원)과 막걸리 한 잔(1000원)을 시킨 모습. 장문한 견습기자

[서울경제]

6일 오후 5시 30분께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인근 ‘소문난집’. 조금 이른 시간임에도 10여 명의 손님들이 히터도 없이 허름한 공간을 벌써부터 가득 채우고 있었다. 대다수는 홀로 방문한 중·노년 남성들로 3000원짜리 국밥과 함께 한잔을 곁들이며 고단한 하루를 달래고 있었다. 특이한 건 거의 모든 테이블 위에 술잔만 있을 뿐 병은 온데간데 없었다는 점이다.

알고 보니 메뉴판엔 따로 적혀 있지 않지만 1인 손님들은 주로 ‘잔술’을 찾는다고 했다. 막걸리는 한잔에 1000원, 소주 반병엔 2000원이다. 탑골공원에 바둑을 구경하러 오면 항상 이 곳에서 끼니를 해결한다는 윤 모(75) 씨는 “보시다시피 노인 남성들이 혼자 오는 경우가 많다”며 “한 병 시키기엔 많으니까 막걸리 한 잔만 주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70대 남성 손님 A 씨도 “막걸리 한 잔을 가득 따라 1000원에 파니까 서민으로서 오기 좋다”며 “총 4000원에 끼니를 든든히 해결할 수 있는 셈”이라고 했다.

경기 불황과 물가 상승이 이어지면서 애주가 어르신들의 성지처럼 여겨졌던 탑골공원의 풍경마저 달라지고 있다. 7일 서울경제신문의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해 5월 희석식 소주와 막걸리 잔술 판매가 합법화된 이후 탑골공원 인근에서 잔술을 찾는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다. 다만 대다수 가게들이 수익성을 이유로 잔술을 취급하지 않아 돌려보내는 일이 많다고 한다. 송해길 일대 포장마차 입구 한 사장님은 “오뎅 하나에 소주 한 잔 시켜 얼른 먹고 가는 노인들이 많았는데 최근엔 잔술을 취급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탑골공원 근처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던 한 70대 남성은 “잔술로 유명했던 '부자촌'이 동대문으로 이사간 후 인근에서 잔술을 먹기가 쉽지 않다”며 “땅콩과 함께 가볍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어 인기가 많았는데 이제 원각사 무료급식소 줄을 서야 한다”며 아쉬워했다.

젊은 층에선 변화가 더욱 뚜렷하다. 대학생 박 모(26) 씨는 최근 학교에서 기숙사 프로그램 기획 업무를 맡게 되면서 새내기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격세지감을 느꼈다. 본인이 신입생이던 6~7년 전만 해도 새벽까지 술을 마시는 게 일상이었는데 이제는 밤 10시 쯤만 돼도 해산하는 게 당연한 분위기라는 것이다. 박 씨는 “늦게까지 여는 술집 자체가 많이 줄어든 데다가, 2차·3차까지 갈 곳이 있다고 한들 물가가 많이 올라 대학생이 가기엔 부담인 것도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학교 행사 등에서도 음주 강요 대신 논알콜 음료를 곁들이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에브리타임 등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신학기를 맞아 ‘논알콜 동아리’ 홍보 글이 다수 올라오고 있다. 한 논알콜 동아리는 게시글에서 ‘술을 마시고 싶지만 몸에 잘 받지 않아서 분위기만 즐기고 싶은 사람들의 소모임’이라고 소개하면서 주로 야구장·공연장·한강에서 논알콜 음료를 함께 즐긴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새내기새로배움터에는 음주를 원하지 않는 학생들을 위해 ‘무알콜방’이 마련되기도 했다. 과거에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소외됐지만 이제는 이 공간에 모여 보드게임을 하거나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또 다른 대학 행사에선 논알콜 음료를 따로 준비하거나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의미의 '논알콜 팔찌'를 배부했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한 술집 앞에 각종 하이볼을 판매한다고 광고하는 홍보물이 붙어 있다. 장문항 견습기자


신촌 일대에서도 소주보단 하이볼(위스키에 탄산음료를 섞어 도수를 낮춘 술) 혹은 칵테일 광고를 더 흔히 볼 수 있었다. 연세대 인근에 위치한 ‘포차비’ 직원은 “술을 못 드시는 분들을 위한 논알콜 하이볼도 메뉴에 있다”며 “다른 곳들 역시 메뉴에 없어도 요청하면 다 만들어줄 것”이라고 했다.

다만 술 문화가 유해지면서 일각에서는 부작용도 우려한다. ‘한 잔쯤이야’라는 그릇된 인식이 음주운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더더더’와 ‘피하새’ 등 음주운전 단속 회피 애플리케이션(앱)의 다운로드 수는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만 각각 100만 건, 50만 건을 넘어섰다. 현행법상 이용자들이 단속 정보나 현황을 공유하는 행위 자체는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적극적인 규제가 어려운 상황이다.이에 보건복지부는 음주운전 위험성을 경고하는 문구·그림을 주류 용기에 의무적으로 표기하도록 최근 법을 개정하기도 했다.

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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