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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규 첫 에세이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
“나는 촬영용 인간... 일 계속하는 것, 통쾌”
“사이좋게, 혹독하게, 나와 잘 지내는 법”
“요양원 리얼리티도 생각, 죽을 때까지 생방송”
“롱런 비결은 건강, 재능, 노력, 관계, 인성”
“45년 동안 결석하거나 늦은 적 없어”
“소확행보다 대확행… 성공보다 일 소중해”

예능 대부라는 말보다 코메디언이라고 불리는 걸 좋아하는 이경규. 45년 예능 인생을 정리한 책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이라는 에세이를 출간했다./사진=김흥구

이경규가 쓴 에세이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을 읽었다. ‘이건 희극인이 쓸 수 있는 최고의 책’이라고 생각했다. ‘삶을 농담’이라고 칭할 수 있는 여유, 게다가 ‘완벽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기세라니! 청회색 하늘 위로 선명하게 박힌 활자엔 군더더기가 없다.

고점과 저점의 롤러코스터로 커브를 돌며 날아가는 인생, 수시로 맨홀에 빠져 ‘나락 갈’ 것 같은 현란한 리얼리티 무대에서 이경규는 45년째 생존 중이다. 웃음보다 비웃음이 더 많은 세상에서 우리 안의 심약한 본심, 응큼한 속내가 드러나도록 산뜻하게 호통치며.

넘치는 스태미나로 텐션을 올리는 강호동식 스포츠 코미디, ‘넘사벽’ 선함으로 경계를 풀어주는 유재석식 겸손 유머, 섹시 코드로 개구진 잽을 날리는 신동엽식 콩트 토크와는 달리, 이경규는 보통 사람인 우리들의 욕구와 불안, 허세와 어른다움을 투명하게 반사한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이, 함께 낄낄거리며 ‘웃음거리’ 되어보는 안전한 경험은, 우리에게 숨 쉴 틈을 만들어준다.

한해가 끝날 즈음 트로피를 손에 든 아흔의 이순재 선생이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라고 할 때도 뭉클하지만, 예능 공로상을 받은 이경규가 “박수 칠 때 왜 떠납니까?” 떳떳하게 내지를 때, 우리는 노년의 앞날을 비추는 밝은 헤드라이트를 본다.

나 자신과 얼마나 사이좋게 잘 지낼 수 있는지, 나 자신을 얼마나 혹독하게 다그칠 수 있는지, 즐거움과 두려움의 두 길이 다르지 않음을 이경규는 첫 에세이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에서 밝히고 있다.

‘별이 가져다준 공황, 본캐와 부캐 사이, 개와 인간의 시간, 영원한 불안, 유종의 미는 없다’... 짧은 분량의 주제들은 간결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가다 보면 오솔길이 되고 큰 길이 된다…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고 한번 가보자. 돌아보니 참 재미나게 살았다.’-’삶이라는 완벽한 농담’ 중에서.

공익 예능의 시조새, 놀랍도록 성찰적인 코미디언 이경규를 만났다.

삼거리 극장에서 유년을 보냈던 이후로 영화는 항상 그의 꿈, 최종 목적지였다./사진=김흥구

가는 날이 장날이라 영화사 사무실은 난방 설비가 고장나 한기가 돌았지만, 사무실을 지키는 반려견 재키(아마도 재키 챈 성룡의 이름을 딴 듯)가 3시간 내내 꼬리가 부러지도록 흔들며 공기를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 제목이 참 좋습니다. 간간이 웃기면서 멀리서 보는 관조적 서술이 좋았어요. 문장의 간이 딱 맞습니다.

“하하. 제목은 단박에 떠올랐어요. 직업상 ‘농담’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싶었고… 또 책이라는 게 일종의 몰래카메라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비슷한 제목이 있었던 것 같은데…”

-박완서 선생의 소설이 있어요. ‘아주 오래된 농담’이라고. 그나저나 추천사도 허투루 쓰인 게 없더군요. ‘평범하게 비범한 이경규의 세계(이윤석)’ ‘유산보다 재산이 소중한 현실주의자의 인생 노하우(전현무)’, ‘당길 때와 놓을 때를 아는 능수능란한 낚시꾼의 생존법(장시원 PD)’, 트렌드와 클래식을 아우르는 포맷의 귀재(권해봄 PD) 등등…

“(멋쩍어하며)다 제 꼬붕들이라… 크크. 근데 다 책을 읽고 신경 써서 써줬더라고. 정말 고마워요. 이윤석은 두 가지 버전으로 썼다고 해요. 한강 작가 대학 후배라 내가 ‘노벨 추천사 상 받을 수 있게끔 써보라’고 주문을 좀 했더니(웃음).”

이경규 ‘프로 수발러’를 자처했던 이윤석은 기실 한 번도 수발 든 적 없다고 추천사에서 고백했다. 고깃집 가면 고기 굽고, 차를 타면 운전대 잡고, 낚시터 가면 뒷정리를 하는 건 ‘경규 형님’이었다고. 토 달지 않고 조용히 있을 뿐인 이윤석을 이경규는 자신의 ‘오른팔’이라고 했다(왼팔은 반려견 두치다).

웃음과 성찰의 간이 알맞은 이경규의 첫 에세이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

-책에서 김소월의 시 ‘부모’의 한 구절인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에 대한 글이 좋았어요. 겨울밤 어머니와 둘이 앉아 옛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던 어린 시절… ‘나는 왜 생겨났을까?’라는 질문이 생겼다고요. 부모가 되어 ‘딸은 왜 태어났을까?’ 하니, 결국 질문을 물려주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던. 우리는 질문을 물려받고 물려주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걸까요?

“그런 것 같아요. 우리 어린 날에 스며든 일상 풍경을 나침반 삼아서요. 김소월 시로 만들어진 그 노래는 제가 제작한 영화 ‘전국노래자랑’에서도 썼어요. 꼬마가 노래로 불렀죠.”

‘부모는 왜 나를 낳았을까? 나는 왜 이런 사랑을 받을까?... 가끔 딸을 보면 미안해진다. 허공을 그대로 물려준 것 같아서…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오늘의 이경규를 만든 건 바로 이 질문인 것 같다.’-’삶이라는 완벽한 농담’ 중에서.

-‘이경규의 세계가 이토록 무궁무진했다니… 오래도록 그의 발자국을 이정표 삼아 걷고 싶다’... 유재석도 추천사에 썼더군요.

“유재석 하고는 엊그제 책 홍보차 ‘놀면 뭐 하니’를 찍었어요. 근데 그냥 놀면 무안해서 오랜만에 ‘양심 냉장고’를 찍었어요. 어린이 보호구역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점멸등이 깜빡일 때 멈추는 차가 있나 기다렸죠. 오전 11시부터 오후 늦게까지 반나절을 기다렸는데… 한 대도 안 서요. 미끄러져도 안 되거든.

그러다가 몇 시간 만에 거짓말처럼 한 대가 딱 서더라고. 그게 뭐라고 엄청 감동이 몰려와요. 운전자한테 가서 왜 섰냐고 했더니 자기는 원래 늘 섰대요.”

공익 예능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냈던 전설의 주말예능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 ‘양심 냉장고’의 감동적인 첫 주인공. “난 늘 지켜요.”

-30년 전 ‘양심 냉장고’ 첫 주인공이었던 ‘장애인 부부’도 똑같은 말을 했었던 거로 기억해요. 원래 지킨다고.

“맞아요. 저는 항상 ‘찍히는 사람’이지만, 카메라에 ‘찍히지 않아도’ 평소 습관적으로 하던 사람들이 있어요. 그분들은 그래요. 자기들은 원래 지켰다고. 신기하게도 30년 전 자동차 정지선 지켰던 그 장애인 분도 33살, 이번에 점멸등 앞에 선 이 청년도 33살이었어요. 자기가 3살 때 ‘양심 냉장고’ 프로그램 본 기억이 난대요.”

-코미디의 힘이 정말 대단하네요.

“그렇죠? 이번엔 냉장고 대신 원하는 제품을 골라 갔어요. 72인치 ‘양심 TV’로. 유재석이 함께 이걸 진행하면서 엄청난 희열을 느꼈대요. 제가 그랬죠. ‘너희들 모여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며 노는 것보다 이게 훨씬 재밌지?’ 도로를 오가는 차량을 모니터로 보고 있으면 역사, 경제, 문화, 대중 심리가 다 보여요.”

삶, 완벽, 농담이라는 단어가 괜히 조합된 게 아니었다. 수만 가지 단어와 리듬, 운율이 뇌수에서 헤엄치다, 적절한 타이밍에 준비된 퍼즐처럼 아귀를 맞춰 떠오르는 마법. 고정관념이 없고 기분 좋은 공상에 몰두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경험을 더 자주 한다.

-‘몰래카메라’나 ‘양심 냉장고’나 다 직접 붙인 이름이지요? 작명의 룰이 있나요?

“고민해서 만든 게 아니에요. 촬영하러 가면서 직관적으로 입말을 붙여보는 거예요. 몰래카메라는 전 세계에 다 있는 포맷이에요. 훔쳐보기? 그러면 부정적이잖아요. 아이들이 몰래 장난치는 것처럼 재밌어야죠. ‘몰래 찍잖아? 그럼, 몰래카메라지.’ 양심 냉장고도 그래요. ‘양심도 냉장고에 넣으면 안 썩겠네? 그럼 ‘양심 냉장고’지!’”

교통문화의 한 획을 그은 일요일 밤의 레전드 프로그램 ‘이경규의 양심 냉장고’.

직관은 뇌과학적으로는 패턴 인식의 한 형태다. ‘뇌가 홀연히 사라진 뒤에 관련 정보 조각들을 엮어내는’... 체스 장인들이 반사적으로 다음 수를 두듯, 이경규는 10대 시절부터 누적된 유머 패턴의 저장고에서 불쑥불쑥 연관 단어를 찾아낸다. 이질적인 생각들이 서로 섞이고 합쳐져 완전히 새롭고 독특한 새로운 아이디어로 조합되기도 한다.

-본능적으로 메타인지가 탑재된 것 같습니다. 균형 감각도 탁월하고요.

“저는 저를 바깥으로 꺼내서 이렇게 들여다봅니다. 자기 객관화가 좀 돼 있어요. 계속 바깥에서 나를 관찰하지요. 그런데 또 나를 굉장히, 지극히, 정성을 다해, 사랑해요. 자기 사랑의 끝판왕이랄까요. 늘 기승전 경규예요. 기승전 경규(웃음)…”

-자기 객관화가 잘 된 나르시시스트라…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고향을 떠나서 살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산전수전 겪으면서 이리저리 쓸려 다니다 보니. 부산 출신인데 서울 와서 자리 잡았고, 일본에 유학 가서 혼자 지낸 경험도 도움이 됐어요.”

-자의 반 타의 반 야전에 있었군요.

“제 위치가 좀 그런 것 같아요. 리얼리티쇼의 최전선에 있다 보니, 수시로 현실과 비현실을 왔다 갔다 해요. 오랫동안 카메라 앞에서 호통을 치다 보니, 진짜 화가 난 건지, 웃기려고 화난 척을 하는 건지, 헷갈릴 때도 있어요.

책을 쓰면서 내 정서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알았어요. 먹고살기 위해서 화를 냈던 거지, 나는 상당히 온순한 사람이었어요. 부산에서 올라올 때 진짜 착했거든.”

‘도시 어부’에 함께 출연하는 이덕화를 예로 들며 악마와 악질을 구분해서 농담을 했다.

“덕화 형은 물고기를 너무 사랑해요. 너무 사랑해서 물고기를 쥐고도 다음 잡을 물고기를 생각해요. 덕화 형은 날 때부터 악마인 거예요(웃음). 반면 저는 풍파를 겪다 보니 악질이 됐어요. 큰 물고기를 잡을 때는 생각하죠. 아, 지금 카메라가 있으면 좋을 텐데… 카메라가 꺼지면 고기 잡고 싶은 욕망도 사라져요.”

개와 낚시, 골프와 축구를 사랑하는 이경규.

뇌도 생활도 모든 게 카메라용으로 세팅돼 있다고 했다. ‘트루먼쇼’의 기획자이자 주인공인 셈이다.

어쨌든 악마라거나 악질이라는 표현도 이경규가 쓰면 거부감이 없다. 선과 악 이분법 너머에 찍히는 반전의 도끼날, 정확히 윤리적 정지선을 지켜온 그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농담 속에 진실을 찔러넣는 화법 덕에, 대화는 출력 센 범퍼카를 타듯 웃음의 리듬을 탔다.

-책에서 롱런의 제1의 비결로 건강을 꼽으셨어요. 첫째가 건강, 둘째가 재능, 셋째가 노력, 넷째가 관계, 다섯째가 인성이라고.

“매우 중요한 다섯 가지예요. 건강, 재능, 노력, 관계, 인성. 나이 먹을 때까지 오래 활동하는 분들 보면 그 다섯 가지 조건을 다 갖추고 있어요. 우리는 선택받는 직업인데, 인성이 안 좋으면 쓰지 않죠. 나이 먹은 사람은 더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인성 좋은 분들은 함께 오래 일하고 싶어 해요. 덕화 형만 봐도 사람이 참 좋거든.”

-좀 전엔 악마라고…

“악마죠. 물고기를 너무 사랑한 악마. 악마인데 되게 착해요. 하하.”

-딸과의 관계도 특이하더군요. 딸에게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는 말을 듣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고요?

“안 물어봤어요. 아무것도. 부모가 결혼 승낙한다? 말도 안 되죠. 독립된 개체인데. 다만 결혼식 입장할 때는 아빠하고 팔짱 끼고 들어가는 게 좋지 않나 그런 생각은 했어요. 왜냐하면 아빠는 결혼식장에서 할 일이 없어. 엄마들은 같이 초라도 밝히는데. 그래서 난 웨딩드레스 받쳐주는 도우미 역할을 했어요.”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르다고 느끼나요?

“나쁘게 얘기하면 또라이고, 좋게 보면 순수한 거고, 문학적으로 얘기하면 괴팍해요. 다양한 프로그램을 하면서 계속 배우고 깨쳐요.”

‘No 논란, No 미담’ 40년간 큰 실수가 없었던 건 그만큼 긴장하기 때문이라고./사진=김흥수

-풍자를 잘하는 희극인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예능인들은 사회적 눈치가 빠른 것 같습니다.

“배우들은 맡은 롤이 있잖아요. 내가 하는 코미디는 따로 배역이 없어요. 그냥 나를 연기하는 거예요. 나라는 사람이 개를 키우면서 어떻게 하나. 나라는 사람이 낚시하면서 어떤 행동을 보이나… 이렇게 나 스스로가 캐릭터가 돼서 현실과 TV를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때론 내가 다중 인간인가 싶기도 해요.”

자기 속을 다 드러낼 수도 완전히 감출 수도 없어서, 미묘하게 뒤틀리는 부분이 생긴다고도 했다.

-일본의 코미디언이자 영화감독인 기타노 다케시도 비슷한 경우인 것 같습니다. 웃기는 사람인데도 본인은 늘 시니컬한 표정이에요.

“기타노 다케시 책은 다 읽어봤어요. 일본 사람들은 정말 대단해요. 기타노 다케시는 부인 있는 사람인데, 애인 집에 가다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에피소드를 책에 낱낱이 다 적어놨더라고. 우리나라 정서로는 큰일 날 일이죠.”

-일본인은 자신의 부끄러운 밑바닥을 다 까발려요. ‘인간 실격’ 같은 작품만 봐도 극한 상황까지 자기를 던져요. 예능도 그런 면이 있지 않나요?

“그야말로 극한 직업이죠.”

-유재석, 강호동, 신동엽과 함께 몇십 년째 정상을 유지하는 기분이 어떤가요?

“극한의 시절을 함께 가고 있지요. 따져 보면 내가 유재석, 강호동 보다 10살이 더 많아요. 젊었을 때는 잘 몰랐는데, 가만 보면 우리 사이에도 시대적인 격차가 있어요.”

-업계에 친구가 없어서 외로운가요?

“친구를 둔다는 건 적을 가까이 두는 것과 같아요. 친구는 어려워요. 가수나 배우들도 그럴 거예요. 선후배가 좋습니다.”

-계급이 아니라 재능으로 산다는 말도 했지요?

“네. 서열 이런 거 정말 싫어해요. 웃기는 재능 있으면 됐지, 나이고 계급이고 그런 게 뭐가 중요합니까? 잘하는 놈이 1등이에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담부’라는 써클을 만들어 웃음의 포인트를 연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언어 감각이 쌓였다고 했다./사진=김흥구

-늘 경쟁을 생각합니까?

“경쟁 속에서 살아왔어요. 웃고 있어도 치열해요. 내가 이렇게 매 순간 긴장하며 살고 있다, 쪽 팔리지만 내 처지가 그렇다, 마냥 행복한 건 아니다… 뭐, 이렇게. 내 입으로 말할 수 없으니, 책을 통해서 드러내는 거예요.”

-박수 칠 때 떠나면 좀 편하지 않을까요?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나훈아 선배님은 자기 은퇴를 못 박았어요. 가수는 무대에서 노래하려면 체력도 있어야 하고 목소리도 관리가 필요해요. 그런데 우리는 괜찮아요. 속으로 생각했죠. 나중에 누워서 병원 침대에서 방송해도 되겠다.”

-요양병원 리얼리티인가요?

“그렇죠. 내가 이런 병에 걸려 병원에 있는데, 어제는 무슨 약을 먹고 의사 선생님이 와서 이런 얘길 하더라. 죽음이 임박해도, 이렇게 오는 거다… 웃으며 말할 수 있으면, 누워서 방송해도 되니까. 엊그제 홍진경이 하는 프로그램에 나갔는데 이것들이 누워서 방송하게 만들어놨더라고. ‘눕방’ 컨셉이라나? 그런데 한 두세 시간 또 신나게 했어요.”

-눕방이라… 생각할수록 길이 열리네요.

“플랫폼이 계속 생기니까 무대가 넓어져요.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시장이 죽지 않고 계속 살아있어요. 글쎄, 젊은 세대들한테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시장이 죽지 않는다는 건, 어쨌든 좋은 거예요. 서로 연합할 수 있으니까.”

-즐겁게 오래 일할 수 있는 최적화 모델을 찾고 있군요.

“길게 활동하는 게 사실 굉장히 어려워요. 어떻게 하면 길게 갈까, 계속 연구해야 하거든. 나이 먹을수록 새롭게 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야 하고.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내적 갈등이 심한지, 남들은 모르죠. 그러니까 공황장애도 오고 지금도 약 먹으면서 버텨내요. 하하.”

이경규는 그동안 스무 마리가 넘는 개들과 함께 살았다. 사진은 사무실에 사는 반려견 재키./사진=김흥구

-‘공황장애의 순간’을 우주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내 몸을 부숴버렸다고 쓰셨어요. 들판에서 엄청난 별 세례를 받고 나니, 불안도 별처럼 몇만 년을 날아서 나한테 온 것 같더라고.

“그때 기억이 아직 생생해요. ‘남자의 자격’을 촬영하러 호주에 갔을 때였어요. 하루 10시간씩 열흘 간을 끝없는 지평선을 향해 운전했어요. 종일 긴장한 채 운전하다 야영하러 천막에 누웠는데,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어요. 스태프들이 놀라서 주무르고… 그게 공황의 조짐이었어요. 지금도 약 안 먹으면 3일 만에 공황이 와요.

연예인 중엔 제가 처음으로 공황장애를 공개적으로 얘기했는데, 정신과의사들이 고마워했어요. 우울증, 공황장애로 힘든 사람들이 진짜 많거든요. 숨기다가 자살까지 가요. 무서운 거죠. 나도 사는 게 참 아이러니해요. 웃기는 직업인데 웃기기 위해서 이렇게 긴장과 경쟁 속에 있다는 게 참…”

-공짜가 없네요.

“저는 저한테 굉장히 엄격해요. 농담처럼 TV에서도 얘기했지만 내가 당화혈색소 수치가 6.8이 나왔어요. 6.2 넘어가면 당뇨예요. 그때부터 약을 안 먹고 3개월 만에 식이요법으로 5.8까지 떨어뜨렸어요. 탄수화물을 다 끊었어요. 100년이라는 시간을 기준으로 100년 전에 없던 음식은 안 먹었어요.

아침엔 삶은 달걀 두 개 먹고, 식당에도 현미밥을 들고 다녀요. 술은 한 달에 두세 번 마시죠. 100년 전에도 술은 있었으니까(웃음). 아버지가 중풍으로 만 20년을 누워계셨어요. 아버지 수발드는 어머니 보면서, 수발 받는 삶은 되지 말자고 결심했어요.”

가끔은 콜라도 소맥도 마음껏 들이키던 당화혈색소 6.8대가 그립다고 했다. 삶의 질과 생활의 낙이 같이 갈 수는 없더라고. 결국 건강은 빚과 같아서 젊을 때 막 끌어 쓰면 나이 들어 이자까지 붙여 갚아야 하니, 100년 전 식단처럼 극단적인 선택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 되더라고 했다.

-정말 공짜가 없군요!

“여하튼 빈 집에 소 들어온대도 공짜는 없어요. 찰리 채플린도 그랬잖아요.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내 직업은 비극과 희극이 막 뒤엉켜 있어요. 남들이 알아주면 고맙지만, ‘저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러면 진짜 할 말이 없어요. ‘나는 뭐 하는 사람인가?’….”

늘 새로운 포맷에 도전하는 이경규./사진=김흥구

-나는 뭐 하는 사람인가…

“계속 물어봐요. 가령 농사짓는 분들은 농사를 짓고 작물을 내잖아요. 뭔가를 진짜 할 줄 아는 거죠. 난 뭘 할 줄 알지? 프로그램 만드는 거. 그럼 그걸로 사회 공헌을 하나? 그 답을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실물이 없으니까. 그래서 언젠가는 나도 뭐 하나 잘하는 걸 만들어보자, 해서 하모니카를 배웠어요. 하모니카로 아리랑까지 불었는데, 하다 보니 이게 돈도 안 되고, 어디 가서 공연할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던져버렸어요. 내 방에 가면 그 하모니카가 아직도 있어요.”

-낭만과 실용의 극단을 왔다 갔다 하십니다.

“그게 내 삶이에요. 일본 유학도 ‘몰래카메라’ ‘양심 냉장고’로 연예 대상 받고 한창 잘나가던 1998년, 서른여덟 살에 떠났어요. 언제든 내려놓고 더 멀리 보자고. 육십 넘어 활동하는 일본 코미디언들 보고, 더 과감해져야 한다는 것도 배웠죠.

유학 가서 진짜 열심히 공부했는데, 지금 다시 일본어를 공부하려면 ‘이거 해서 뭘 하나’ 싶은 거예요. 일본 사람과 친구도 되고, 비즈니스도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스스로 동기부여를 해야 뭐든 할 수 있어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떤 어른인가요?

“같이 놀면 재밌는 어른이에요. 친해지기 어려워서 그렇지 친해지면 웃겨주지 계산해주지 먹고사는 일, 가족과 현명하게 지내는 법도 알려주지. 이혼했다고 하면 ‘대단한 결단 했네. 얼굴 좋아 보인다.’ 복잡한 사생활 안 묻고 막 띄워줘요. 다 자기 삶을 사는 거예요. 개인의 삶은 타인이 좋다 나쁘다, 할 게 없어요.”

-잔소리도 간섭도 안합니까?

“안해요. 나는 딸이 전화 안 해도 섭섭해하지 않아요. 하나도 궁금하지도 않아요. 딸한테도 일절 사생활 질문 같은 건 안 해요. 요즘 뭐하냐? 그 정도만 묻죠. 나는 남한테 관심이 없어요. 오직 나와 내 일만 관심 있어요.

나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삶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자기중심이 없는 사람은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해요. 혼자 못 있고 외로워하다 아무 사람이나 만나 사고를 치지요. 그러니까 사람들 하고 너무 부딪혀서 살려고 하기보다 좀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해요.”

‘복수혈전’ ‘복면달호’ ‘전국노래자랑’ 그동안 세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사진=김흥구

-고독과 침묵이 코미디에 꼭 필요하다고 했지요?

“필요합니다. 예능은 매 순간이 살얼음판이에요. 자칫 웃기려다 상처 주고 차별에 빠지는 수가 있어요. 긴장을 놓지 않으려면 혼자 있는 연습이 필수입니다. 대기실에서도 나는 늘 침묵해요. 재료가 신선해야 맛이 좋은데, 재미난 에피소드를 미리 풀면 카메라 앞에선 김 식은 반찬만 나가는 격이니까. 공연 전에 악기 조율하듯 침묵하는 거죠.”

‘No 논란 No 미담’이라는 ‘에누리 없는 팩트’처럼, 40년간 실수가 없었던 건 카메라 앞에서 단 하루도 마음을 놓은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간은 복잡하고 연약한 존재라 사람마다 상처받는 지점이 다르고, 긴장이 쌓일수록 고독은 깊어지더라고.

“마냥 착한 사람이 될 수도 또 너무 끌어내릴 수도 없는데, 그 지점을 찾기가 참 어려워요.”

-실수가 얼마만큼 두려운가요?

“우리나라는 ‘걸리면 죽는다’는 정서가 팽배해요. 저도 운이 좋아 여기까지 잘 왔죠. 촬영 중에도 몇 번씩 죽을 고비도 넘겼어요. 어느새 조심하는 게 몸에 배었어요. 술을 마셔도 집 근처에서만 마시고, 실수하면 후배들한테도 바로 사과합니다. 꼬랑지를 싹 내려요. 싸울 필요가 없으니까.”

만나는 사람도 성정이 유순한 초식동물들이라고 했다.

-문득 궁금합니다. 어떤 사람이 규라인이 되죠?

“라인이 어딨어요? 유라인이다 규라인이다 다 재미로 한 거예요. 하하. 다만 보는 눈이 있어서 김구라도 홍진경도 감이 오자마자 PD들에게 추천했죠. 강호동이나 이윤석, 요쪽 라인들도 제가 좀 귀여워해요. 하하.”

‘귀여워한다’는 동사가 산뜻하게 들렸다. ‘귀여움을 떠는 사람’은 상대의 기색을 최우선으로 살핀다. ‘귀여우면’ 피차 관대해진다. 상대를 제압하거나 함부로 하지 않고, 나와 타인의 귀여움과 잘됨의 균형을 맞추는 이경규의 생존 라인.

이윤석, 윤형빈. 이경규가 꼽는 애제자.

-그 오랜 세월 동안 변덕 심한 대중들의 눈 밖에 나지 않고 귀여움을 받는 비법이 궁금해요.

“나를 잘 관찰하면 돼요. 저는 저를 좋아하고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프로그램으로 던져요. 낚시를 하면 요런 재미가 있으니 해보자, 골프를 좋아하니 요런 걸 같이 즐겨보자…

대신 현장에서 PD에게 재미없으면 ‘재미없다’고 혹독하게 얘기해요. 요렇게 하면 좀 더 잘될 거라고, 저렇게 한번 해보자고. 웃음도 공부처럼 엉덩이 싸움이에요. 내가 웃고 제작진이 웃어야 시청자가 웃어요. 그런데 말해도 도저히 가망이 없겠다 싶으면 그냥 가만있어요."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고 했다.

“오래 하다 보니 제가 촉이 좀 있잖아요. 가령 ‘이경규가 간다’ 이런 코너 제목도 제가 짓고서 이건 ‘계속 간다. 나이 먹어도 언제든 할 수 있겠다’ 이런 길이 보이거든요. ‘복수혈전’은 영화는 망했지만, 이름은 남았어요. 요즘도 축구 경기를 보면 ‘복수혈전’이라는 단어가 고사성어처럼 쓰여요.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영화는 박찬욱 감독이 찍었지만, 나는 혼자 그래요. 복수는 누구의 것도 아닌 내 것이라고. 하하. ‘복면가왕’도 그래요. 원래 복면은 ‘복면강도’처럼 부정적인 이미지가 센데, 영화 ‘복면달호’ 덕분에 재밌어졌잖아요. ‘도시 어부’도 처음엔 ‘삼면이 바다’였다가 진화했어요. ‘개는 훌륭하다’도 처음엔 ‘개가천선’이었다가 바꿨죠. 좋은 프로그램은 다 좋은 이야기를 품고 있어요.”

-예능 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하세요?

“그럼요. 프로그램이 나를 살렸어요. ‘양심 냉장고’ 이후엔 누가 안 봐도 정지선을 지켜요. ‘개는 훌륭하다’를 하고 나선 개가 오줌 누면 꼭 그 자리에 물을 뿌려서 희석을 시켜요. ‘찍히며’ 살면서 참 재밌었어요.

촬영하면서 전 세계 롤러코스터를 다 타봤어요. 라스베이거스, 독일 온갖 무섭다는 놀이기구는 다 탔죠. 94년 월드컵부터 카타르 월드컵까지, 남아공, 코스타리카 다 다녀온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겁니다. 헬기 타고 알래스카까지 가서 낚시한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있겠어요?

침묵과 고독은 낚시에서 배웠다.

내가 정신이 나가서 그런지 몰라도 얼마 전에 제주도에서 30m 바닷속에 들어갔어요. 스킨스쿠버들이 분명 금방 나올 거라고 했는데, 바다에서 1시간을 있다 나왔어요. 죽을 것 같으니까 입에 문 호스에 온 정신을 집중해서 버틴 거야. 하하. 나를 움직이는 모든 힘은 다 프로그램이에요.”

촬영용 인간으로 계속 다이내믹해지고 있다고 크게 웃었다. 불안이 배인 호탕한 웃음이었다.

-가장 어려운 사람은 누군가요?

“나예요. 나를 컨트롤 하는 게 어렵고, 내가 제일 무서워요. 왜 나는 나이를 먹을까… 그걸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워요. 함께 사는 아내와 강아지도 어려워요. 행복도 주지만 고통도 주니까요. 아내도 딸도 강아지도 기댈 수 있는 언덕이지만, 또 제게 피해를 주는 존재예요. 나 혼자 살았다면 이렇게 열심히 안 살았을 거야. 일찍 은퇴하고 낚시나 하러 돌아다녔겠지.”

-이즈음에서 오래 가는 진짜 비결을 말해주시지요.

“(잠시 침묵) 저는 결석을 안했어요. 약속 장소에도 한 번도 늦게 간 적이 없어요. 스태프들이 저를 기다린 적이 없습니다. “이경규 왜 안 와? 녹화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적이 없어요. 그건 자랑할 수 있어요.”

영화 ‘복면달호’의 한 장면

대신 불평도 마음껏, 성실도 마음껏 했다. 영화 ‘복면달호’ 개봉할 때는 배우 차태현과 거제도까지 무대인사만 120번을 갔다던 그다.

-왜 어떤 사람은 금방 지치고 어떤 사람은 안 지칠까요?

“즐거워야죠. 나는 다 즐거워서 했어요. 나는 내가 일을 계속하는 게 통쾌해요. 지금도 일이 없어도 무조건 뛰쳐나가요. 나가서 뭐든 찾고, 뭐든 해요. 할 일 없으면 셀프 카메라라도 찍고 있을 거예요. 위기다, 위기다 그러는데, 위기가 기회예요. 플랫폼이 많아졌잖아요. 경쟁도 기회예요. 운동회에서 줄다리기하듯 본능적으로 재밌게 경쟁하면 돼요.

그리고 안 지치려면 취미가 있어야 합니다. 취미는 인생의 낙이에요. 낚시를 가거나 프리미어리그 응원을 하거나. 그거에 목숨 걸면 일상이 행복해져요. 오락이나 도박 같은 취미 말고, 건설적인 취미가 있으면 일상이 튼튼해집니다. 좋아하는 운동이 있으면, 동기부여가 돼서 일도 열심히 해요. 좋아하는 스포츠팀이 있으면 좌절하지 않아요.”

인생이 의도대로 안 된다는 사실은 데뷔하면서부터 알았다고 했다. 그런 인생에 원한 품지 않고, 실컷 불평하고 실컷 움직이라고 이경규는 일갈한다. 비웃음이 웃음이 되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고. ‘인(人) 앤 인(人) 픽처스’라고 이경규가 이름 지은 영화사는, 필모그래피가 쌓여갈수록 사람 인이 아니라 참을 인(忍)이 되더라고, 그가 웃었다. 그렇게 오늘도 농담하며 공황장애 약을 먹는 이경규.

까칠한 휴머니스트 이경규./사진=김흥구

-마지막으로 관록의 코미디언으로서 어떻게 하면 웃으며 살 수 있는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소확행보다 대확행으로 살라고 해요. 사소한 데서 행복을 찾지 말고 더 큰 데서 행복을 찾아보라고요. 엄마가 싸준 도시락이 행복이지만, 엄마가 계시다는 것 자체가 더 큰 행복이에요. 돈 벌고 성공하는 것도 즐겁지만, 내가 이 직업을 가진 게 더 큰 행복이죠. 소확행을 쫓느라 대확행을 놓치지 마세요. 인생은 어차피 의도대로 안 됩니다.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파하지 말고, 침묵과 고독도 즐기세요.”

‘모두가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지만, 결국은 서로를 위한 일이다… 돈을 향해 달려가도 좋다. 솔직하게 드러내면 된다. 그저 일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노동이 곧 삶이니까.’-’삶이라는 완벽한 농담’ 중에서.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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