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위근우

애니메이션 <퇴마록> 스틸컷. 쇼박스


*원작 소설을 포함한 <퇴마록>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있으니, 해당 내용에 익숙하신 분들은 잊지 말고 건강 검진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자신이 부당한 경험을 당했다는 걸 모르진 않는다. 구리시 부원씨네마에서 혼자 영화 <퇴마록>을 본 1998년, 고3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내가 극장에서 돈과 시간을 허비해 본 것은 요즘 표현으로 ‘허위 매물’이었다. 원작과는 거리가 멀고 오컬트도 아니고 판타지 액션은 더더욱 아닌 그저 어두침침한 배경의 신파 멜로를 만들기 위해 굳이 <퇴마록>이란 이름을 가져오고 굳이 대배우 안성기와 당시 가장 뜨거운 배우였던 신현준(<은행나무 침대> 황장군 캐릭터의 인기는 주연인 한석규를 능가할 정도였다)을 섭외해 굳이 액션과 상관없는 무의미한 CG 장면들을 선심 쓰듯 기워 붙인 그 모든 일련의 과정과 결과물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영화의 재미를 위해 원작의 설정과 캐릭터를 각색했다기보다는, 원작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라면 재미까지 포기하겠단 결기가 느껴진 그 괴작을 보며 어린 나이에도 직감할 수 있었다. 영화의 흥행은 글렀고, 앞으로 <퇴마록>의 영상화 역시 글렀으며, 영화를 망친 건 원작을 존중하지 않는 이들이지만 영상화되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쓰라림은 결국 나를 포함한 원작 팬의 몫이라는 것. 이 예상 중 두 가지는 맞았고 한 가지는 틀렸다. 올해 2월 애니메이션 <퇴마록>(이하 <퇴마록 애니>)이 극장에 개봉하며 다시 한 번 영상화된 <퇴마록>을 극장에서 볼 수 있었다. 무려 27년이 지나 만난 이 작품에 대한 감정은, 그래서 추억의 원작에 대한 향수보다는 차라리 1998년작 <퇴마록>에 대한 한풀이에 가깝다.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판권을 팔고 영화화가 되었음에도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던 서브컬쳐와 그 팬들의 원념을 푸는 한풀이.

실제로 이번 <퇴마록 애니>는 원작에 매우 충실하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퇴마사들의 만남을 다룬 원작의 첫 에피소드 ‘하늘이 불타던 날’을 골자로 하며, 의사 시절 악령 들린 아이를 구하지 못한 부채감에 시달리는 박신부나 동생을 해친 수마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현암의 개인사도 적절한 시점에 회상을 통해 담아낸다. 하지만 이번 작품이 정말로 원작 소설 팬들의 한을 풀어주는 건, 그저 원작의 설정을 다수 유지해서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그려오던 장면들이 좋은 연출자에 의해 가시화될 때 스크린을 통해 얼마나 시각적인 쾌감을 줄 수 있는지 증명해서다. 작품의 메인 악역인 해동밀교 서교주의 양아들이자 자칫 악신의 제물이 될 뻔한 준후가 친아버지 장호법의 죽음에 분노하며 제석천의 뇌전을 서교주에게 발사하는 장면은 천재의 각성과 선역으로의 합류라는 서사적 하이라이트를 그만큼 강렬한 액션신을 통해 구현한다. 영화의 흐름을 위해 적절히 각색하거나 추가한 장면들에서조차 원작의 중요 설정과 세계관은 높은 밀도의 액션으로 가시화되는데, 박신부의 과거사를 다룬 원작의 ‘파문당한 신부’ 에피소드의 설정 일부를 활용한 초반부 아스타로트와의 대결에선 박신부의 오라 능력을 활용한 구마 의식을 원작의 묘사 이상으로 역동적으로 그려냈고, 스토리상 거의 카메오에 가깝게 등장한 승희가 애염명왕의 힘을 각성해 아스타로트에게 타격을 주는 장면은 짧지만 너무나 인상적이라 출연 분량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정도다. 다시 말해 뛰어난 작화와 연출로 <퇴마록>의 주요 인물과 설정이 만족스럽게 재현된 만큼, <퇴마록> 원작도 영화적으로 멋진 신이 될 만한 흥미로운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제공해준 셈이다. 애초에 그것이 팬들이 <퇴마록> 영상화를 기대했던 중요한 이유였다.

앞서 한풀이라고도 했지만, 드디어 제대로 만들어진 <퇴마록> 영상화를 보며 감개무량한 동시에, 그토록 실망스러웠던 1998년작에 대한 기억에 새삼 또 열불이 나는 건 그래서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차이, 27년간 발전한 시각효과의 차이는 부차적이다. 원작과의 싱크로율 문제도 아니다. 당대의 인기 IP를 이용해 심지어 제목 그대로 미디어믹스를 하면서도 그것이 인기 있을 수 있던 핵심 아이디어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면 원작의 설정들은 빤하게 각색된 스토리의 진부함을 감추기 위한 장식으로 전락할 뿐이다. <퇴마록>의 핵심 아이디어는 현암이 자유자재로 나는 귀검 월향을 사용한다는 게 아니다(이것이 1998년작에서 의미 없이 CG로 구현하며 생색만 낸 요소다). 서로 다른 신비한 능력과 아픈 사연을 지닌 주인공들이 자신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힘을 합쳐 악에 대항해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지켜준다는 것이야말로 독자들이 원작에 이입했던 이유다. 그것이 ‘퇴마행(退麻行)’이다. 한 편의 완결된 이야기가 되기엔 좀 아쉬운 서막으로서의 <퇴마록 애니>가 그럼에도 하나의 정합적이고 매력적인 세계를 이루는 건 이 지점이다. 아이(준후)를 지키겠다는 장호법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구마사제와, 타락한 교주를 막으려는 밀교의 천재 소년, 눈앞의 불의를 두고 볼 수 없는 열혈 청년이 공통의 적 서교주를 향해 대항할 때, <엑소시스트>와 <공작왕>과 무협지의 세계 역시 대통합을 이룬다. 하여 이번 작품이 원작 팬의 숙원을 풀어줬다는 것은 결과지 목적이 아니다. 당대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원작의 핵심 아이디어를 화려한 액션으로 현재의 관객에게 납득시키려는 노력에 원작 팬들이 먼저 감격한 것뿐이다.

그러니 27년 만에 <퇴마록 애니>를 만난 소설 팬들의 반응을 그저 나이 든 원작 근본주의자들의 호들갑 섞인 원념 정도로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27년 전 내가 극장에서 겪은 좌절과 분노, 허탈함에 대한 <퇴마록> 팬덤의 반발이야말로 현재 웹툰, 웹소설 원작이 메인스트림에서 충분히 존중받기까지의 역사적 흐름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1998년 <퇴마록> 영화는 일회적이고 우연한 실패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당대의 신문물인 PC 통신으로 연재되던 조금은 유치한 오컬트 판타지의 어떤 면에 열광했는지 관심도 없던 한국 영화계는 2006년에도 강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아파트>라는 근본 없는 공포 영화를 생산해냈다. 영화 <아파트>를 기억하고, 제목과 설정 일부만 빌려 몰개성한 이야기를 치장하는데 그친 수많은 웹툰 원작 드라마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강풀이 직접 각본을 쓴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무빙>, <조명가게>의 완성도와 상업적 성공이 감개무량하듯, 27년을 기다린 <퇴마록 애니> 역시 비정상의 정상화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서브컬쳐 원작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그토록 오래 외쳐오지 않았더라면 2014년작 tvN 드라마 <미생>은 바둑 두던 주인공이 회사에서 연애하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고, 2020년작 JTBC <이태원 클라쓰>는 업체 간 서바이벌 요리 대결로 주인공이 승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근래 MBC <지금 거신 전화는>, 티빙 <스터디그룹> 등의 성공으로 볼 수 있듯 이제 웹툰, 웹소설 원작에 대한 진지한 접근은 영상 산업에서 상식적인 일이 되었지만, 그 상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좌절과 원작 팬의 피눈물이 있었다. 그 첫 좌절을 경험한 1998년 여름의 어느 날이 억울하면서도 나름의 각별함을 갖는 건 그래서다. 제대로 된 <퇴마록> 영화가 나올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서브컬쳐 원작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게 되었다.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 물론 그래도, 27년은 너무 길었지만.

경향신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46031 尹 "교도소 배울게 많은 곳"…관저 돌아와 김여사와 김치찌개 식사 [입장 전문] 랭크뉴스 2025.03.08
46030 공수처, 검찰 尹석방 지휘에 “유감”…공수처 책임론도 랭크뉴스 2025.03.08
46029 손흔들고, 웃고, 주먹 불끈…윤대통령 석방 순간 [지금뉴스] 랭크뉴스 2025.03.08
46028 신애라 이어 김영철도 당했다…"국적 박탈" "구금됐다" 무슨 일 랭크뉴스 2025.03.08
46027 대검-수사팀 갈등 끝에 검찰총장이 석방 지휘 랭크뉴스 2025.03.08
46026 외신, 윤 대통령 구속취소 결정 따른 석방 긴급 보도 랭크뉴스 2025.03.08
46025 여 “왜곡된 법치 바로잡는 석방 환영”·야 “국민이 용서 안해” 랭크뉴스 2025.03.08
46024 윤, 김건희 여사 등과 김치찌개 식사···“구치소는 대통령 가도 배울 게 많은 곳” 랭크뉴스 2025.03.08
46023 외신, 尹대통령 구속취소 결정 따른 석방 긴급 보도 랭크뉴스 2025.03.08
46022 "강아지들 꼬리치며 멍멍…돌아온 尹, 김여사와 김치찌개 저녁" [입장 전문] 랭크뉴스 2025.03.08
46021 “빨갱이 척결” vs “내란 공범”… 尹 석방에 서울 곳곳서 ‘반탄·찬탄’ 집회 [르포] 랭크뉴스 2025.03.08
46020 석방된 윤 대통령, 김건희 여사 등과 김치찌개 식사 랭크뉴스 2025.03.08
46019 尹, 관저앞 악수 나눌때…"어떻게 이런 일이" 헌재 앞 찬탄집회 분노 랭크뉴스 2025.03.08
46018 윤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지도부, 석방 반발 단식농성 돌입 랭크뉴스 2025.03.08
46017 "베트남 여행 다녀와 걸렸다"…0세부터 50세까지 감염된 '이 병' 랭크뉴스 2025.03.08
46016 '이소룡처럼 720도 돌려차기'…中 휴머노이드로봇 화제 랭크뉴스 2025.03.08
46015 윤 대통령 “재판부 용기와 결단에 감사”…곧 긴급회의 소집 랭크뉴스 2025.03.08
46014 尹, 관저 앞에 모인 지지자들과 악수…찬탄 집회선 분통 랭크뉴스 2025.03.08
46013 윤 대통령 구치소서 걸어나와 인사…지지자들 "고생하셨다" 눈물 랭크뉴스 2025.03.08
46012 尹 석방, 72시간 숙고 檢 …쟁점 부각되는 12·3 계엄 수사·기소 랭크뉴스 2025.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