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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괴롭힘 신고 역대 최대였지만
‘법 위반 없음’ 판정도 급속 증가
괴롭힘 기준 모호해 ‘악용’ 여지
게티이미지뱅크

기상캐스터 고(故) 오요안나씨 사망 사건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제도’의 허점을 드러냈다. 오씨 같은 프리랜서 노동자 등은 제도의 사각지대에 방치되고 있었다. 오씨 사건을 계기로 괴롭힘 금지 제도를 적용하는 대상을 확대하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객관적 기준부터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제도 시행 7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정의가 여전히 모호해 노동자와 사용자 모두 혼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근로기준법으로 직장 내 괴롭힘을 다룰 게 아니라 별도 법안을 만들어 직장 내 괴롭힘 판단 기준, 조사 절차, 예방교육 등을 재설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괴롭힘 없었다’ 3배↑… 오남용 우려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제도는 2019년 7월 시행됐다. 간호사들의 ‘태움’ 사건, IT기업 위디스크 회장의 폭행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근로기준법 안에 ‘괴롭힘’을 금지하는 법 조항을 신설했다.

근로기준법은 직장 내 괴롭힘을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직장 내 괴롭힘 행위를 알게 된 사람은 누구나 사용자에게 알릴 수 있고, 사용자는 즉시 사실 확인 조사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현행법상 직장 내 괴롭힘 조사 주체는 ‘사용자’다. 원칙적으로 사업장 안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다만 회사의 대응이 미흡하거나 사용자가 가해자일 경우 고용노동부·지방고용노동관서에 피해를 신고할 수 있다. 고용부가 집계하는 직장 내 괴롭힘 신고는 실제 사건의 일부일 뿐이며 사업장에서 자체적으로 종결한 사건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직장 내 괴롭힘 신고는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김위상 국민의힘 의원이 고용부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직장 내 괴롭힘 신고는 1만2253건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전년 1만1038건보다 11% 늘었고, 법 시행 초기인 2020년 5823건과 비교하면 배 이상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법 위반 없음’ 판정 증가에도 주목한다. 2020년 1365건에서 지난해 3836건으로 3배 가까이 뛰었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긴 했지만 동시에 신고 제도가 오남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기분 나쁘면 괴롭힘?


직장 내 괴롭힘을 판단하는 기준은 여전히 모호하다. 업무상 적정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신체적·정신적 고통의 기준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보니 근로자와 사용자가 제각각 ‘괴롭힘’ 행위를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고용부의 온라인 민원창구에는 “상사가 자꾸 한숨을 쉬고 꼬투리 잡는다” “육아휴직 대체인력을 뽑지 않아 업무가 늘었다” “팀원 중 내게만 업무 보고를 내라고 한다” 등으로 신고하고 싶다는 내용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직장에서 업무상 불가피하게 빚어지는 갈등 상황 상당수가 ‘괴롭힘’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게다가 법은 사용자에게 피해 신고가 들어오면 무조건 조사해야 하는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하지만 허위·악성 신고에 대해서는 처벌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일부 사업장에선 ‘먼저 신고하는 사람이 이긴다’는 식의 인식까지 확산되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제도가 누군가에게 ‘괴롭힘 가해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울 수 있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 1월 국회에서 열린 직장 내 괴롭힘 제도 개선 토론회에서도 이 같은 문제가 지적됐다. 김승현 노무법인 시선 공인노무사는 이 자리에서 “직장 내 괴롭힘 제도가 노노(勞勞) 갈등을 양산하고 있다. 몇몇 공공기관은 업무 마비 수준”이라며 “제도의 기준점이 없다 보니 ‘누가 칼자루를 쥐는가’에만 몰두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객관적 지표 부재, ‘악순환’ 반복

당정은 일명 ‘오요안나법’으로 불리는 특별법을 만들어 프리랜서 등으로 제도 적용 대상을 넓히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전문가들은 법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명확한 판단 기준이 없다면 ‘진짜 피해자’를 보호하기 어렵다고 본다.

장진희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은 7일 “제도 악용 사례가 늘면 피해자들이 ‘진짜 피해자가 맞나’라는 의심을 받게 돼 법이 제 기능을 못한다. 신고 오남용에 대한 논의부터 충분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객관적인 괴롭힘의 기준과 조사 절차 등을 특별법에 명시하고, 소규모 사업장을 위한 갈등 조정 기구 등을 마련하는 근거도 담아야 한다고 했다.

서유정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연구위원은 “과거에는 회식에 부르지 않은 게 괴롭힘이었다면 이제는 회식에 부르는 걸 괴롭힘으로 볼 수 있다. 괴롭힘의 개념은 변하기 때문에 장기 연구가 필요한 분야”라며 “해외에선 지속성·반복성 등을 괴롭힘의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다. 우리도 객관적 기준을 세워놓지 않으면 제도 적용 대상을 확대하거나 사건 처리 기구를 만들더라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준희 광운대 법학부 교수는 “현재는 폭행 등 형사처벌 사항마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해 행정 과부하가 심하다. 정부 매뉴얼에서 사용자가 처리할 수 없는 괴롭힘 행위를 구분해줄 필요가 있다”며 “판례가 누적되면서 ‘괴롭힘 행위’의 테두리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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