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 한국전쟁의 장군 열전]
②1950년 8월 워커: 사즉생 리더십의 진수
②1950년 8월 워커: 사즉생 리더십의 진수
편집자주
6.25 전쟁 75주년 기획 ‘명장’은 대한민국을 구한 장군들의 ‘가장 빛나던 순간’을 조명합니다.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고 전황을 뒤집은 리더십의 성공 비결을 알아봅니다.월튼 워커 장군. 위키미디어 커먼즈
“퇴각은 용납할 수 없다. 우리 중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모두 함께 싸우다 죽을 것이다.”
1950년 7월 29일. 경북 상주 미 육군 25사단 지휘소 분위기는 비장했다. 저 아래 진주가 공격 받았다는 소식에 이어, 방금 8군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이 “싸우다 죽자”는 폭탄선언을 했다.
훗날
‘버티지 못하면 죽음’(Stand or Die)이란 구호로 알려진 워커의 훈령
은 일선에 즉시 전파됐다. 반응은 조금씩 달랐다고 한다. 어떤 장교는 사기 저하를 걱정했고, 누구는 ‘달성 불가능한 명령’이란 회의적 반응(전사가 로이 애플먼)을 내놓았다. 그러나 일부 장병은 ‘이제야 제대로 싸운다니 속이 후련하다’(다큐 작가 존 톨랜드)며 전선 총사령관의 결의를 반겼다.워커의 이 독한 명령은, 비유하자면 1597년 9월 명량해전 전날 충무공의 ‘필사즉생’ 훈시를 떠올리게 한다.
이순신의 명량처럼, 워커의 낙동강도 죽고자 하는 각오에서 시작된 승리
였다. 충무공이 명량에서 다시 시작해 노량에서 스러질 때까지 14개월은, 워커가 낙동강을 틀어막고 압록강을 찍은 뒤 한강(서울)에서 숨을 거둔 5개월과 닮아 있다.두 장군의 마지막 전쟁은 비슷한 극적 요소를 갖췄다. ①사즉생 각오 ②정확한 전장 선택(울돌목, 낙동강) ③혼자 적을 맞선 용기(대장선 돌격, 적진 정찰) ④앞길을 막는 최고권력자(선조, 맥아더) ⑤질투에 사로잡힌 동료(원균, 알몬드) ⑥안타까운 최후(총상, 사고)가 차례로 이어진다.
‘호텔 이름’으로만 알려진 외국 장군을 불세출 성웅에 빗댄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일까? 비교가 온당한지 확인하기 위해 1950년 뜨거웠던 여름, 신생국가 한국의 운명을 짊어졌던 미국 장군의 행적을 따라가 본다.
조지 패튼 미군 대장이 1945년 4월 월튼 워커의 중장 진급을 축하하고 있다. 미 육군
“내가 이끈 모든 군단 중에, 자네 군단이 가장 공격지향적이었네.”(조지 패튼이 월튼 워커에게)
①결심: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워커는 왜 하필, 그때 거기서 죽을 각오를 했을까.
시점을 5, 6년 앞으로 돌려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워커는 조지 패튼이 이끈 미 육군 제3군에서 ‘가장 용감한 군단장’
으로 명성이 높았다. 패튼은 적진을 고속으로 치고 들어가 쪼개는 ‘기동전의 대가’였다. 패튼의 이런 공격철학을 가장 잘 수행한 부하가 20군단장 워커다. 패튼은 애초 워커의 작은 키와 살찐 체격 탓에 편견을 가졌지만, 나중엔 워커를 “나의 잘 싸우는 개자식(fighting son of bitch)”이라고 부르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워커도 패튼의 제자를 자처했다. 패튼처럼, 너무 위험하다 싶게 전선에 다가갔다. 한국에서도 늘 패튼 자서전을 옆에 끼고, 패튼 3군의 전투 교훈을 담은 책을 사령부에 비치했다. 워커가 패튼에게 받은 영향은 6·25에도 상당한 영향을 줬다.
다시 1950년 7월 말로 돌아와, 당시는 공격 지상주의자 워커마저 방어에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미 육군의 전력은 더 이상 세계 최강이 아니었다
. 1945년 800만 명이던 병력은 1950년 59만 명으로, 사단 수는 89개에서 10개로 줄어 있었다.1950년 7월 5일 한국전쟁에 투입된 미24사단 소속 케네스 셰드릭(오른쪽) 일병이 경기 오산 인근에서 로켓 발사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셰드릭 일병은 이 사진 촬영 수 초 후에 사망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미 육군 퍼블릭 도메인)
미국은 북한의 기습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에 주둔하던 미8군은 병력, 훈련, 장비, 사기 등 준비가 매우 부족한 채로 투입됐다. 한국에 처음 들어온 미24사단은 7월 오산, 금강, 대전에서 차례로 북한군에 깨지며, 미군 역사상 최초로 사단장(윌리엄 딘 소장)이 전투 중 실종되는 굴욕을 당했다.
24사단 외 1기병사단과 25사단이 들어와 있었다. 워커는 1기병사단을 추풍령 라인(영동·김천)에 배치하고, 25사단을 국군 방어선과 연결된 상주로 보냈다. 그 사이 북한군 주력은 경부가도를 돌파해 대구를 노렸고, 일부 병력은 우회기동을 통해 진주로 들어와 마산을 위협했다. 한반도 면적 90%가 북한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때 워커에겐 모든 게 부족한 3개 미 보병사단이 있었다. 그리고 전투 경험 없는 국군 5개 사단 지휘권을 넘겨 받았다.
8개 사단으로 최후 방어선을 형성해야 했다
. 항공시찰에 나선 워커는 한반도 남쪽을 구불구불 흐르는 긴 강을 가리켰다. 저기에 방어선을 친다. 낙동강이었다.군인은 누구나 '목숨을 걸어야 할 때'를 상상하며 자신을 단련한다. 42년 군 경력 백전노장은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는 걸 직감했다. 이
텍
사스 사나이는 한반도 남동쪽 귀퉁이 작은 땅에 자기 목숨을 걸어보기로 했다
.월튼 워커 장군 이력. 신동준 기자
“알량한 용기 따위, 제대로 훈련된 총알 앞에 무력하다.”(조지 패튼 미 육군 대장)
②준비: 목숨 걸 ‘장소’를 잘 고르라
지휘관이 용기만 강조하며 부하를 사지로 넣으면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이 된다. 워커는 달랐다. 밀리고 밀리다 낙동강에 진을 친 게 아니라,
나와 적의 능력을 정확히 계산한 끝에 의도적으로 낙동강을 반격의 발판으로 삼았다
.톨랜드의 책 ‘6·25 전쟁’을 보면 사즉생 훈령 보름 전인 7월 14일, 이미 워커가 8군 작전참모 매클린 대령에게 전용기를 내주면서 낙동강 정찰을 지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직 금강방어선이 살아 있을 때다. 사즉생 훈령은 그냥 나온 게 아니라,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계산에서 비롯된 사기 진작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군과 미군의 낙동강 방어선. 송정근 기자
‘싸울 장소’를 적보다 먼저 고르는 것은 연합군 최고의 명장 패튼이 워커에게 귀가 닳도록 강조했던 가르침이다.
“고급지휘관은 어떻게 싸우느냐가 아니라 어디서 싸우는가를 결정해야 한다”
고 패튼은 늘 말했다. 워커가 전투 장소를 신중히 고른 것은 충무공이 13척 판옥선의 능력을 발휘할 장소로 좁은 울돌목을 택한 것과 비슷하다.부대 배치도 논리적이었다. 워커는 미군과 국군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양군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정했다. 화력과 기동력 위주의 미군 3개 사단(24, 25, 1기병)은 개활지인 왜관~마산 세로축에 세웠고, 보병 위주 국군 5개 사단(1, 3, 6, 8, 수도)은 산이 많은 왜관~영덕 가로축에 배열했다.
공격적 성향과 고집스러워 보이는 얼굴 때문에 기자들 사이에서 ‘불독 워커’란 별명으로 불렸지만, 아들 샘 워커(미 육군 대장)와 부관 조 타이너의 회고에 따르면 워커는 평생을 전쟁사에 천착한 지적인 군인이었다.
“워커의 낙동강선 방어는 미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전 중 하나다. 그러나 그 성공은 동시대에도, 역사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다.”(전쟁사학자 딘 노보비에이스키)
한국전쟁에 투입된 미1기병사단 5연대전투단 병력이 1950년 9월 북진을 위해 보트로 낙동강을 도하하고 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미 육군 공용 도메인)
③독창성: 책에 없는 해법도 필요하다
워커의 독창성 덕분에 국군과 미군은 전에 없던 방어 개념을 낙동강 전투에 적용할 수 있었다. 바로
기동방어
다. 병력이 부족해 모든 전선에 빽빽하게 병력을 배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워커는 한미 연합군의 우월한 기동력을 이용, 후방 예비전력을 위기 지역에 신속하게 집중
하는 방법으로 적의 예봉을 매번 꺾었다.전쟁사학자 딘 노보비에이스키에 따르면, 이렇게 기동력을 활용한 방어는 1950년 당시엔 기갑부대 교리에만 존재했다. 이걸 워커가 보병 포병 등을 함께 활용한 대규모 방어 개념으로 확장했고, 1954년에서야 미 육군은 이 개념을 표준 교리에 채용했다고 한다.
기동방어는 당시 상황과도 맞았다. 미군과 국군은 코너에 몰려 있었지만, 오히려 구석에 있었기 때문에 ‘내선방어’가 가능했다. 예컨대 방어선 밖 북한군 부대가 마산에서 영덕으로 이동하려면 왜관까지 북상한 뒤 다시 동쪽으로 꺾어 동해안까지 이동(130+110=240㎞)해야 했다. 그러나 미군이나 국군 부대는 방어선 안에서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더구나 미군은 해공군의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북한군보다 훨씬 많은 차량을 보유했다.
적극적 정찰도 승리에 큰 몫을 했다. 워커는 직접 항공정찰을 할 때면 총알이 날아올 때까지 적진에 접근하라고 조종사에게 지시했다. 그러다 보니 현장 부대장보다 전선 사정을 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워커가 대구 거리에 나타나 시민들을 안심시켰다. 대구역 근처에 포탄이 떨어져 대혼란이 일어날 뻔했으나, 워커의 출현으로 상황이 정돈됐다.”(존 톨랜드가 묘사한 1950년 8월 18일)
6·25 전쟁 동안
워커는 사령부 업무를 참모들에게 맡기고 그날의 가장 치열한 전투 현장들을 순시
했다. 하루 평균 네 시간 경비행기를 탔던 기간도 있다. 워커 전담 조종사 마이크 린치의 회고를 보면, 1950년 9월 낙동강 전선 교착상태에서 워커와 린치는 2인승 L-5기를 타고 추풍령을 넘어 대전까지 정찰을 다녀왔다. 총사령관이 경비행기를 타고 적진 안으로 120㎞나 들어간 기록
이다. 6·25 당시 미 육군 항공기(해공군기 별도)가 적진으로 가장 깊숙이 진입한 사례였다고 한다.이렇게 워커가 기동력과 정보력을 활용해 적은 병력으로 버티는 동안, 부산항을 통해 증원 병력(미2사단, 미해병여단, 영국 27여단 등)이 속속 들어왔다. 9월 초 영천을 일시 상실하는 등 위기가 있었지만, 결국 미군과 국군은 북한군 주력을 한반도 남쪽에 잡아둘 수 있었다. 그사이 더글러스 맥아더는 인천에 상륙(9월 15일)해 서울을 수복(9월 28일)했다. 따지고 보면 맥아더 인생 최고의 순간은, 상륙작전에 전력을 양보한 워커의 8군이 남쪽에서 이 악물고 두 달을 버텼기에 가능했다.
더글러스 맥아더(자리에 앉은 사람) 유엔군사령관이 1950년 9월 15일 마운트맥킨리호에서 인천상륙작전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맥아더 옆에서 망원경으로 상황을 확인하는 사람이 에드워드 알몬드 10군단장이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미육군 공공도메인)
“워커는 한국에서 전투하며 동시에 훈련도 해야 했다.”(워커 전기를 쓴 군사작가 찰스 프로빈스)
④공유: 부하가 성장해야 싸움을 이긴다
용장이며 지장인 워커가 두각을 나타낸 점이 하나 더 있었으니, 훈련 전문가로서의 면모다.
워커는 미 육군에서 가장 뛰어난 훈련가
로 꼽혔다. 워커의 훈련 능력이 특히 중요했던 이유는 당시 한국에 파병된 미군은 장군, 영관, 위관, 부사관, 병사 할 것 없이 대부분 실전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워커 휘하 사단장들만 봐도 딘(24사단장)을 빼면 2차대전 때 부대를 지휘해 본 사람이 없었다. 한국 파병 초기에는 군단장도 없어서, 군사령관인 워커가 두 단계 아래 지휘관인 사단장들을 일일이 지도하면서 전투에 임했다.경험도 훈련도 부족한 부하들과 함께 싸우는 상황이 절망적일 법도 했지만, 워커는 직접 나서 하나하나 가르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1950년 7월 8일 미24사단의 천안 전투 당시, 워커는 적을 바로 앞에 둔 상황에서 전차소대장(중위)에게 △이 전투의 목적 △기갑부대가 그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 △추후 소대장이 해야 할 행동을 구체적으로 알려줬다. “현시점에서 우리 목적은 적군을 막는 거야. 따라서 자네가 저 위로 돌격해 치열하게 싸울 필요가 없네. 우리가 할 일은 유리한 지점을 확보한 후 지연전술을 펴는 거다.” 이 일화는 당시 함께 있던 사단장(딘)의 회고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딘은 “군사학교에서나 들을 수 있는 훌륭한 전차 전술 강의였다”며 당시를 돌이켰다.
그렇게 워커는
부하들에게 경험을 전수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 그러나 정작 상관으로부터는 제대로 싸울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했다. 맥아더는 전쟁 초반부터 워커를 교체할 생각을 품었고, 워커에게 부대 지휘권을 다 맡기는 것을 꺼려했다. 맥아더와 워커의 껄끄러운 관계는 전쟁 전체에도 악영향을 줬다.에드워드 알몬드 장군. 미 육군(공유 도메인)
“알몬드 장군은 (오셀로의 음모꾼) 이아고와 같았다.”(맥아더 사령부 한 참모의 회고)
⑤비극: 워커-맥아더-알몬드=이순신-선조-원균
워커는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최대 위기인 낙동강 전선에서 굳게 버텼지만
인천상륙작전의 공을 상관 맥아더에게 다 넘겨줬다
. 게다가 맥아더는 인천에 상륙한 부대(10군단)의 지휘권을 군사령관 워커에게 주지 않고, 자기 측근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을 군단장으로 임명해 지휘하는 ‘이원 체계’를 유지했다. 워커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한 전역의 명령체계를 둘로 쪼개는 이상한 방침 탓에, 워커는 동쪽 10군단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서부에서만 북진해야 했다. 결국 워커의 8군은 10월과 11월 중공군의 두 차례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밀려 12월 다시 38선 부근까지 후퇴했다. 두 달 만에 북한 점령지를 다 내준 졸전 때문에, 워커를 명장 반열에 올려선 안 된다는 평가까지 있다.
워커의 책임이 컸던 것은 맞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뜯어보면, 워커에게 가장 큰 책임을 돌리는 것은 꽤나 부당한 평가
다. 워커는 황제급 권능을 행사했던 맥아더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맥아더 사령부가 중국 개입 가능성을 외면하고 진격 명령만 내리는 바람에 중공군 남하에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당시 미국 쪽 기록을 보면 맥아더는 전쟁 극초반인 1950년 6월 29일부터 상륙작전을 고려했다. 미군을 파병하기 전부터 상륙부터 준비했다는 얘기다. 진득한 정공법보다 화려한 뒤집기(상륙)를 선호했던 맥아더의 개인적 성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맥아더는 왜 워커를 이렇게 불신했을까. 맥아더가 직접 남긴 발언이나 기록을 찾을 수 없지만, 상당수 연구가들은
워커가 패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오랜 기간 유럽에서 싸웠던 ‘유럽파’였기 때문
이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부친(아서 맥아더 주니어)이 필리핀 총독을 지내고, 스스로 필리핀 육군 원수를 겸한 맥아더는 철저히 아시아 중심으로 사고했다. 참모나 예하사령관 역시 태평양에서 오래 일한 부하들을 위주로 중용했는데, 미군 내에선 이 맥아더 충성파들을 ‘바탄의 갱단’이라고 불렀다. 바탄은 필리핀 마닐라만을 감싸는 반도다. 맥아더가 탔던 군용기의 별칭이기도 하다.한국전 당시 미군 수뇌부 관계도. 송정근 기자
이런 맥아더의 거부감을 이용한 사람이 바로 맥아더 사령부 참모장(인천상륙 후 10군단장) 알몬드다. 출세욕이 강했던 알몬드는 중장 진급을 위해 야전 지휘 경험이 필요했고, 맥아더에게 자기 미래를 걸었다.
알몬드는 워커 대신 자기가 성공해야 했다. 그래서 워커를 집요하게 견제했다.
워커는 직속상관 맥아더와 접촉할 기회를 잡지 못했고, 유엔군사령관과 8군사령관 사이 보고-지시는 참모장 알몬드를 통해 이뤄졌다. 미 연구가들은 이 과정에서 2성장군 알몬드가 3성장군 워커의 보고를 고의로 누락하거나, 자기 생각을 맥아더 지시처럼 포장하는 등 ‘장난’을 쳤다고 본다.워커는 보급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워커 참모들 말을 들어보면, 맥아더 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핵심 부대와 물자를 10군단에 몰아줬다. 1950년 9월초 북한군의 공세로 대구가 위험에 몰렸을 때, 워커는 인천 상륙을 위해 비축한 물자를 맥아더에게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워커와 8군 참모들은 인천 상륙 전 마지막 브리핑에 참석했는데, 상륙부대에 보급되는 탄약량을 듣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들은 낙동강에서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데, 유엔군사령부가 저렇게 많은 탄약을 재고로 유지한다는 걸 믿지 못했다. 당시 워커가 했던 말은 이랬다. “내가 여기서 북한군 90%를 죽이는데 쓰는 탄약보다, 쟤들이 월미도에서 북한 애송이 몇 명을 상대하는 탄약이 더 많구만.”
워커-맥아더-알몬드의 삼각관계는,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선조-원균의 관계와도 비슷
해 보인다. 워커와 이순신의 능력이나 전공이 비슷하다는 게 아니라, 전선 사령관이 최고권력자뿐 아니라 권력자의 추종자와도 싸워야 했던 갈등의 서사 구조가 유사하다는 뜻이다.“인천상륙작전 결과, 맥아더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맹신이 퍼졌다. 맥아더의 새 결정인 원산 상륙에 결함이 있었음에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매슈 리지웨이의 회고)
미 8군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이 1950년 7월 24일 트리그브 할브란 리 유엔 사무총장의 특사인 앨퍼드 카친으로부터 유엔기를 넘겨받고 있다. 유엔은 북한의 남침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한국전쟁에 유엔군을 파병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공공도메인)
⑥가정: 역사엔 만약은 없다지만
인천상륙작전은 분명 6·25의 흐름을 바꾼 위대한 전투다. 역사학자나 군사학자들의 평가도 대체로 호의적이다.
그러나
위대한 승리는 오히려 독이 됐다
. 미군 역사상 자존심 강하기로 패튼과 1, 2등을 다툰 맥아더의 어깨엔 더욱 힘이 들어갔다. 미군 수뇌부는, 일본을 무찌르고 공산군마저 한 방에 보낸 전쟁 영웅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로튼 콜린스는 “맥아더의 성공은 너무나 강력해, 합동참모본부도 맥아더에게 의문을 제기하기 어려웠다”고 돌이켰다.해리 트루먼 대통령조차 맥아더 눈치를 봤다
. 맥아더가 미국까지 안 가려는 바람에, 트루먼이 직접 비행기를 여러 번 갈아타고 남태평양 웨이크섬까지 날아와 맥아더 얼굴을 겨우 봤다.워커 측근들은 워커가 정밀하게 계획했던 ‘군산상륙작전’의 존재를 나중에 세상에 알렸다. ①상륙부대가 인천 대신 군산에 내려 ②상륙 당일 대전으로 진격한 뒤 ③낙동강 방어부대가 대전으로 밀고 올라가 ④낙동강-추풍령-대전-군산을 잇는 대포위망을 형성하는 거다. 이렇게 되면 낙동강에 갇혔던 유엔군이 단숨에 북한군을 호남에 가두어 섬멸할 수 있다. 완벽한 되치기다.
실제 인천상륙작전의 경우 상륙지(인천)와 방어선(낙동강)이 너무 멀어, 포위망 완성 전에 많은 북한군이 북쪽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워커는 한국을 방문한 콜린스 참모총장에게 군산 상륙 계획을 설명해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합참보다 더 입김이 센 맥아더가 인천을 고수하면서, 워커의 구상은 지도상 계획으로만 남았다.
물론 ‘군산’이 성공했을 거란 보장은 없다. 빨치산 섬멸 작전으로 미뤄보면, 호남 산악지대에 숨은 북한군 소탕에 상당한 시간이 걸려 북진이 늦었을 수 있다. 북한군 입장에선 방비할 시간이 더 많았을 것이라 서울 수복도 지연됐을 수 있다. 또 중공군의 대비 역시 실제 역사보다 철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시각물_월튼 워커 장군의 군산상륙작전 계획. 이지원 기자
“최종운 동무와 전투원들은 미제침략군 사령관 워커놈을 포함한 80명을 쓰러눕히고 땅크 1대, 자동차 8대를 불살랐다.”
(북한의 날조 기록. 이상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논문에서 인용)
금강(7월)→낙동강(8월)→한강(9월)→대동강(10월)→청천강(11월)을 거쳐 다시 한강(12월)으로 쫓겨온 워커.
상처 입은 불독에게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목숨을 걸겠다던 워커는 정말 목숨을 한국에 바치고 말았다.워커의 사고사 경위는 당시 미8군 보고서 등을 연구한 이상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논문에 잘 설명돼 있다. 워커의 지프는 1950년 12월 23일 오전 10시 30분 경기 양주군 도봉리에서 북쪽으로 향하다가, 6사단 화물차와 충돌했다. 워커는 머리를 크게 다쳤고 근처 24사단 야전치료소로 이송됐으나, 군의관이 10시 50분 워커의 사망을 확인했다. 운전요원(상사), 부관(중령), 호위병(병장)이 같이 타고 있었으나 워커만 숨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분노했다. 사고를 낸 국군 운전요원을 사형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미국 군사고문 제임스 하우스먼 대위의 만류로 사형 명령은 취소됐고, 운전자는 징역 3년형을 받았다.
24사단 중대장인 아들 샘 워커 대위는 아버지 지프를 기다리다가 아버지 부고를 들었다. 샘은 부친을 미국에 모신 다음 한국에 돌아왔다. 베트남전에도 자진 참전해 무공을 세운 다음, 1977년 대장까지 오른다. 부자가 4성 장군(워커는 추서)까지 오른 매우 드문 사례다. 아들(1925~2015)의 수명을 보면, 워커도 장수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낙동강 방어선 형성과 운영에 관한 상세한 정보가 남았을 것이다.
패튼처럼 싸우며, 이순신의 운명을 살았던 명장 워커.
그가 목숨을 건 명량은 낙동강이었고, 목숨을 바친 노량은 서울이었다
. 외아들 훈장을 축하해 주러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텍사스 사나이는 지금 주소로 서울 도봉구 도봉동 596-5번지에서 사망했다. 인근에 도봉구가 지난해 조성한 기념공간과 흉상이 있다.2019년 10월 10일 미8군 캠프 험프리스 부대에 설치된 월튼 워커 장군 동상 앞에서, 휠체어를 탄 백선엽 장군과 워커의 손자 샘 워커 2세(동상 바로 앞 양복 입은 사람)가 함께 워커 장군을 추모하고 있다. 미 8군
연관기사
• 패망 위기 한국에 홀연히 온 귀인… 80일 만에 전세 뒤집은 한국전 최고영웅 [명장](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20315580004683)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일반 전황>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④’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⑤’
-존 톨랜드 ‘6.25 전쟁 1’
-존 톨랜드 ‘6.25 전쟁 2’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워커 관련 주요 일화>
-백선엽 ‘군과 나’
-이상호 ‘주한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 사고사의 진상’
-Charles M. Province ‘General Walton H. Walker: The Man Who Saved Korea’
-Roy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Stephen Taaff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Adam W. Hilburgh ‘General Walton H. Walker: A Talent for Training’
-Max Hastings ‘The Koream War’
<낙동강 방어선 관련>
-나현곤 ‘낙동강선 방어 작전시 맥아더와 워커 장군의 작전지도 고찰’
-송재익 ‘낙동강방어선 방어작전을 통해서 본 워커 장군의 전투지휘 및 리더십 재조명’
-Dean Nowowiejski ‘Comrades in Arms: The Influence of George S. Patton on Walton H. Walker’s Pusan Perimeter Defen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