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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9년 6월28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양자회담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집권 한 달여 만에 전후 국제질서를 다시 쓰고 있다.
첫 재임기부터 표방한 미국 우선주의 기조는 영토 팽창주의, 관세 만능주의와 결합하면서 세계 곳곳을 뒤흔들어놓았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조기 종전을 목표로 한 트럼프식 거래 외교는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러시아에 노골적으로 치우친 행보를 하면서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국제적 리더십을 스스로 내던졌다. 유럽에서는 미국을 더 이상 신뢰할 만한 안보 경제 파트너로 여길 수 없다는 각성이 고개를 들고 있다. 자강론을 넘어서 유럽 국가 간 핵공유 필요성까지 나오고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우크라이나가 빠진 종전협상을 목도한 한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직거래 담판을 벌이는 ‘패싱’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연쇄적인 관세폭탄 위협도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직격탄이 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를 무역적자 해소, 미국 핵심산업 보호, 미국 내 생산·투자 확대 등을 위한 도구이자 미국 이익 관철을 위한 외교적 압박 및 재정 확충 수단으로 여긴다. 경향신문은 트럼프 집권 2기 국제질서의 변화와 영향, 대응 방안을 4회에 걸쳐 진단한다.



(1) ‘세계 경찰’ 미국의 후퇴

지난 2월12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통화 이후 미국의 행보가 세계 질서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전쟁 당사국 우크라이나를 배제하고 러시아와 종전 담판을 개시하면서 러시아의 불법적인 주권·영토 침탈에 맞선 서방의 단일대오는 와해됐다.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공개 설전을 벌이며 ‘노딜’로 끝난 지난달 28일 정상회담은 트럼프식 거래 외교의 민낯을 극적으로 보여줬다.

트럼프 2기 출범 한 달이 조금 지난 지금, 세계는 열강이 약소국의 운명을 결정하며 이권을 나눠 갖는 제국주의 시대를 연상시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그린란드·파나마운하 확보, 캐나다 51번째 주 편입 주장, 가자지구 개발·소유 구상 등 팽창주의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그동안 미국 패권을 지탱해온 중요한 축인 보편 가치나 규범에 대한 존중, 동맹과의 협력, 소프트파워 전략은 모두 저버렸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간 지속된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서 스스로 빠르게 이탈하면서 ‘다극화’ 세계가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와 종전 협상에 합의한 이후부터 줄곧 러시아에 유리한 입장을 취해왔다. 우크라이나의 핵심 요구 사항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2014년 이전 영토 회복 등에는 처음부터 선을 그으면서 대러 협상 카드를 포기했다. 취재진에게 생중계된 정상회담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당신은 카드가 없다”(트럼프), “미국에 고마워한 적 있냐”(J D 밴스 부통령)고 윽박지르는 장면은 결국 우크라이나의 ‘백기투항’을 원하고 있다는 심증을 굳혔다. 벌써부터 러시아와의 “주요 경제 개발 거래”를 언급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이 강대국의 세력권 형성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 대통령이 아닌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독재자” “전쟁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다자무대에서도 러시아에 기울어진 입장을 보였다. 유엔총회의 러시아 침공 규탄 결의안에 미국이 북한, 러시아 등 적성국과 나란히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미국이 러시아와의 거래 성사를 위해 ‘자유 세계의 리더’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등 돌린 젤렌스키·트럼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설전을 벌이다 서로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다. AFP연합뉴스


80년 지속 ‘자유 세계 리더’ 스스로 포기···‘다극화’ 현실로
젤렌스키 몰아붙이면서 러시아 세력권 형성 용인
우방국 상대로 고율관세 위협에 안보불안까지 안겨
패권 지탱해온 규범·가치 대신 오로지 미국 이익에 ‘올인’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역키신저’ 전략을 쓰고 있다고 해석한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외교 책사 헨리 키신저가 중국과의 데탕트(긴장 완화)를 통해 소련 고립을 시도했듯이, 이제는 반대로 러시아를 미국 쪽으로 끌어당겨 중국을 견제하려는 셈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제한 없는(limitless) 협력을 선언한 지금의 중·러관계는 키신저 시기와 판이하다. 미국외교협회(CFR) 조슈아 컬랜지크 선임연구원은 중·러가 미국 패권, 특히 달러 기축통화 체제에 맞서 대체 통화를 만들고 전 세계에서 ‘권위주의 국가연합’을 구축하려 한다고 짚었다. 오히려 나토와 유럽 등 기존 동맹을 소외시킬 뿐 아니라 중국의 세력 확장을 자극할 소지도 있다.

우크라이나의 안전보장 요구를 외면한 트럼프 대통령은 그 대신 우크라이나 광물자원 개발 수익의 상당 부분을 미국과 나눠 갖는 광물협정 수용을 압박했다. 유럽과 인도·태평양 지역 동맹국들로선 미국이 안보 공약 이행은 저버리고 경제적 이권 추구에만 몰두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4일부터 25% 관세 부과를 강행한 캐나다는 물론 유럽연합(EU), 한국, 일본 등 미국의 우방국들은 일제히 무역적자를 빌미로 한 고율 관세 위협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중국의 경제적 강압이나 규범 위반을 비판해온 미국이 자유무역 질서 무시에 앞장서고 있는 셈이다.

미국이 글로벌 안보·경제의 안정과 번영을 책임지는 ‘세계 경찰’ 역할을 내던지면서 세계 질서의 다극화 추세를 앞당기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지난 1월30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다극 체제의 도래를 사실상 선언했다. 그는 세계에 하나의 강대국만 있는 것(단극)은 “정상적이지 않고 예외적”이라며 “현재 중국, 또 일정 부분 러시아로 인한 (다극 세계에) 직면하고 있고, 이란·북한 등 불량국가들도 상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러가 미국 패권에 반기를 드는 의미로 주로 퍼뜨려온 다극 체제 담론을 미국 국무장관이 직접 언급한 것의 함의는 작지 않다. 미국이 더는 규범과 가치에 기반한 기존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미국 이익만을 고려하겠다는 속내가 담긴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루비오 장관은 인준 청문회에서도 전후 세계 질서를 가리켜 “망상” “우리를 겨냥한 무기”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점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첫 대규모 구조조정 대상으로 미 국제개발처(USAID)를 고른 것은 다분히 징후적이다. USAID는 냉전 시기부터 개발도상국 원조를 통해 미국 우호 여론을 확산하고 대외 이미지를 개선해 미국의 소프트파워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했던 기관이다. 군사력·경제력 등 하드파워에 ‘올인’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걸림돌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USAID가 빠져나간 공백을 중·러가 메우면서 다극 질서를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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