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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정신과 의사의 코멘터리]
<1>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백강혁

편집자주

정신건강의학과 김지용, 오동훈, 허규형 전문의가 영화나 드라마 속 캐릭터들의 심리를 분석하며 우리의 마음도 진단합니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의 백강혁. 넷플릭스 제공


올해 들어 가장 화제의 콘텐츠는 단연코 ‘중증외상센터’일 것이다. 드라마는
압도적 카리스마의 주인공 외과 의사 백강혁(주지훈)에 의해 모든 스토리가 전개
된다. 다른 드라마나 영화 역시 주인공의 비중이 큰 것이 당연지사였지만, 이 작품은 무언가 좀 다르다. 마치 영화 '아이언맨'에서의 토니 스타크처럼 시스템을 뛰어넘는 한 개인의 압도적인 천재성으로 난관들을 해결해 나간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절대 이뤄지지 않을, 말 그대로 초인의 영역이다.

'싸가지 없는' 초인이 많은 이유



사실 이런 부분 때문에 이 의학드라마를 편한 마음으로만 즐길 수 없었다. 나뿐 아니라 꽤나 다수의 의사들이 그랬을 것인데, 이는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업데이트되고 모두에게 공개되는 논문들에 의해 현대의학은 상향평준화되어 있으며, 한 개인의 천재성이 드라마틱한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누가 없어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비슷하게 병원 시스템이 돌아갈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실제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이비인후과 전문의 출신의 작가는 왜 이런 초인 같은 천재 의사를 그려냈을까?
왜 비현실적인 의사의 모습에 대중은 열광하는 걸까?
게다가 극 중 표현을 따르자면 '싸가지 없는' 성격의 소유자인데도 말이다.

'중증외상센터' 백강혁. 넷플릭스 제공


단지 이 드라마뿐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웹소설, 웹툰 등 젊은 층이 즐겨 보는 콘텐츠에는 정말 제멋대로인, 그래서 시스템을 무시하는, 그러나 그래도 되는 초인급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주로 등장한다.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노력으로 천천히 극복해 나가는 성장형 주인공들은 대세에서 밀려난 지 오래다. 호적수가 등장하여 조금이라도 전개가 늦어진다 싶으면 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한 진행을 비난하는 댓글들이 이어지며, 심지어 별점 테러로 이어지기도 한다. 반대로 허탈할 정도로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의 모습에는 사이다 같은 시원함을 칭송하는 반응이 따라온다. 그 청량함의 역치가 계속 높아져 이제는 진정 제멋대로인, 그래서 백강혁처럼 '싸가지 없는' 주인공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는 와중에 발생하는 기타 등장인물들의 희생과 착취는 당연시되고, 그저 웃음거리의 소재일 뿐이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 때문일까? 우리 사회의 어떤 집단 무의식이 반영된 것일까? 사이다에 대한 욕구는 고구마에서 비롯된다.
사회 현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간절하게 초인을 바라는 그 마음은 기존 사회가 만들어낸 결핍과 상처에서 비롯된다.
초인적 주인공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감정적으로 무엇을 제공해 주는지를 통해 우리 마음속 결핍을 거꾸로 유추해 볼 수 있다. 나는 그 정체가
우리 안에 있는 '나르시시즘'과 '의존 욕구'
라고 생각한다. 둘 다 기존에 부정적 인식이 많은 용어라 우리 마음속에 이것들이 있다는 말에 반감이 들기도 할 텐데, 지나칠 때 문제가 되는 것이지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씩 필요하다.
쉽게 말하자면 누구나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싶고, 편히 기댈 수 있는 타인도 바란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 뜻대로 살고, 그러면서도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것. 이런 자기애성 욕구는 그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점점 더 풍요로워지는 현대 사회 속에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점점 더 제 뜻대로 살지 못한다.
어릴 때부터 세상이 요구하는 획일적 틀에 맞추기를 강요받는다. 그 틀에 열심히 맞춰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하면 그때부터는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될까? 진료실에서 정말 자주 듣는 말이 '종일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대체 모르겠다'는 직장인들과 공무원들의 한탄이다. 분명 세상이 부럽다 말하는 직장에 다니면서도 공허함에 괴로워한다. '가짜 노동'의 저자 데니스 뇌르마르크에 따르면, 이는 현대인 대다수가 큰 시스템의 작은 부품으로 '무대 뒤 노동'을 하기에 근무 시간이 길어도 성취감을 느낄 수 없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게
일평생을 남들이 짜준 대로만 살면서 손상받은 나르시시즘이 우리 안에 있기에, 자기 잘난 맛에 시스템을 무시하며 멋대로 사는 주인공의 모습에 통쾌한 대리 만족을 느낄 수 있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백강혁. 넷플릭스 제공


나르시시스트 가면 쓰고 트라우마 맞선 백강혁



앞서 말했듯 일평생 짜인 길을 걸어가길 어릴 때부터 획일적으로 요구받지만, 그 길의 끝에선 안정된 삶이 보장되는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어느덧 저성장 시대에 접어든 지 10년이 넘어가며 사회는 활력을 잃었다. 불확실성이 만들어내는 불안에 대처하는 흔한 심리가 회피와 강박, 그리고 의존이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은 이제 더 이상 특별한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고, 고립 청년들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지만 사회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회피한다. 강박적으로 가장 안전한 길만 밟게 하려는 마음이 7세 고시 유행으로 이어졌다. 누군가에게 의존해 버림으로써 불안을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 수 있는데, 그럴 때 강한 확신에 찬 나르시시스트들의 목소리는 너무도 매력적이다. 그래서
의존 욕구가 높은 사람들이 나르시시스트에게 끌리기 쉽다.


여기서 조심해야 하는 구분 지점이 있다. 일단 '중증외상센터'에서 보이는 백강혁의 모습은 분명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을 띠고 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은 당연, 다른 동료 의사들을 단번에 무시한다. 아직 능력이 부족해도 존중받아야 할 전문의 후배를 이름이 아닌 '노예 1호'라고 부른다. 상황이 자신의 뜻대로 통제되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낸다. 엄청난 천재에게는 당연한 모습들이지 않냐는 의견도 있지만, 다들 알다시피 천재라고 해서 꼭 이런 '싸가지 없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극 중에서 순간순간 보이는 모습들을 종합하면 백강혁은 공감 능력 없기로 타고난 나르시시스트라기보다는, 필요에 의해 그 가면을 쓴 사람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 소중한 사람을 눈앞에서 무력하게 떠나보낸 트라우마가 있으며, 그를 극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과정에 일어난 무의식적 선택일 것이다.

트라우마에 동반되는 대표적 증상들은 재경험과 회피 행동이다.
사고 당시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고, 심지어 자는 중에도 악몽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최대한 비슷한 환경과 상황을 피한다.
그런데 백강혁은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이 죽어가는 현장을 선택해서 투신
했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반복되는 중증외상센터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매우 강한 자아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일반적인 경우를 넘어선, 엄청난 자신감에 넘치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반복적으로 자기 암시하듯 강인한 모습을 일부러 과시한다. 그래도 강력한 죽음 앞에서 혼자서 승리할 수 없기에 팀을 꾸리고, 최선의 결과를 위해 강한 카리스마로 모두를 휘어잡는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의 숨겨진 본질은 본인의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무의식적 시도지만, 그 결과물은 수많은 타인들을 살리는 방향으로의 건강한 승화
다. 자신만의 고집이 너무 세 남들과 부딪히는 일이 잦지만, 결국엔 더 성숙해지는 점까지도 앞서 짧게 언급한 아이언맨의 서사와 매우 비슷하다.
결정적으로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은 타인을 지키기 위한 따뜻한 속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백강혁과 아이언맨에게 끌린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백강혁. 넷플릭스 제공


빛나는 백강혁 뒤의 어려움도 돌아봐야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백강혁. 넷플릭스 제공


그런데
우리가 현실에서 보게 되는 나르시시스트들 중에 이런 초인과 영웅이 얼마나 있을까.
대다수는 초인을 꿈꾸고 바라는 우리의 마음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공감 능력이 부재하는 악성 나르시시스트들
이다. 그들은 불안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기가 막히게 알아보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접근한 뒤 결국 먹잇감으로 삼는다. 이에 고통받은 피해자들을 진료실에서 자주 만나기에, 나는 이 드라마가 편할 수만은 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백강혁의 본질은 나르시시스트가 아니지만, 그 가면을 매력적으로 보게 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까 걱정되는 마음이 내심 있었나 보다.

다시 처음 자문한 것으로 돌려, 왜 작가는 하필 중증외상센터를 배경으로 한 비현실적 초인 캐릭터를 만들어 냈을까? 이는 병원에서 가장 어려운 현실이 펼쳐지는 곳이 바로 중증외상센터이기 때문이다. 누가 없어도 다른 누군가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현대 의학이고 종합병원이라 적었지만, 중증외상센터에는 애초에 그 누군가가 없다. 예전에 초인과 비슷한 사람이 있었다. 백강혁 캐릭터를 보면서 다수가 떠올렸을, 그 이국종 교수님이 시스템 개선과 지원을 목 놓아 외쳤건만 이뤄지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그곳을 떠났다.

백강혁이 그만큼 빛나야만 하는 것은, 그만큼 그곳이 어둡기 때문이다.
초인 같은 사람으로도 역부족인, 그래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초인까지 불러와야 간신히 메꿔질 정도의 큰 구멍이 우리 의료 체계에 있음을 색다른 방식으로 고발한다.
단순히 백강혁 캐릭터에 이끌리는 마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 이면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우리 사회가 되었으면, 그래서 진정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변화로 이어지길 바란다.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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