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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법원 판결문에 등장한 '투명인간'


'투명인간'의 도시에서는 투과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장애인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투명인간'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제도와 시스템하에서는 투과 능력의 유무가 장애와 비장애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턱이나 계단이 곳곳에 설치된 건물로 가득 찬 이 사회에서 장애인이 살아가는 일은, 비장애인이 투과 능력이 있는 '투명인간'의 도시를 방문해 건물 1층 출입문이 모두 잠긴 상황에 처한 것과 비슷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19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장애인 접근권 침해 차별구제 소송 사건' 판결문 일부입니다.

대법원은
국가가 원고들에게 각 1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
고 결정했습니다. 하급 법원으로 다시 돌려보내 판단하게끔 하는 '파기·환송'과 달리, 자체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파기·자판’입니다.



■ 현실 반영하지 못한 법‥ '턱'에 막힌 일상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장애인차별금지법'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도 공중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조치해 둘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장애인 등 편의법 시행령'은 300㎡ 이상의 대규모 시설 외에는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면제해 왔습니다. 장애인권 단체들을 중심으로 문제 제기가 계속되자, 기준은 50㎡ 이상으로 강화됐습니다.
하지만 건물을 신·증축 할 때만 적용돼 변화는 미미했습니다.


대법원 근처를 돌아보니, 1층에 위치한 식당과 카페, 편의점 가운데 경사로가 설치되거나 턱이 없어 휠체어로 출입이 가능했던 곳은 50곳 중 5곳에 불과했습니다.

누군가는 '입구에 설치된 얕은 턱 하나'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휠체어를 타는 이들의 생활권은 그 하나 때문에 쪼그라듭니다.

"비장애인은 점심시간에 친구를 만나 식당이나 커피숍을 가거나, 귀가하다 문득 생각이 나서 서점과 꽃집에 들르고, 갑자기 배가 아파 약국을 이용하거나 동네 의원에 가면서, 내가 그곳에 접근할 수 있는지 없는지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장애인의 일상생활 또한 그래야 한다. 계획된 '쇼핑'은 대형 할인점과 온라인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우연과 즉자성으로 이루어진 나날의 '삶'은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경미·신숙희 대법관의 보충의견)



■ '불통' 정부에 소송



장애인들이 바로 법정으로 향했던 건 아닙니다.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가 두 차례 개선을 권고하고, 국가인권위원회도 법 개정을 제안했지만 바뀌는 건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명학 씨 등은 2018년, 소송을 내고 거듭 상소했습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국가배상을 기각했습니다. 위법한 시행령 제정과 방치에 대한
정부의 고의와 과실을 인정할 수 없다
는 이유였습니다.

다만 변화의 단초는 남겨뒀습니다.

1심 재판부는 "시행령 조항이 모법의 위임범위를 일탈한 행정입법권의 일탈·남용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장애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위헌·위법한 시행령으로서 무효"라고 판단했습니다.

최종 판결은 소송을 제기한 지 꼬박 6년이 지나서야 나왔습니다.



■ '10만 원'의 의미‥'평범한 무관심'에 대한 속죄



손해배상액 10만 원,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무겁습니다.

장애인의 접근권이 헌법상 권리라는 걸 처음으로 인정했습니다. 국가가 입법을 넘어 이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해주지 못했다면 위법하다고 본 겁니다.
배상 책임까지 가진다고 판단했습니다. 단순 제언을 벗어나 구체적으로 실현돼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한 것입니다.

판결문 보충의견에서는 구체적인 방향도 제시됐습니다. 우선 "가장 최근 개정된 시행령도 접근권 보장을 위해선 충분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소규모 소매점도 단계적으로 편의시설 설치의무를 부과하고, 그동안 설치 기준이었던 '점포의 바닥면적' 자체를 재검토하라"고 했습니다.

공개변론 당시 정부 측은 '온라인 쇼핑이나 마트를 가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무관심을 넘어 무지에 가까운 주장이었는데, 재판부는 이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습니다.

오경미·신숙희 대법관은 보충의견에서 "비장애인으로서는 턱이나 계단을 제거하기 위해 사회적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는 당위를 이해하기 어렵다.
법이 시행된 뒤 24년이 넘도록 이 사건 쟁점규정이 개정되지 않은 채 방치된 데에는 이와 같은 평범한 무관심이 기여
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 문 앞의 턱은 없어졌을까?


1984년 9월 19일, 장애인 김순석 씨는 "우리는 왜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하나, 왜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하나"라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그가 죽고, 40년이 흐르고 나서야 접근권은 헌법상 기본권으로서 인정받게 됐습니다.

판결 두 달 반이 지났습니다. 현실의 변화는 여전히 더딥니다. 장애인등편의법 등 시행령은 아직 개정되지 않았습니다.

경사로 등이 없는 채로 지어진 기존 건물에도 기준은 적용되어야 하지만 소상공인들은 부담이라고 호소합니다. 서초동의 한 1층 분식집 점주는 "경사로를 만드는 비용도 문제지만, 건물주가 허락을 안 해 준다"고 답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자체적으로 조례를 통해 설치 비용을 지원하고 있지만, 자칫 도로에 만든 무허가 설비로 철거당할 가능성도 여전합니다.

공익법단체 '두루'의 한상원 변호사는 "구축 건물 경사로 설치를 위해서는 도로점용허가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행정청의 적극적인 의지와 지원이 없다면 개인이 홀로 점용허가를 받기에 어려움이 많다"고 했습니다. 중앙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대법원의 판결문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장애인의 이동권, 접근권이 제대로 보장된 사회에서라면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은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닐 수도 있다.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을 배제한 채 비장애인이 그들 위주로 만든 세상인지도 모른다.
"

** 관련기사

문턱에 막힌 휠체어‥국가배상 책임 인정될까
https://imnews.imbc.com/replay/2024/nwdesk/article/6649236_36515.html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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