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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등록 이주아동의 현실

‘미등록’ 이유로 아파도 병원 못가
귀화 신청까지 최소 14년 더 걸려
게티이미지뱅크

취업준비생 A씨(23)와 여동생 2명은 두 가지 이름이 있다. 태어났을 때 베트남 국적의 부모가 지어준 한국 이름, 성인 이후 한국에 합법적으로 체류하기 위해 만든 베트남식 이름이다. 두 가지 이름은 한국 국적 없이 한국에서 살아가는 미등록 이주아동들의 불안한 지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 자매는 모두 한국에서 태어나 공교육을 받고 자라 모국어가 한국어다. 하지만 법적으로 완전한 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A씨는 지난 25일 경기도 안산의 한 카페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나를 외국인으로 대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누구지?’라며 소외감을 느꼈지만, 곁에서 나를 응원해 준 사람도 정말 많았다”며 미등록 이주아동으로서 겪었던 ‘정체성 혼란’ 문제를 털어놨다. 그러면서 “누가 뭐래도 저희는 한국인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베트남으로 가는 건 괴로운 일”이라며 “한국 국적을 얻을 때까지 앞으로 최소 10여년 걸리지만 포기하지 않겠다. 저희를 지켜봐 달라”며 환하게 웃었다.

“한국인 되는 길 열려야”

A씨는 2002년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왔다가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사업장을 이탈한 베트남 국적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미등록’ 상태로 살았다. 경찰은 그의 삶을 뿌리째 흔들 수 있는 두려운 존재였고, 병원은 아파도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가까운 지인들은 한국 이름을 부르며 A씨를 한국인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특히 그가 ‘당연히 한국인’이라며 응원해 줬던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큰 힘을 얻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할 때만 외국인등록증에 적힌 어색한 이름을 꺼내 들어야 한다고 했다. 대학 때 A씨를 베트남인으로 여긴 한 동기가 면전에서 그를 한국말로 놀리는 일은 아직도 A씨에게 상처로 남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20년 3월 이주아동 네트워크가 제기한 A씨의 피해 진정 사례를 바탕으로 법무부에 미등록 이주아동 체류 제도 마련을 권고했다. 이를 계기로 만들어진 미등록 이주아동 임시 체류 등록 제도는 오는 31일 종료 예정이었지만 법무부는 조만간 연장하는 방안을 내놓기로 했다. 이 제도를 통해 한국에 합법적으로 정착할 계기를 마련한 A씨는 “저희는 단순히 한국에서 살고 싶은 게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법적으로도 한국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꺾이는 미등록 이주아동의 꿈

한국에서 자라온 A씨의 평온한 삶이 무너진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는 “소문이 났는지 당시 학교 친구들이 저에게 ‘너 불법체류자라며?’ ‘베트콩이라며?’라고 놀리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당시 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며 “부모님에게 물었는데 ‘눈에 띄지 말라’고 했다. 괜히 문제를 만들면 한국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고 말했다. 활달하고 사교적이었던 A씨는 그때 이후 소극적으로 변했다.

A씨는 어린 시절 미등록 이주아동이라는 이유로 많은 걸 포기해야 했다. 초등학교 때 지역 합창단 대회에서 대상을 받으며 해외로 연수 갈 기회를 얻었지만 여권이 없어 갈 수 없었다. 특성화고에 진학해 무대음향 전문가를 꿈꿨던 A씨는 한 연극 대회에서 서울 소재 대학의 교수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재능도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학생 비자를 제때 받지 못하면서 대학 진학부터 좌절됐다.

결국 어렵게 영상미디어 전공으로 진로를 바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지금은 취업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외국인은 반드시 학과에 맞춰 취업해야 했는데, 지원서를 넣은 50여개 회사 중 연락이 온 곳은 없었다. 자신보다 성적이 낮은 동기들의 취업 소식을 들으면 괜히 억울한 마음이 커지기도 했다고 한다. A씨는 3년 안에 취업하지 못하면 한국에서 추방될 가능성이 크다.

체류 자격이 없었던 시절엔 학생비자 등의 체류 자격을 얻기 위해 통장 잔고를 증명해야 했다. 가족들에겐 돈이 없었고, 합법적으로 돈을 벌 자격도 없었다. 결국 법무부를 상대로 잔고증명 계좌 금액을 깎아 달라고 호소해야 했고, 다른 이들에게 돈을 빌려 잔고를 채워야 했다. 불법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체류 자격 확보를 위해 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국은 나의 모국

A씨에게 한국은 살고 싶은 소중한 모국이다. 세 자매의 안타까운 삶에 먼저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정말 많았다고 한다. A씨는 “부모님이 다니던 성당의 신부님과 신자분들이 매달 생활비를 조금씩 보태주셨다. 덕분에 동생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염에 걸려 힘들 때 치료비를 받지 않고 도와준 의사, 중·고등학교 진학 때마다 입학 등록을 신경 써준 담임교사들을 떠올렸다.

그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일은 ‘생존’에 가깝다. 하지만 A씨는 여전히 한국인으로 인정받을 길을 찾고 있었다. 그는 “취업 비자로 4년을 살아야 거주 비자를 받을 수 있다”며 “그다음에 거주 비자로 5년을 더 살아야 영주권을 받을 수 있고, 영주권을 받은 후에도 5년이 지나야 귀화 신청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소 14년의 시간이 더 필요한 셈이다. A씨는 그러면서 “포기할까 고민해본 적도 있지만, 지금까지 한국에서 살아온 20여년의 시간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게 싫었다. 끝까지 살아 한국인으로 인정받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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