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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미국의 대외 원조 중단 여파

편집자주

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금요일마다 함께하세요!
2세 아이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간 불발탄 폭발 사고가 발생한 지난 22일 캄보디아 시엠레아프주 북서부 외곽에 위치한 크란홍 마을에서 캄보디아 지뢰대응센터(CMAC) 관계자가 문제의 포탄 잔해를 살펴보고 있다. CMAC 제공


#. 지난 22일 오후 캄보디아 시엠레아프주(州) 북서부 외곽에 위치한 크란홍 마을. 사촌 남매인 모 리사(2)와 톰 옌(2)은 여느 때처럼 동네 언저리 공터에서 흙 놀이를 하고 있었다. 시골 마을의 평온한 오후는 아이들이 흙 속에 파묻혀 있던 쇠붙이를 건드린 순간, 끔찍한 악몽으로 변했다. 폭음과 함께 모래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한 아이는 손쓸 새도 없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또 다른 아이는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결국 사망했다.

문제의 폭발물은 66㎜ 포탄이었다는 게 캄보디아 지뢰대응센터(CMAC)의 설명이다. 크란홍 마을은 1980~1990년대 캄보디아 정부군과 크메르루주 반군 간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내전의 잔재가 40년 가까이 간 땅속에 묻혀 있다가 무고한 어린 생명들을 앗아간 것
이다.
공교롭게도 이 사고는 지난달 24일 미국이 해외 원조 대부분을 일시 중단한 지 한 달 만에 발생
했다.

22일 캄보디아 시엠레아프주 북서부 외곽에 위치한 크란홍 마을에서 발견된 포탄 잔해. 땅속에 묻혀 있던 이 포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2세 어린이 두 명이 숨졌다. 캄보디아 지뢰대응센터(CMAC) 제공


미국은 1993년 이후 125개국의 재래식 무기 파괴 사업에 50억9,000만 달러(약 7조5,000억 원)를 지원해 왔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선 오랜 전쟁과 내전을 겪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가 대상이었다.

이후 캄보디아 정부는 미국 도움으로 지뢰·불발탄 제거 작업을 벌여 왔다. 그러나 지난달 다시 출범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해외 원조 중단을 선언하면서 상당수 작업이 멈춰 섰다. 크란홍 마을도 이 중 하나다.
캄보디아 두 살배기 아이들의 죽음은 미국 정부의 ‘대외 원조 중단’ 조치와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
다.

지난 19일 캄보디아 동부 트봉크뭄의 한 병원에서 11세 소녀 예이트 샐리가 치료를 받고 있다. 샐리는 같은 달 5일 소를 몰고 가던 중 작은 금속 조각(불발탄)을 주운 뒤 던졌고, 이것이 폭발한 탓에 부상을 입었다. 트봉크뭄=AFP 연합뉴스


"미국이 간접적으로 사람 죽여"



비극은 보건·의료 구호 현장에서도 발생했다. 이달 2일 태국·미얀마 국경 지대 난민 캠프에 머무르던 여성 난민 페 카 라우(71)가 난민촌 병원에서 강제 퇴원한 지 나흘 만에 호흡곤란으로 숨졌다.

그는 국제인도주의 구호단체 국제구조위원회(IRC)가 미국 지원으로 운영하던 난민 병원에 입원해 3년 동안 산소공급을 받았다. IRC는 미얀마 난민 10만여 명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 왔으나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따라 자금줄이 끊기면서 병원 문을 닫았고 의료진도 모두 철수
했다. 라우를 포함한 모든 환자들은 원치 않게 병상을 떠나야 했다.

지난 7일 미얀마와 태국 국경 인근 난민촌에 위치한 난민 페 카 라우의 주거지에 그의 사진과 부고장이 붙어 있다. 라우는 미국의 해외 원조 중단으로 난민촌 병원이 폐쇄된 뒤 집으로 돌아왔고 나흘 만에 사망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고인의 딸은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병원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지만 갈 수 있는 병원이 없었다”고 말했다. 로이터통신은 “라우의 가족은 빈곤 탓에 산소통을 살 여력도 없었다”며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병원 폐쇄 후 난민 환자 여럿이 추가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전했다.

‘인도주의’가 아니라 ‘극한의 효율’만을 추구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 여파가 별다른 선택권 없는 개발도상국 취약계층에게 불어닥치며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셈이다. 캄보디아 여성·아동 지원기구 ‘라크나 사트레이’를 운영하는 니안 풍 말리 이사는
“미국의 대외 원조 자금 지원 중단은 간접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
라고 일갈했다.

3일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미국 국제개발처(USAID) 본부 앞에서 시민들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USAID 폐쇄 방침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미국, 자신들의 과거 잘못 외면해"



과거 자신들이 남긴 불행한 유산에 미국이 눈감으려 한다는 비판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캄보디아 인권단체 관계자는 지난 19일 한국일보에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은 공산군 기지 공격을 위해 캄보디아와 라오스에도 폭탄을 집중 투하했다. 캄보디아 내전 때 (미국이) 크메르루주를 지원했다는 의혹도 있다.
국토 오염의 책임에선 미국도 자유롭지 않은데, 이제 와서 과거의 잘못을 외면하려 한다. 무책임하고 역겨운 행태
다.”


2023년 11월 라오스 비엔티안의 대표 관광지 빠뚜싸이(개선문) 앞에 중국의 자금 원조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비엔티안=허경주 특파원


미국이 비운 자리는 중국이 빠르게 메우고 있다. 미국의 대외 원조 일시 중단 선언 2주 뒤인 이달 10일, 중국은 캄보디아 지뢰 제거 사업에 440만 달러(약 64억 원)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미국 지원금(200만 달러)의 두 배가 넘는 금액이다.

아랍권 매체 알자지라는
“워싱턴(미국 정부)이 미국 소프트파워의 핵심인 인도주의 프로그램을 스스로 중단하면서 그 자리를 중국이 채우고 있다"며 "미국의 후퇴로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등 동남아 지역에서 베이징(중국 정부)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것”
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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