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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과학계 박사 일자리 사라져
중국은 글로벌 인재 유치 나서
“인재 영입 기회, 국내 연구 환경 바꿔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기 행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 만에 미국 과학계가 전례 없는 혼란에 빠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20일 취임 직후 수천억달러 규모의 연구와 국제 지원 기금을 취소하거나 동결하고, 연구 인력 수천 명을 해고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다. 정부 지출을 급격히 줄이고 인력을 감축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과학계를 뒤흔들고 국제 과학계의 지각 변동까지 예고하고 있다.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의 홀든 소프 편집장은 지난 16일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연례회의에서 “미국이 세계 과학을 선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초 연구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라며 “이번 조치로 대학과 연구소의 연구 활동이 대폭 축소되고, 미국 과학의 국제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약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연구비 삭감은 주요 연구 기관의 연구 프로젝트를 중단시키고, 미국에 머물던 외국인 연구자들이 비자 문제와 연구비 부족으로 미국을 떠날 가능성을 높였다. 국내 과학계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이 역설적으로 과학 인재를 유치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미 중국은 해외 과학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입시 정책까지 바꾸고 있다.

과학 발전 제동 거는 美 예산 삭감
트럼프 행정부가 2조 달러(약 2800조원) 규모의 연방 예산 감축을 추진하면서 국립과학재단(NSF), 국립해양대기청(NOAA), 국립보건원(NIH) 등 주요 연구 기관들이 대대적인 예산 삭감과 인원 감축 위기에 놓였다. NSF와 NIH는 암과 양자 컴퓨터 개발, 해수면 상승 대응 등 핵심 연구를 맡아 미국 과학의 핵심 동력으로 꼽힌다. 매년 수천 개의 연구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며 수십만 명의 연구자와 대학 연구원의 생계를 책임졌지만, 이번 예산 삭감 사태를 피할 수 없었다.

대학과 정부 연구소 운영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NIH는 연구 보조금에 대한 간접비 비율을 기존 평균 40%에서 15%로 제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간접비는 행정 인력 고용이나 연구실 유지관리 등을 위한 비용이다. 연간 약 40억달러(약 5조7600억원)의 연구비가 삭감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간접비 삭감안은 연방 판결로 일시 중단된 상태다.

그래픽=정서희

일부 대학과 의학연구소는 트럼프 행정부의 NIH 연구비 삭감 계획에 대비해 생물의학 분야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의 입학 규모를 줄이고 있다. 최대 60%까지 축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사 학위 이상의 전문 인력 절반 이상이 미국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없다는 의미다. 지원 학생들에게 이미 비공식 합격을 통보했던 대학들은 합격 취소를 뒤늦게 알리며 혼란을 주고 있다.

컬럼비아대와 보스턴대, 매사추세츠공과대(MIT),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등 미국 최상위 대학들은 교수와 직원 채용을 멈췄다. NIH 예산 삭감이 확정될 경우, 모집이나 채용 축소가 장기화하면서 연쇄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대학 관계자들은 유사한 예산 삭감이 다른 연구 기관에서도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하고 있다.

미국 위기 틈타 中은 과학굴기
중국은 미국 과학계의 위기를 틈타 해외 중국인 인재의 유치에 나섰다. 중국 상하이한 푸단대는 2025학년 박사과정 신입생 모집 계획에서 박사과정 입학 요건을 완화했다. 이전까지는 중국에서 박사과정에 입학하려면 중국 대학 학위가 필수 요건이었지만, 글로벌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세계 100대 대학 출신을 대상으로 문호를 넓혔다.

중국 최고 명문대로 꼽히는 칭화대는 지난해 8월 해외 명문대 출신의 중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박사과정 입학 제도를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시후대는 지난해 10월 수학과 재료과학·공학, 컴퓨터 과학, 환경 과학의 4개 분야에서 해외 대학 출신의 중국인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박사과정 공동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이에 대해 “미국 대학들이 최근 대학원 모집을 중단하거나 축소하고, 지원금을 대대적으로 삭감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가 번지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있다”며 “미국으로 떠났던 젊은 인재들은 다시 중국으로 데려오려는 기조가 반영된 것”이라고 봤다.

해외 유학 인재의 귀국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은 실제 효과로도 이어지고 있다. 구인·구직 플랫폼 즈롄자오핀이 지난 20일 발표한 2024 중국 귀국 유학생 취업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에 돌아와 구직 활동에 나선 해외 유학생은 2018년 대비 1.44배로 늘어났고, 전년 대비 7%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뒤늦게 의견 수집…대책 빨라야 5월
한국 정부는 이제야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18일 한국연구재단에서 해외 인재 유치 전략 간담회를 개최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비롯한 5대 과학기술특성화대학과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를 포함한 11개 기관이 참석했다.

과기정통부는 이날 나온 의견을 모아 5월에 해외 인재 영입 대책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이창윤 과기정통부 차관은 “국내에서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해외에서 인재를 더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며 “지금까지는 고만고만한 수준에서 지원을 해왔는데, 문제 의식을 갖고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연구비 지원 체계부터 외국인 연구자의 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 등 다양한 제도 개선 방안이 제시됐다. 정규열 포스텍 교학부총장은 해외 석학이나 우수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연구비 지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외국인 석학을 위한 별도 프로그램을 만들어 장기적으로 한국에 정착하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며 “해외 석학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우수한 젊은 인재들을 함께 유치할 수 있다”고 했다.

이치호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연구위원은 “외국인 연구자들이 언어 장벽과 복잡한 행정 시스템 때문에 한국에서 연구하기 어렵다”며 “한국어 없이도 연구할 수 있는 개방적인 연구 환경과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4대 과기원을 포함한 주요 연구 기관들은 국제화된 조직 체계를 갖추고 외국인 비율을 높여야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연구실 밖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간담회에 참석한 KAIST 한 교수는 “해외 우수 과학자는 이미 신용이 보장된 사람인데, 한국에 오면 금융기관 대출 받는 것도 어렵다”며 “미국에서 1등급 신용 점수를 받은 외국인 석학이라도 한국에서는 그 신용 점수를 인정받지 못해 중도금 대출조차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행정 처리 과정에서 복잡한 제도를 간소화하고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ERC 시너지 그랜트 심사 인터뷰를 마치고 나온 뒤 찍은 사진. 왼쪽부터 구본경 단장, 벤자민 시먼스 교수, 마리아 알콜레아 연구원, 다니엘 교수./구본경 단장

석학들 “인재 유치 위한 연구 환경 혁신 필요”
국내 과학 석학들은 해외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연구 거점으로 만들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내 연구기관 소속 연구자 최초로 유럽연구위원회(ERC) 시너지 그랜트(연구비)를 받는 구본경 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은 “현재 한국의 연구비 지원 체계는 분배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국가대표급 과학자를 육성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해외 연구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는 플래그십(주력 또는 대표 과제) 연구비 체제를 구축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천인계획에서 만인계획으로 전환하며 대규모 인재 양성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고급 인재 1000명에게 연구비와 연구인프라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세계 과학계를 선도하는 1만명의 후속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다.

유럽도 ERC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주니어, 미드클래스, 시니어 연구자를 위한 전주기적 지원 체계를 갖춰 해외 인재들을 유입시키고 있다. 구 단장은 “유럽의 연구 지원 체계는 미국에서 인재를 유치하고 글로벌 과학 허브로 자리매김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고 했다.

그는 한국도 대학원생부터 리더급 연구자까지 단계별로 5~10년씩 정주가 가능한 최우수 과학 인재 펠로십형 프로그램과 같은 인재 유치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들을 위한 주거와 교육 시설의 확충, 영어 상용이 가능한 업무 환경도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리보핵산(RNA)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인 김빛내리 서울대 생명과학부 석좌교수는 “외국인 교수들은 연구비 신청 과정과 같은 행정 업무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며 “대학 차원에서 외국인 교수들의 초기 정착을 지원할 수 있도록 행정 지원 인력을 확보하고, 교수들이 정착하는 3년 정도의 기간 동안 지원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외국인 학생들의 유입을 돕기 위해 비자 제도가 개선되고 있는데, 대학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며 “포스텍에서 지원하는 것처럼 외국인 학생들을 지원하는 민간 장학 프로그램도 확대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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