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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같은 고질병, 불안-최지은 메타 전무 인터뷰
설 연휴 때인 지난달 27일 부모님 만나러 잠시 한국에 온 최지은 메타 아태본부 전무를 서울 부영빌딩에서 만났다.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가보니 세상이 달리 보인다고 했다. 김현동 기자
삶이 궤도에서 이탈했다. 암이 예고 없이 찾아오면서부터다. 얼마나 빛나는 젊음을 누렸든, 얼마나 좋은 학벌을 지녔든, 얼마나 놀라운 사회적 성공을 거뒀든, 아니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든 아무 상관 없었다. 월가 투자은행 JP모건 출신으로 메타(페이스북) 싱가포르 아태 본사의 잘 나가는 최지은(41) 전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2022년 2월 "살 확률 반반"이라는 자궁암 3기 진단을 받은 순간, '불쌍한 암 환자'가 그의 정체성이 됐다.

가족력은 없었다. 오히려 건강엔 자신 있었다. 그런데 암이라니. 무방비로 삶에 배신당한 후 삶의 모든 가치가 무너져 내렸다. 세상이 시속 100㎞라면 늘 120㎞로 숨 가쁘게 달리며 세상을 앞질러왔는데, 세상 속도에 뒤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궤도 이탈로 정차했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항암 치료받으며 경제지를 더 많이 구독하고, 커리어 플랫폼 '링크드인' 이력서를 계속 업데이트했다.

120km로 과속하다 궤도 이탈
주위의 응원·감사가 때론 폭력
날 일으킨 건 피자 한 판의 위로
이후 이력서 아닌 부고에 집중
삶이 배신할수록 현재를 살아라
그런데 5개월에 걸친 힘겨운 항암 치료 결과가 양쪽 폐로 전이된 4기 판정과 9개월 시한부 선고로 돌아왔을 때, 삶을 통째로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궁극의 배신 앞에서 형언할 수 없는 절망이 몰려왔다. 포기를 모르는 엄마, 10년 연애 끝에 결혼한 인도 출신 남편의 불타는 집념, 주위의 따뜻한 위로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삶의 끈을 놓아버렸을지도 모른다.
10년 연애 끝에 지난 2019년 인도에서 올린 결혼식. [사진 최지은]
다행히, 시한부 선고 후 2년 반이 더 지난 지금 암이 사라져 3주마다 면역항암제 맞는 걸 제외하고는 싱가포르 메타 사무실에 출근하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최 전무는 "겪어보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더라"고 했다. 그런 깨달음을 담은 성장기『그렇게 나는 다시 삶을 선택했다』에서 그는 비단 암 환자뿐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 앞에 불안이라는 고질병을 안고 사는 모든 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했다. 폭설이 내리던 지난 설 연휴 때 가족 방문차 들른 최 전무를 서울에서 만나 암이 그를 어떻게 성장시켰는지 듣고, 그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진짜 죽음 압도적인 분노. 암 선고 후 첫 반응이었다. 운동을 덜 했나, 음식을 잘못 먹었나, 아니면 사회생활하며 날 괴롭힌 사람들 탓에 스트레스받았나. 이유를 알아야 했다. 내 탓이 하나라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의사들은 하나같이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고 했다. 더 화가 났다. 원인도 없고 결과도 장담할 수 없다니. 권선징악, 이런 삶을 지탱하던 믿음이 완전히 무너졌다.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보스에 배신당한 선우(이병헌 분)가 “저한테 왜 그랬어요”라던 대사가 자꾸 떠올랐다.

분노와 함께 한동안 현실부정이 이어졌다. 내려놓지 못하고 거꾸로 집착이 더 심해졌다. 전처럼 회사에서 인정받고 승진하고 싶었다. 방사선 45 일만 하면, 항암 8주만 더하면, 이런 식으로 치료 끝나는 날짜만 세면서 삶을 사는 대신 계속 삶을 유예했다.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내 세계로 돌아갈 거라 기대했는데, 항암과 방사선을 섞은 표준치료 후 암이 오히려 양쪽 폐로 전이됐다. 4기. 의사는 9개월을 얘기했다.

집에 돌아와 선물 받은 10여 권의 투병기를 전부 꺼냈다. 저자 중에 살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 화가 나 당장 내다 버렸다. 그렇게 절망 속에 일상이 무너졌다. 죽을 거라 생각하니 밥 먹고 이 닦고, 화장실 가고, 이 모든 게 무의미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싫었다. 죽음이 싫고 두렵다는 이유로 결국 죽음밖에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이 돼가고 있었다. 죽음은 나를 한 번만 죽일 수 있는데, 두려움은 나를 수천수만 번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4기 진단 후 새로운 항암치료로 머리가 우수수 빠지자 최지은 전무 남편(왼쪽)은 같이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밀었다. [사진 최지은]
그즈음 미국 사는 여동생이 출산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카 얼굴 봐야겠다는 생각에 3주 만에 침대에서 나와 캘리포니아에 갔다. 해안가 호텔이었는데, 근처 절벽에 혼자 올라 문득 "여기서 뛰어내리면 다 끝날까"라는 생각을 하는 나 스스로를 발견하곤, 너무 실망했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어쩌다 죽음밖에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이 돼버렸을까.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암이 왜 생겼는지 몰라도 어떻게 반응할지는 내 선택이었다. 삶을 유예만 해온 지난 5~6개월이 아까웠다. 오랜만에 친구들한테 연락했다. "나 9개월밖에 못 산대. 너 언제 시간 돼?" 스테로이드 탓에 얼굴은 여드름투성이고 체중은 10㎏ 불었는데, 여드름 없어지고 살 빠질 때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거울 앞에 서서 큰 사이즈 옷을 샀다. 현재를 살자, 오직 이 마음이었다.

진짜 위로 삶의 의지는 나 혼자 되살린 게 아니다. 한국에서 온 부모님과 남편이 다 함께 모여 저녁 식사를 하다 "내가 집착할 세계는 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이 밥상에 계속 있었구나" 싶었다. 비로소 헛된 집착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

엄마는 원래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은행 다니던 아빠 따라간 룩셈부르크 국제학교 시절 엄마가 싸주는 참기름 냄새나는 김밥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좋든 싫든 연구하고 연습하며 외국 친구도 좋아할 김밥을 기어이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가 암 소식을 듣자마자 퉁퉁 부은 눈으로 싱가포르로 날아왔고, 우린 계속 부딪혔다. 엄마는 이 안 닦고 샤워 안 하는 내게 화를 냈다. 나 역시 헛된 희망을 품는 엄마 보기가 가슴 아파 괜히 역정을 냈다.
지난 2022년 암 발병 소식을 듣고 싱가포르로 날아온 부모님과 함께. [사진 최지은]
어느 날 항암 차 간 병원에서 머리에 붕대를 감은, 아마 뇌종양일 5살 아이와 마주쳤다. 내 또래인 아이 엄마 상태는 암 환자인 나보다 심각했다. 단번에 깨달았다. 아픈 자식 보는 건 자신이 아픈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걸. 남의 엄마는 그렇게 안쓰러웠는데, 나를 억지로 화장실에 꾸겨 넣는 내 엄마의 고통은 왜 안 보였는지 모르겠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침대 위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며 출근하는 심정이 어땠을지 그땐 헤아리지 못했다. 암 판정 후 남편은 힘든 내색을 안 했다. 어느 날 잠깐 산책하러 나간다는 그를 집 창문으로 바라본 적이 있다. 그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온몸을 떨며 목 놓아 울었다. 한참 뒤 웃으며 돌아왔고, 난 모른척했다. 4기 항암 치료로 내 머리가 우수수 빠지자 우린 미용실에 같이 가 시원하게 머리를 밀었다.

암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뿐 아니라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필요로 했다. 분노했다가 절망했다가 슬펐다가. 주위 사람을 널뛰는 이 미친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익명으로 트위터(X)에 내 얘기를 했고, 같이 웃고 화내고 슬퍼하며 정말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닥 친하지 않았던 독일인 직장 동료도 생각난다. 그가 피자 한 판을 보내왔다. “아프다고 들었어요. 뭐가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끼니 챙기기 어려울 거 같아서요. 싫으면 부담 없이 버려요. ” 대부분 묻는 거로 끝나지만 이 사람은 서툴지언정 늘 행동이 먼저였다. 항암 후 처음 먹은 피자는 까무러칠 정도로 맛있었다.

진짜 삶 암은 보이지 않지만 언제 다시 재발해도 이상할 게 없다.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모르니 잘 죽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그런데 찾을 수 없었다. 이유가 있었다. 잘 죽는다는 건 결국 잘 산다는 거였다. 죽음과 삶이 동일하니, 굳이 잘 죽는 이야기를 따로 할 필요 없는 거였다. 이때부터 어떻게 죽을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지를 고민했다. 그렇게 찾은 답은, 현재를 살기다.
지난 2016년 투자은행 JP모건에서 인수합병(M&A)과 상장(IPO) 업무를 하던 월가 시절 동료들과 함께한 최지은(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진 최지은]
극도로 성취 지향적인 한국사회에선 모두 미래를 산다. 돈 벌려면, 승진하려면, 아이 좋은 학교 보내려면…. 이렇게 미래까지 현재를 끌고 가야 한다는 압박이 너무나 크기에 늘 불안하다. 미래가 원하는 대로 잘 안 풀리면 또 과거로 돌아간다. 이랬어야 했는데, 말았어야 했는데….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거에 대한 후회는 똑같다. 모두 암 환자처럼 두려움에 현재를 잠식당한 채 살아간다. 극단적으로 삶을 유예하며 죽음을 마주하고서야 이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게 됐다.

막상 죽음의 병상 위에 누워보니 이력서에 한 줄 추가하려고 아등바등 이뤄낸 매출이나 빠른 승진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후배에게 용기를 북돋워 연설을 도왔을 때처럼 이력서엔 도움 안 되는 순간만 기억났다. 맞다. 결과 아닌 과정, 그게 삶이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지에 집중하며 매 순간 살아가기로 했다. 이력서보다 부고에 집중하는 삶, 다들 이렇게 현재를 살았으면 좋겠다.
지난 2018년 메타(페이스북) 싱가포르 아태본사에서 발표하는 모습. [사진 최지은]
투병 후 "지금껏 일 너무 많이 했으니 이젠 워라밸 해라"고들 한다. 하지만 일하는 시간도 나의 삶, 일 밖의 시간도 나의 삶이다. 이런 구분은 의미 없다. 더욱이 암 걸려 바닥을 칠 때도 일에 대한 좋은 기억으로 버텼을 만큼 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열심히 일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1년 넘는 치료 후 복직하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현대카드·스탠다드차타드·JP모건·텔레노(노르웨이 통신사)에 이어 지금의 메타까지. 20년 가까운 직장생활은 불확실성을 견디는 근육을 키우며 다시 일어서는 방법을 익히는 과정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응원·감사 이런 좋은 단어가 때론 얼마나 폭력적인지 말하고 싶다. 병 소식이 알려지자 숱한 응원이 쏟아졌다. "넌 강하니까 이겨낼 거야. " 위로지만 환자들에겐 상처다. 강하지 못해 암을 극복 못 하고 세상을 떠나는 게 아니다.

"감사할 걸 찾아보라"는 제안도 똑같다. 항암제가 잘 듣지 않느냐, 회사 복지가 좋아 치료비 걱정 안 하지 않느냐. 하지만 감사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세상의 감사 강요가 집요해질수록 배은망덕한 사람만 됐다. 차라리 충분히 분노하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충분히 분노해야 진짜 삶이 보이니까.

안혜리 논설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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