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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이 2018년 9월11일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를 가다>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창비 제공


문명교류사·실크로드학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위장간첩 ‘무함마드 깐수’로도 알려진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이 별세했다. 향년 91세.

25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에 따르면 정 소장은 전날 숨을 거뒀다. 고인은 분단과 냉전의 격랑을 온몸으로 관통했던 지식인이다. 1934년 중국 연변에서 태어나 베이징대를 졸업한 고인은 중국 국비유학생 1호로 선발돼 이집트 카이로대학에서 공부했다. 모로코 주재 중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1963년 4월 고인은 ‘조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북한행을 선택한다. 당시 중국 외교부장이 촉망받던 인재의 북한행을 극구 만류했으나, 고인은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편지를 보내 북한행을 승인받았다.

이와 관련해 고인은 2011년 출간한 회고록 <시대인, 소명을 따르다>(창비)에서 “이역 중국에서 살아가는 30년간 나는 한시도 내가 당당한 단군의 후예인 조선인이라는 점을 잊어본 적이 없었으며, 종당에는 조국에 돌아가 헌신하고야 말겠다는 심지를 줄곧 굳혀왔다”면서 “(조국으로 돌아간 것은) 지성인으로서 시대와 역사 앞에 지닌 민족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에서는 평양국제관계대학, 평양외국어대학에서 교수를 지낸 뒤 1974년 대남 특수공작원으로 선발됐다. 이후 튀니지대학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원, 말레이대학 이슬람아카데미 교수 신분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다 1984년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의 아랍계 필리핀인으로 신분을 위장해 한국에 입국했다.

1988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해 1990년 신라와 아랍·이슬람제국 관계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단국대 초빙교수를 지내며 활발한 저술과 대외 활동으로 이름을 얻었다. 1996년 7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돼 재판 과정에서 그가 ‘무함마드 깐수’가 아니라 북한 간첩 정수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한국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고인은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2000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했다.

고인은 뼛속까지 학자였다. 그는 “일각을 천금으로 여기고 시간을 무자비하게 혹사하면서, 1분을 2분 맞잡이로 쓰면서” 200자 원고지 2만5000장을 집필했다. 출소 후 한국 국적을 얻은 그는 학자로서의 삶에 충실했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타갈로그어, 말레이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영어 등 12개 언어에 능통했던 고인은 문명교류학과 실크로드학의 세계적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주요 저서로 <신라·서역교류사>, <기초 아랍어>, <실크로드학>, <고대문명교류사>, <문명의 루트 실크로드>, <문명교류사 연구>, <이슬람문명>,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실크로드 문명기행: 오아시스로 편>, <문명담론과 문명교류>, <실크로드 사전>, <민족론과 통일담론>, <우리 안의 실크로드> 등이 있다. 역주서로는 <이븐 바투타 여행기>, <중국으로 가는 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오도릭의 동방기행> 등이 있다.

<시대인, 소명을 따르다>에서 그는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못다 한 일에 대한 아쉬움은 있어도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없다.”

빈소는 강남성모병원장례식장 22호실, 발인은 오는 27일이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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