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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오후 일본 홋카이도 신지토세(新千歳) 공항. 분주히 오가는 항공기 사이로 하늘 위로 비죽 솟은 크레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는 4월 최첨단 반도체인 2나노미터(1나노는 10억분의 1m) 시범 생산을 앞두고 있는 일본 반도체 회사 라피더스(Rapidus)다. 공항에서 차로 15분을 달려 라피더스로 향했다. 공항 활주로와 불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라피더스 공장 앞. 제설기가 놓인 출입구엔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올 2027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사업 개시를 위해 첨단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 반입을 하고 있었다.
지난 12일 일본 홋카이도의 관문으로 불리는 신지토세 공항에서 바라본 라피더스 반도체 공장 전경. 공항과 도로 하나를 마주하고 있을 정도로 가까워 반도체 수출에 특화된 입지 구조를 갖추고 있다. 김현예 특파원

라피더스 관계자는 “(2나노 양산이라는) 큰 도전을 뛰어넘자며 직원들이 똘똘 뭉쳐 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라피더스 직원은 655명. 대부분이 엔지니어들로 일본이 반도체 시장을 이끌었던 1980~90년에 반도체를 연구했던 베테랑 기술진이 참여하고 있다. 평균 연령대가 40대 후반에 달하지만 '모두 필사적'이다. 2022년 가을, 지토세로 공장 부지를 선정한 이래 공장 건설부터 장비 반입까지 공정은 단 한 차례도 늦어진 적이 없다. 눈이 많은 홋카이도에서 공장 기초 건설을 단 하루도 늦추지 않기 위해 폭설에도 거대 텐트를 쳐가며 콘크리트 타설 작업을 이어달리기 하듯 했고, 미국 IBM에 파견된 기술진은 필사적으로 연구에 몰두했다. 지난 17일 도쿄 라피더스 본사에서 만난 관계자는 올봄 파일럿 라인을 가동해 6월 미국 브로드컴 시제품을 공급에 대해선 “공표할 사실은 지금 단계에선 없다”고 잘라 말했지만 2나노 반도체 양산에 대해선 자신감을 드러냈다. “반드시 성공한다는 생각뿐이다. 안될 이유가 없다. 마일스톤을 쌓아가다 보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이 반도체 부활을 위해 맹추격에 나섰다. 세계 반도체 시장 패권을 되찾기 위해서다. 1980~90년대만 해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이끌었던 일본은 빠르게 치고 올라온 한국과 대만에 뒤처졌다. 일본 정부가 잃어버린 ‘반도체 30년’을 되찾기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쏟고 있는 회사가 바로 라피더스다. 2022년 고이케 아쓰요시(小池淳義) 라피더스 사장 등 개인 주주 10여 명과 토요타자동차·소니·소프트뱅크·덴소·NTT·키옥시아 등 일본 산업을 대표하는 8개 기업이 힘을 합쳤다.

일본 정부는 파격적인 R&D(연구개발) 자금 지원에 나섰다. 지금껏 투입된 정부 지원금은 9200억엔(약 8조8800억원). 2나노 양산을 위해선 약 5조엔(약 48조2200억원)이 필요한데 지난 7일 일본 정부는 자금지원이 쉽도록 라피더스 지원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 정부는 2030년까지 AI(인공지능)와 반도체 분야 연구 개발과 설비 투자에 10조엔(약 96조원)을 투입하기로 하는 등 반도체 부활에 사활을 걸었다. 중국에 2년 만에 반도체 기술을 따라 잡힌 상황에서도 연구·개발 인력에 대한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 적용안이 담긴 반도체법조차 무산된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지난 12일 일본 홋카이도 지토세에 건설 중인 라피더스의 반도체 공장. 오후 3시가 지난 시간이지만 직원들이 공사 전용 사무소를 지나 출근하고 있다. 김현예 특파원
불과 3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에선 “2나노는 무리”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일본 반도체 기술은 범용급인 40나노 수준으로 한국과 중국에 뒤처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기술 격차를 메우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렸다. 2022년 5월 당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차세대 반도체 개발 협력을 합의하면서 라피더스는 IBM과 기술 제휴의 길을 텄다. 회사 설립 직후 라피더스는 미국 IBM에 대거 연구진을 파견해 2나노 기술 연구에 들어갔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AI 시장을 겨냥한 행보였다. 기술진 복귀와 함께 올 4월 파일럿 라인 가동을 앞두고 본격적인 장비 반입이 이뤄지자 시장은 라피더스의 빠른 속도에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라피더스 측은 “폭발적인 AI 수요가 일어나는 가운데 최첨단 기술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고 압도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정보 처리 수요에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라틴어로 ‘빠르다’는 의미를 담은 사명처럼 라피더스는 삼성전자·TSMC와 다르게 반도체 제조에 걸리는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는 ‘RUMS(Rapid and Unified Manufacturing Service)’ 를 강조했다. 전공정과 후공정, 설계 솔루션에 이르는 전 과정을 연계해 반도체 생산에 소요되는 시간을 기존의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회사 관계자는 “AI 분야 수요가 매우 높아지면서 전용 칩을 빨리 만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며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빠른 피드백이 가능한 서비스의 경쟁력을 강조하기도 했다.

대규모로 웨이퍼를 가공하는 삼성전자 등과는 다르게 한 번에 하나의 웨이퍼만 정밀하게 제어하는 싱글 웨이퍼 가공 방식(Single Wafer Processing)을 통해 AI 시대에 맞춘 고성능 저전력 칩을 ‘맞춤형 생산(다품종 소량생산)’하겠다는 계획도 소개했다. 소프트뱅크가 미국에서 추진하는 대형 AI 인프라 투자 프로젝트인 스타게이트만이 아니라 여러 AI 스타트업에도 빠르게 적용할 수 있다는 설명도 보탰다. 대형 고객을 선점한 경쟁사와는 달리 틈새시장을 ‘속도’로 공략하겠다는 계산이다. 이에 대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소재와 장비 분야에서 장점을 가진 일본의 특성을 모두 동원해 속도전을 하겠다는 것”이라며 “일본 반도체 부흥의 자신감을 표출한 것으로 본다”고 분석했다.

라피더스 지토세 공장. 최대 4000명의 건설 인력이 투입된 이 곳에서는 최첨단 반도체인 2나노 시범 생산을 위한 장비 반입이 이뤄지고 있다. 김현예 특파원
라피더스가 빠른 속도로 맹추격에 나섰지만, 본격 양산까지 가능할지는 일본 내에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5조엔에 달하는 양산 자금 조달, 안정적인 고객 확보가 가능하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피더스 관계자는 “30~40곳의 회사를 타진하고 있다”며 “기술을 갈고 닦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렇게 되면 자금도 모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발등에 떨어진 과제는 또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정권이 예고한 반도체 관세다. 이른바 ‘트럼프 관세’로 수출과 양산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전망에 대해 라피더스 측은 “IBM 등과 국제 연계를 근간으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미국과의 접점을 강조했다. 회사 관계자는 “(사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은 미국 회사도 많을 정도로 국제적인 에코 시스템을 만들어 사업을 하고 있다”며 “우리로서는 경제산업성 등에 시정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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