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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1기를 막 시작한 지난 2017년 트럼프(왼쪽)와 그의 책사 스티브 배넌. 배넌의 '도플갱어 전략'은 이번 2기 대선 당시에도 상당한 효과를 봤다. 연합뉴스=AFP
이재명만 대선판에서 치울 수 있다면, 시대착오적 계엄도 선거부정 음모론도 마다치 않는 보수의 세(勢) 결집을 보면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알던 보수와 너무 달라서다.

진실 한 스푼에 거짓 한 가득인 허위 선동 음모론은 김어준이 만든 'k값 부정선거'나 '박근혜 정부의 세월호 고의 침몰'이 잘 보여주듯 원래 더불어민주당과 가까운 좌파 진영 전매 특허였다. 명분 앞세운 폭력 옹호와 공권력 부정, 판사 신상털기로 사법체계 불신 조장, 사실관계 확인 없는 무차별 인신공격, 좌표 찍어 조리돌림, 전화번호 공개로 문자 폭탄 유도, 조직적 악플, 버스 동원 아스팔트 집회….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세력이 보여준 이런 전투력은 사실 오랜 기간 그들과 대척점에 선 친문(문재인)·친명(친이재명) 등 저쪽 진영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옳고 그르냐, 아니 맞냐 틀리느냐도 상관없이 오로지 "누구 편이냐"만 따지는 진영논리까지 그대로 빼닮았다.
공화당 '도플갱어 전략'과 유사
좌파가 외면한 대중 불안 포착
박근혜 탄핵 부채의식도 한몫
민주당 실패 반면교사 삼아야

중도 확장성 부재 운운 등 평가는 잠시 젖혀두고 현상만으로는 일단 이런 따라 하기(미러링) 전략이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사태 이후 고꾸라진 여당 지지율을 야당 위로 끌어올리는 괴력을 발휘한 건 사실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뭘 놓친 건지 찜찜했다.

보수 결집의 배경을 찾다가 유명 좌파 작가 나오미 클라인이 『도플갱어』(2023)에 쓴 트럼프 대통령 책사 스티브 배넌의 '도플갱어 전략'을 발견했다. 미국 정치판에서 우파가 좌파 따라 하기로 재미를 보고 있다는 내용인데, 한국 이야기라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최근 우리 정치판 상황과 유사해 흥미로웠다. 옳고 정의로운 좌파 서사를 우파가 빼앗아 왜곡한다는 식의 클라인 주장엔 동의하지 않지만, 미국 진보 진영이 간과한 여러 사회적 불만을 우파가 포착해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다는 분석은 진영과 무관하게 지금 한국 정치에 상당한 시사점이 있었다.

가령 좌파는 사소한 발언 실수도 중범죄로 처단하려 하는 등 사람들을 포용하는 대신 배척하면서 대열을 스스로 줄여나갔다. 반면 배넌은 좌파가 모욕하고 내치고 뉴욕타임스가 능멸한 사람, 좌파가 방치한 주제를 긁어모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한국식 정치 공학으로 표현하자면 중도 배척과 중도 확장이다. 결과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클라인의 우려에도 불구에도 민주당은 극단적 워키즘(정치적 올바름에 집착하는 PC주의) 옹호 등 평범한 대중의 불만과 불안을 무시하고 하던 대로만 고집하다 대선에서 패배했다. 클라인 주장처럼 "정치는 진공 상태(vacuum)를 싫어하는"데, 지난 미국 대선에선 공화당이 그 공백을 채우는 데 성공한 셈이다.
지난 15일 광주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 선 한국사 강사 전한길. 민주당이 그를 자극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보수 진영의 반발을 불러왔다. 연합뉴스
한국 상황에 대입해봐도 포용 아닌 배척이라는 민주당의 실책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계엄 이전 탄핵 남발까지 갈 것도 없다. 한국사 일타 강사 전한길 영상이나 광주 탄핵 반대 집회에 불필요한 '극우 프레임'을 씌워, 별 관심 없던 보수층까지 반발하게 만들었다. 반면 윤석열 대통령 탄핵 수사와 재판에서 제기된 불공정성이나 절차적 하자에 대해선 내 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눈을 감았다. 그게 지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보수가 짊어진 부채의식을 묘하게 자극했다. 미국에서처럼 민주당이 실책을 거듭하며 쌓인 불만과 불안을 탄핵 반대파가 흡수한 셈이다.

이게 탄핵 국면에서 지금까지 벌어진 일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양측 모두 지지율에 갇힌 지금 상황이 나아갈 방향을 정확히 알려준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가 이길 수 있었던 건 문재인 정부 스스로 무너뜨려 국민 불만이 많았던 공정 이슈를 국민의힘이 포착해 자기 상품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대 합작도 그래서 가능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진정성 없이 우클릭했다 실행 취소했다 우왕좌왕하는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만큼이나, 지지율 반짝 올랐다고 강성 지지층에만 올라타려는 국민의힘도 보통 국민 눈에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누가 보통 사람 삶에 절실한 이슈에 매달려 양극단이 아닌 중간을 끌어당기느냐, 거기에 승산이 있다.
안혜리 논설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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