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직거래 매물 5000개 나와
홍대입구역 인근 23개 생긴 가챠숍
고소득 자영업자까지 '비명'
대출 연체율 9년 반 만에 최고치
홍대입구역 인근 23개 생긴 가챠숍
고소득 자영업자까지 '비명'
대출 연체율 9년 반 만에 최고치
[커버스토리 : 불황의 시그널5]
서울 응암동 대림시장 앞 한 감자탕집이 마감 준비를 하고 있다./한국경제 김범준 기자
“썰물이 오면 누가 수영복을 입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워런 버핏이 2001년 주주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 내용이다. 시장이 호황이고 유동성이 풍부했던 시절엔 잘 보이지 않았던 위기의 실체가 불황이 오면 드러난다는 의미다. 자산이나 종목에 비유한 말이었지만 이를 국가 경제에 대입해도 유효하다.
한국 경제는 지난해 2분기부터 4분기까지 3분기 연속 0%대 성장을 이어갔다. 물가는 오르고 소득은 제자리인데 가계부채로 이자 부담이 높아진 소비자가 지갑을 닫았다. 지난해 소매판매는 전년 대비 2.2% 줄었다. 감소폭은 2003년 카드대란 이후 최대였다.
“한국이 일본과 같은 장기 저성장 국면에 진입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 지 오래다. 내수로만 돌파구를 찾을 수 없는 한국의 상황은 더 암울하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썰물의 시대, 한국 경제 불황의 시그널 5가지를 정리했다. 1. 지난해 학원 5000개 매물로
디자인=한경비즈니스 박명규 기자
“개원 2년 미만 학원 내놓습니다.”
국내 학원 관계자 26만 명이 가입한 한 카페에 학원 직거래 게시글이 급증했다. 지난해 학원 직거래 매매 관련 글만 5208건이 올라왔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3450건)보다 50% 많다.
학원가 관계자들은 내수 시장이 타격을 받으면서 가계 ‘최후의 보루’였던 교육비까지 줄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서울 강남구에서 10년 넘게 영어학원을 운영 중인 주미영 씨는 “현재 중학생과 고등학생까지는 출산율이 높았던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대치동, 강남 등을 제외하고는 학원 운영난이 심화하고 있다”며 “지방뿐만 아니라 송파나 목동에서도 다니던 학원이 폐업했다며 찾아오는 학생들이 늘었다”고 말했다.
학원 폐업은 경기 불황의 바로미터다. 대한민국 사교육 참여율은 80%에 육박한다. ‘자살하는 대한민국’의 저자 김현성 씨는 “한국에서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사교육비는 무조건적인 지출”이며 “특히 실질적인 준조세에 가까운 이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인구 집단이 30~60세에 이르는 핵심 납세자 집단”이라고 했다. 80%에 육박하는 가구가 아이를 키우며 무조건 지출하는 비용이 사교육비라는 얘기다.
네이버 카페 학관노에 학원 직거래 게시글이 올라와있다./학관노 캡처
컨슈머인사이트 소비자체감경제 조사에서 교육비 지출 전망은 2023년 12월 86.5에서 2024년 12월 83.6으로 떨어졌다. 이 지수는 100보다 작으면 소비지출 감소 전망이, 크면 증가 전망이 우세함을 뜻한다.
교육비 지출을 줄이려 한다는 것은 가계 경제 압박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소득분위별 교육비 지출에서 3분위(15.7%)와 4분위(11.6%)의 교육비 지출은 늘었지만 1분위(-7%), 2분위(-11.5%), 5분위(-10.7%)의 교육비 지출이 감소했다. 쪼들리는 가계가 교육비를 줄이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업계에서는 학원 시장의 위축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한국은 가계 지출의 평균 16%를 교육비로 지출하고 있는데 경기 불황에 저출산, 물가상승까지 겹치면서 학원 시장도 양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학원 관계자는 “최근 물가와 인건비 상승을 반영해 거의 모든 학원이 학원비를 인상했다”며 “학원비가 오르면서 학부모들이 다니던 학원을 3개에서 2개로 줄이는 식으로 결단을 내리면서 경쟁에서 밀려난 학원은 폐업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2. 1000원짜리 도파민
거리 채우는 ‘가차숍’
아이파크몰 용산점 가챠 파크 전경./HDC아이파크몰
경기가 어려워지면 어김없이 거리를 채우는 매장이 있다. 불황형 소비의 대표주자인 ‘뽑기방’이다. 최근 젊음의 거리 홍대입구역 인근에는 ‘가챠샵’이 23개나 생겼다. 2016년과 2017년에는 인형뽑기방이 성행했다면 최근에는 콘텐츠가 조금 달라졌다.
인형 대신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캡슐 안에 피규어나 문구류, 소품 등 다양한 종류를 넣은 ‘가차숍’이 유행이다.
홍대입구역 가차숍에서 만난 한 20대 여성은 “홍대는 가차숍 투어 성지”라며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설렘과 수집하는 재미가 가차숍을 찾는 이유다”라고 말했다.
홍대입구역 외에도 건대입구역, 서울대입구역, 성신여대입구역 등 대학상권 앞뿐만 아니라 홍대AK플라자와 잠실 롯데몰, 용산 아이파크몰, 스타필드 수원점 같은 복합쇼핑몰에도 가차숍이 들어섰다.
인근 부동산업체 대표는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인형뽑기방이 우후죽순으로 생겼는데 최근에는 임대가 나면 가차숍이나 무인 사진관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며 “인건비나 물가가 너무 올라서 무인으로 소자본 창업이 가능하고 24시간 매출을 낼 수 있는 점포를 선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차숍의 진가는 적은 돈으로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데 있다. ‘불황’ 속에서 기대할 수 있는 뜻밖의 행복인 셈이다.
경기가 나쁠수록 술·담배와 함께 복권 같은 ‘단순한 희망’이 늘어나는 현상이다. 불황을 증명하듯 로또 판매액도 역대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기획재정부와 복권 수탁 사업자 동행복권에 따르면 지난해 로또복권 판매액은 5조9562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도 판매액인 5조6526억원보다 5% 증가한 규모로 역대 최고 기록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적인 ‘불황형 대출’ 서비스인 신용카드 대출은 급증했다. 신용카드 대출은 금리가 최대 20%에 육박하지만 은행권에서 거절당한 중·저신용자들이 주로 찾는 급전 창구로 통한다. 3. “의사, 변호사도 비명”
자영업자 이자 연체율 9년 만에 최고치
디자인=한경비즈니스 박명규 기자
자영업자의 위기는 오늘내일 일이 아니다. 이태원, 강남, 가로수길 등 대형 상권 공실도 이젠 익숙해졌고 ‘자영업자의 비명’을 보여주는 뉴스도 무뎌졌다. 월 소득이 100만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개인사업자는 2023년 처음으로 900만 명을 넘어섰다. 고금리·고물가·고유가로 ‘3고’ 현상이 본격화한 무렵이다. 1년 동안 상황은 더 악화했다.
음식점과 헬스장 폐업 수는 지난해 역대 최대로 치솟았다. 현장에선 코로나19 사태 때보다 더 어렵다는 얘기마저 나온다.
디자인=한경비즈니스 박명규 기자
위기는 고소득 자영업자에게까지 번졌다.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상위 30% 고소득 자영업자들의 연체율은 지난해 3분기 9년 반 만에 최고로 치솟았다.
국민의힘 박성훈 의원이 한국은행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상위 30% 고소득 자영업자의 지난해 3분기 대출 연체율은 1.35%였다. 이는 지난 2015년 1분기(1.71%) 이후 9년 6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고소득 자영업자 연체율은 2023년 4분기 0.98%에서 지난해 1분기 1.16%로 올라선 후 2분기 1.09%, 3분기 1.35% 등으로 1%대를 계속 웃돌았다. 코로나19 여파로 서비스업 경기가 얼어붙은 2020~2021년에도 연체율이 0.5% 안팎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지난해 3분기 말 고소득 자영업자 차주는 146만7000명으로 전체 자영업자 차주의 46.9%를 차지했다. 대출잔액도 737조원에 달해 저소득 자영업자(133조1000억원)나 중소득 자영업자(194조3000억원)보다 월등히 많았다. 고소득 자영업자의 대출부실이 크게 확대될 경우 전체 금융기관의 자산 건전성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구조라는 게 은행권의 시각이다.
4. 사라진 공채
20대 고용보험 가입자 28개월째 감소
디자인=한경비즈니스 박명규 기자
경기 불황을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지표는 채용 시장이다.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고소득에 속하는 대기업이 고용을 줄이면서 내수 회복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300인 이상 대형 사업체의 월평균 취업자 수는 6년 만에 가장 적은 폭으로 늘어나는 데 그쳤다. 지난해 대형 사업체 취업자 수는 314만6000명으로 전년보다 5만8000명 늘었다. 2018년(5만 명) 이후 6년 만에 증가폭이 가장 작았다. 공공기관의 신규 채용 규모마저 5년 만에 반토막이 나며 지난해 2만 명을 밑돌았다.
주요 기업들이 이미 지난해부터 대내외 변수로 일제히 몸집 줄이기에 나선 만큼 올해 신규 채용은 예년보다 더 좁은 문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우리나라 주요 대기업 중 신입사원 공개 채용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삼성이 유일하다.
고용 한파가 몰아치면서 지난해 12월 기준 고용보험 가입자 수 증가폭은 21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특히 20대와 40대 고용보험 가입자는 계속 줄고 있다. 지난해 12월 29세 이하 가입자는 10만7000명, 40대는 5만1000명 각각 감소했다. 20대 가입자는 28개월, 40대는 14개월째 줄고 있다. 업종별로는 불황이 계속되고 있는 건설업계 고용보험 가입자 수가 17개월째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천경기 고용노동부 미래고용분석과장은 “과거 카드대란이나 외환위기, 금융위기 같은 큰 위기가 있을 때도 이보다 가입자 증가율이 낮지는 않았다”며 “현재 65세 이상은 고용보험 신규 가입이 안 되는 구조인데 가입되는 15~65세 구간 취업자는 더 크게 감소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5. 다이소의 시대
편의점은 ‘990원 삼각김밥’ 나와
다이소 명동역점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쇼핑하고 있다./한국경제 강은구 기자
“오후 2시인데 오늘 첫 손님이네요.”
지난 2월 10일 방문한 서울 강남구의 한 백화점 수입 화장품 매장 직원이 말했다. 국내 백화점은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하고 있지만 수익성은 악화하거나 답보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문전성시를 이루는 유통 매장은 다이소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다이소 매출은 2024년 4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합리적인 가격을 선호하는 소비자가 늘면서 편의점 업계는 1000원 미만 상품을 앞다퉈 출시하면서 ‘가격 파괴’ 경쟁에 나섰다. CU는 990원 삼각김밥인 ‘땡초어묵 삼각김밥’을 리뉴얼 출시했다.
지난해 CU의 1000원 이하 상품 매출 증가율은 29.8%로 3년 새 최고치를 기록했다. GS25도 1000원 이하 상품에 공을 들이고 있다. GS25에 따르면 1000원 이하 상품 매출 신장률은 전년 대비 46.5%를 기록했다. 2022년(28.8%)과 2023년(32.2%)보다 증가 폭이 확대됐다.
불황의 시그널이 강하게 울리자 주요 기관은 한국의 저성장을 경고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정국 불안이 장기화할 경우 올해 경제성장률이 전망치인 1.6%보다 낮아질 수 있다고 했다.
디자인=한경비즈니스 박명규 기자
지난해 역대 최대치를 기록한 수출 전망 역시 올해는 어둡다. 미국의 ‘관세전쟁 선포’와 중국의 ‘저가 공세’로 인해 기업 경쟁력이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KDI는 올해 수출 증가율 전망치를 1.9%에서 1.5%로 끌어내렸다.
정규철 KDI 경제전망실장은 “수출 여건이 안 좋아지면 가계 입장에서도 소득이 불안정해진다”며 “대내적으로는 정국 불안이 장기화하면서 경제 심리 회복이 지연되면 내수 개선이 제한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경제 심폐소생을 위해 국회에서는 추경 논의가 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민생 회복을 위해 35조원의 추경을 즉시 편성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민생회복을 위한 추경안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약 13조원에 달하는 '민생회복 소비쿠폰' 사업이다.
국민의힘은 이를 두고 이 대표의 '조기 대선용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 2월 11일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추경 논의를 반대하지 않는다”면서도 “다만 추경에는 분명한 원칙과 방향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민의힘은 타깃을 좁혀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에게 실질적 지원이 가능한 방안을 연구 중이라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