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어느 별의 지옥’ 개정판 내년 미국 소개
계엄시대 폭력과 존엄 고스란히 연작시로
시인의 경험은 고스란히 한강의 소설로
계엄시대 폭력과 존엄 고스란히 연작시로
시인의 경험은 고스란히 한강의 소설로
계엄 정부, 군부 독재 때의 엄혹성을 시로 마주한 김혜순 시인의 ‘어느 별의 지옥’이 내년 영어권에 번역 소개된다. 영역 시집은 2017년 개정판을 저본 삼아 연작시 ‘그곳’이 맨 앞에 배치되고 그와 관련한 시인의 ‘자서’도 함께 소개된다. 시와 자서를 보면,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 속 제3장이 토대한 ‘실화’의 주인공이 김 시인임이 드러난다. 사진은 2022년 4월 한겨레 인터뷰 당시. 사진 이정용 기자 [email protected]
2024년 12월 계엄 때 가장 치 떨었던 영역 한 곳이 출판계였다. 검열과 탄압에 따른 공포와 수모로 짓눌린 시대를 떠올려야 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원고 들고 군인들한테 가야 하나 그런 상상으로 처음엔 황당하다 곧 무서워지더라고요.” 한겨레에 전한 한 출판사 대표의 말마따나, 1979년 시 등단한 한 시인의 증언이 있다.
“채찍으로 내리치지 않아도 나는/ 발가벗긴다/ 발가벗긴 내 위로/ 물이 내린다/ 안개가 쏟아진다/ 이슬이 맺힌다// 다음-아버지들이 나온다/ 나와서 내 몸 밖에 커튼을 친다/…/ 다음―말씀의 채찍으로 내리친다/ 다음―잉크를 먹인다/ 몸통 가득 잉크가 차올라온다// 드디어 발가벗기고 매 맞고/ 무거운 이야기를 옷인 양 입고/ 몸 위로 가득 글씨를 토하고야 만다”
전두환 계엄 시절인 1979년께 쓰인 시 ‘그곳 2-마녀 화형식’이다. 형사한테 뺨을 맞은 직후의 시(인이)다.
“그곳, 불이 환한/ 그림자조차 데리고 들어갈 수 없는/ 눈을 감고 있어도 환한/ 잠 속에서도 제 두개골 펄떡거리는 것이/ 보이는, 환한/ 그곳, 세계 제일의 창작소/…/ 밖에선 모두 칠흑처럼 불 끄고 숨죽였는데/ 나만 홀로/ 불 켠 조그만 상자처럼/ 환한/ 그곳,”(시 ‘그곳 1’ 중)
당시 시인은 대학 갓 졸업 뒤 출판사에 다녔다. 서울시청 검열과 군인에게 원고 내고 받아가는 게 또 일이던 신입. 어느 날 교정보던 책의 번역자 연락처와 만난 장소를 추궁당하며 경찰서로 불려갔다. “이게 까불어?” 욕설과 함께 벼락처럼 몰아친 따귀가 일곱 대. “맞으면서 숫자를 세었다. 하숙집에 엎드려 뺨 한 대에 시 한 편씩 출판사를 결근하고 썼다. 그 시들을 몇 년 묵혔다가 이 시집에 실었다”고 시인은 38년 뒤 고백한다.
“세계 제일의” 거짓 서사가 “뻐언히”, 아버지의 말, 신의 말로 군림하는 곳. 고통이 존엄을 소외하는 곳. 일컫자니 ‘어느 별의 지옥’에서, ‘상처’와 ‘죽음’에 대한 주체적 은유가 아니라, 몸의 고통으로 자신을 타자화하며 타자를 감각하는 이른바 객체적 ‘생체시학’을 구현하였으니, 김혜순 시인의 1988년 시집의 정체다.
김혜순(70)은 2017년 봄 개정판 시집에 이 사실을 처음 공개한다. 제목도 없는 두 쪽짜리 서언(자서)을 빌렸다. 어쩌면 이 ‘부조리극’ 자체는 그전 알 법도 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한강(55)의 장편 ‘소년이 온다’(2014)를 통해서다.
1980년 5월 광주 전남도청에서 소년 ‘동호’를 데리고 나가려 했던 수피아여고 3학년생 김은숙은 대학 중퇴 뒤 출판사 다닐 때 경찰서에 불려가 일곱 대 따귀를 맞고 오른뺨 실핏줄이 터진다. “일곱 대의 뺨을 그녀는 이제부터 잊을 것이다. 하루에 한 대씩”으로 시작되는 ‘뺨 하나’에서 “그러니… 일곱번째 뺨을 잊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로 종결하는 ‘뺨 여섯’까지, 은숙의 내·외경을 “글씨를 토하”듯 담아낸 ‘소년은 온다’ 제3장의 제목이 ‘일곱개의 뺨’이다. 하루에 한 대씩 잊겠다, 한 대에 한 편씩 쓰이니 작중 질문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고 또 묻는 과정이 된다.
어느 별의 지옥 l 김혜순 지음, 문학과지성사(2017), 8000원
그 번역가는 실제 며칠 뒤 붙잡힌다. 미국의 여성 노동운동가 메리 해리스 존스(1837~1930)의 일대기(‘마더 죤스’, 1978)를 번역했던 이옥경씨(소설에선 남성이다)다. 첫 직장 평민사에서 일하던 김혜순은 마포경찰서에 불려가 “일곱 대를 맞았는데 …뺨은 순식간에 두 배로 부풀어 올랐”다고 2023년 ‘김혜순의 말’(마음산책)에 좀 더 상술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껏 누구도 김혜순과 시, 은숙, 소설과 한강, 그리고 이옥경을 한데 조명하지 못했다. 알아도 못했다면 이유가 있겠다. 3교를 본 가제본이 군 검열로 “불에 타서 검은 숯덩어리”(소설)처럼 되자 은숙이 저자 앞에서 울던 대목도 김혜순의 사례로 읽힌다. “나는 책의 3교 다음 OK를 놓고 가제본을 끝낸 책을 들고 시청의 군인들에게 검열받으러 갔다. …잉크로 본문이 다 지워진 책이 숯덩어리가 된 적도 있었다. 저자를 찾아가 한없이 울었다. 후에 그의 책은 대사 없는 무언극으로 공연되었”다(시집 자서). 남편 되는 극작가 이강백(78)의 작품이었다.
김 시인은 “마지막으로 쓴 일곱번째 시는 걸릴 것 같아 애당초 넣지 않았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다”고도 시집에 썼다. 일곱번째는 사라지지 못한다. “그들의 두려움을 봉합할 가짜 소설이 강요되던 그 방들의 존재를 잊지 않으려고 했다”는 수십년 뒤 시인의 고백대로다.
몇 차례 거듭되는 시어 “뻐언히”를 붙잡아 볼 만하다. 몰염치한 폭력 세계의 작태를 빗대거니와, ‘짐승’된 이들의 상흔을 생동시킨다. “눈 하나/ 깜짝 안”하는, “불을 보아도 타지 않는 눈” “보고 있어도 넘치지 않는 눈”들(‘눈’)은 시인의 시로 이제는 보게 되리라. “머리 풀고 옷고름 풀고/ 걸어온다” “뛰어온다” “춤추며 온다” “전생까지라도 가자”는 여자들(‘역사’)을, “죽은 줄도 모르고” ”일어난다” “내달린다” “돌아온다”, 급기야 “관 뚜껑을 스스로 끌어 올”리는 삶들(‘죽은 줄도 모르고’)을, ‘전 세계보다 무거운 시체’를…. 이것은 원혼 따위가 아니다. 권력에 결연히 맞서는 것도 아니다. “두 눈에 안대를 하고 있어도/ 눈 뜨고 나를 뻐언히/ 들여다보는 눈”(‘두 눈에 안대를 하고 있어도 보여’)으로 상징되는바, ‘나’의 눈을 바라보는 ‘너’의 눈을 내가 뜨는 일이다. 타자의 눈이 없이, “눈 뻐언히 뜨고 있을 땐/ 시가 나오지 않는다”(‘한사코 시가 되지 않는 꽃’)는 선득한 체득일 뿐이다.
이 시집은 내년 미국에 번역 출간된다. “창문은 열었지만, 맑은 날은 하루도 없는 나날”의 70~80년대치다. 서구 어떤 독자는 ‘뻐언히’ 2025년으로 읽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별의 지옥’의 지독한 현재성, 그리고 이야기의 독보적인 원형성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