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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 없는 성교’ 처벌하는 사회
일본 시민단체 스프링 활동가들이 2023년 6월16일 일본 참의원에서 부동의성교죄가 통과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스프링 제공


2023년 6월16일 일본에서는 강간죄 명칭을 ‘부동의성교죄’로 바꾸고 동의하지 않은 성행위를 처벌할 수 있게 하는 형법 개정안이 참의원 본회의를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일본의 부동의성교죄 도입은 116년간 쌓인 수많은 여성의 피해 증언과 시민사회의 노력 덕분이었다.

사단법인 ‘스프링(Spring)’은 일본의 부동의성교죄 도입을 주도한 시민단체다. 성폭력 피해자와 이들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었다. 성폭력 피해로 인생의 겨울을 보내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그 이름에 담았다. 경향신문은 지난해 12월 화상으로 열린 스프링 활동가 다도코로 유우와 노다 사오리, 한국성폭력상담소 김혜정 소장과 동은 활동가의 대담을 진행하며 일본을 비롯한 해외 비동의강간죄 도입 현황을 알아봤다.

길 위에서 피어난 ‘미투’ 시위

일본에서 부동의성교죄 개정 논의의 촉매제가 된 것은 2019년 성폭력 사건에 내려진 4건의 무죄 판결이었다. 취한 여성을 성폭행한 남성에게 “희미하게나마 여성의 의식이 있었다”며 면죄부를 준 후쿠오카 지방법원, 폭력을 당하는 상황에서 피해 여성이 반항하기 어려웠으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형태로 저항한 것은 없었다”는 시즈오카 지방법원,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친부에게 성학대를 당해온 피해자에게 “피해자가 저항하려고 했으면 저항할 수 있었다”고 한 나고야 지방법원, 친부가 12세 딸을 2년에 걸쳐 주 3회 강간한 사건에서 “좁은 집 안에서 다른 식구가 몰랐을 가능성이 작다”고 판단한 시즈오카 지방법원의 무죄 판결이 그것이다.

4건의 판결이 나온 이후 일본 각지에서 성폭력 관련 형법 개정을 촉구하는 ‘플라워 데모’가 열렸다. 여성들이 광장에 모여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피해 경험을 말하는 길 위의 ‘미투 운동’이었다. 스프링은 플라워 데모와 연대해 캠페인을 진행했고, 성범죄 관련 형법 개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시작해 13만명의 동의를 얻었다. 플라워 데모 이후 문제의 성폭력 사건 판결 4건 중 3건이 고등법원에서 유죄로 뒤집혔다.

앞서 2017년 6월 성범죄 관련 형법이 110년 만에 개정됐다. ‘폭행 또는 협박이 있을 때만’이라는 강간죄 구성 요건은 수정되지 못했다. 2019년 4건의 판결 이후 스프링은 멈추지 않아왔다.

피해 실태 약 6000건 제출, 의원 면담만 500회

일본 시민단체 스프링이 2020년 3월17일 모리 마사코 법무부 대신(법무부 장관·뒷줄 왼쪽에서 네번째)에게 성범죄 관련 형법 개정 요청서를 제출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스프링 제공


다도코로는 의회와 정부의 소극적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힘은 피해자 경험에 기반한 ‘구체적 증거’ 제시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는 “스프링은 5899건의 피해 실태조사 결과를 법무성에 제출해 성폭력 피해 상황에서 거절 의사를 밝힐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라는 것을 알렸다”며 “이외에도 정신과 의사와 심리상담사 등 전문가들도 법무성에서 열린 논의에 참여해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제언했다”고 말했다.

지속적인 노력은 정치인들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스프링의 두 활동가가 형법 개정의 높은 문턱을 넘을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로 꼽는 것 중 하나는 연이은 여성 법무상(법무부 장관) 취임이었다. 노다는 “두 명의 여성이 법무대신이 되면서 여성계가 법 개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노다는 “법 개정과 관련한 부정적인 여론이 일어날 때 정치인들이 법 개정 운동을 보호해준 적도 있었다”며 “보수적인 정치인이 나서서 ‘성범죄 관련 논의에서는 시민단체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해 스프링이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스프링은 부동의성교죄 도입을 위해 국회의원들과 500회 이상 면담하는 등 적극적으로 입법 활동을 펼쳤다.

로비 활동은 성공적이었다. 스프링의 초대 대표인 야마모토 준은 형법 개정을 위해 법무성이 주최한 ‘성범죄에 관한 형사법 검토회’와 법제심의회의 ‘형사법 부회’ 회의에 당사자로 참여했다. 다도코로는 “입법 과정에 당사자가 참여하지 않으면 2017년 개정안처럼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 생각해 정치권에 직접 요청해왔다”고 했다.

그 결과 스프링의 요구 사항이었던 8가지 처벌 규정의 조문 명시가 반영됐다. 부동의성교죄는 범죄 구성 요건으로 정한 ‘동의하지 않는’이라는 문구와 관련해 8가지 예시 행위를 함께 제시한다. ‘폭행 혹은 협박이 있는’ ‘심신장애를 일으키는’ ‘알코올 혹은 약물을 복용시키는’ ‘수면, 의식을 몽롱하게 하는’ ‘거절할 틈을 주지 않는’ ‘예상치 못한 사태를 직면케 해서 공포, 경악 상태에 빠지게 하는’ ‘학대로 심리적 반응을 하게 하는’ ‘경제·사회적 관계상의 지위에 근거한 영향력에 의하는’ 등이다.



‘부동의성교죄’ 있는 사회

스프링이 2020년 11월20일 일본 국회 의원회관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의 피해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스프링 제공


다도코로는 “법 개정 이후 인식이 변화하고 피해 신고 건수와 경찰의 검거·체포 건수가 많이 늘었다”며 “법조계에서는 조문이 명확해져 범죄를 인지하기 쉬워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고 했다. 노다는 “현장에서 성범죄를 담당하는 경찰 수사관들의 태도도 많이 바뀌었다”며 “경찰들이 성범죄 피해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 교육을 받은 결과”라고 말했다. 부동의성교죄 도입 후 연예·언론·교육계 등 다양한 업계에서 실명으로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백하는 흐름도 나타났다. 부동의성교죄가 여러 성폭력 피해를 가시화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부동의성교죄가 완벽한 법안은 아니다. 스프링이 요구한 안은 ‘Yes means yes’(적극적인 동의 의사가 없음에도 성관계로 나아간 경우) 모델의 부동의성교죄였다. 이는 상대의 부정 표현이 없더라도 상대의 ‘자발적인 동의’를 확인하지 않고 강제적으로 성행위가 이뤄지면 처벌할 수 있게 하는 유형의 법안이다. 아이슬란드, 스웨덴 등 북유럽이 이 모델을 택하고 있다.

개정된 현행 부동의성교죄는 ‘No means No’(부동의 의사를 표명했음에도 성관계로 나아간 경우) 모델이다. 이는 부동의 의사를 밝혔음에도 성행위가 이뤄졌을 때 처벌할 수 있게 한다. 독일, 영국, 캐나다 등이 이 모델을 기반으로 형법을 정하고 있다.

다도코로는 “No means No 모델의 문제점은 ‘거절할 수 있었음에도 왜 하지 않았냐’는 식의 2차 가해 위험이 있다는 것”이라며 “Yes means Yes 모델 반영과 성범죄 공소시효 철폐를 위해 법무성에 촉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다는 “성관계 동의에 대한 교육이 이뤄질 필요가 있다는 것도 강조하고 있다”고 했다.

비동의강간죄 도입은 ‘거부할 수 없는 변화’

비동의강간죄 도입은 세계적인 흐름이다. 일본뿐 아니라 여러 국가에서 이미 비동의강간죄를 도입했다.

스웨덴은 ‘Yes means yes’ 모델을 채택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다. 스웨덴은 2018년 형법을 개정해 “자발적 참여가 없거나 그에 준하는 성관계”를 강간으로 규정했다. 상대방의 자발적 참여 의사를 인식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성행위를 한 경우는 과실범으로 처벌한다. 아일랜드는 1981년부터 강간을 ‘피해자의 동의 없는 성관계’로 정하고 있다. 2017년 아일랜드는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성관계에 참여하는 경우에만 동의가 인정된다”는 정의 조항을 추가했다.

‘No means no’ 모델을 채택하고 있는 독일에서는 2016년 형법 제177조를 개정해 ‘타인의 인식 가능한 의사(묵시적 의사 표시 포함)에 반하는 성적 행동’을 범죄화했다. 개정된 독일 형법은 가해자의 협박이 있거나 피해자가 반대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상황 등을 피해자가 성행위를 거부한 경우와 동일하게 처벌할 수 있게 정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미국(11개 주)·영국·우크라이나·인도·캐나다·튀르키예 등도 비동의강간죄를 도입하고 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8년부터 한국의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권고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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