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우린 계속 뛰어야 한다.” 인기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에 나온 대사입니다. 극중 의사들은 계속 달립니다. 뛰지 않으면 골든타임을 놓쳐 환자가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재미와 극적 요소, 직업윤리와 소명의식까지 갖춘 주인공 등을 감안하면 이 드라마가 세계적 인기를 끈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아이러니하게 이 시기 국내에서는 중증외상 전문의를 양성하는 중증외상수련센터가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예산이 삭감된 영향입니다. 서울시도 나서고 여야가 추경예산을 편성할 때 해당 예산을 살린다고 하니 지켜볼 일입니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일만 해도 버거운 요즘, 해외에서도 충격적인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관세맨’ 트럼프는 돌아오자마자 관세란 칼을 마구 휘두르고 있습니다. 적국도 우방국도 가리지 않고 뭔가를 뜯어내고 있습니다. 그 칼날이 한국으로 향할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설 연휴를 강타했던 또 다른 이벤트는 ‘딥시크 쇼크’입니다. 미국이 독주할 것만 같은 인공지능(AI) 판에 중국이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957년 소련이 인공위성을 먼저 쏘아올린 충격과 비슷하다고 해서 ‘제2의 스푸트니크 쇼크’라는 말도 나옵니다.
딥시크 쇼크에 대한 국내 반응은 미묘합니다. 한국 기업들은 그동안 범용 AI 시장은 사실상 포기하다시피 했습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시장에서 뒤처져도 크게 나무라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왜? 미국이니까.
그러나 중국이 치고 나오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언제 중국이 이렇게 성장한 것일까. 물론 일부는 외면합니다. 왜? 중국이니까. ‘베꼈겠지’, ‘중국이 하는 걸 어떻게 믿겠어’라는 분위기가 한편에 있습니다. 마치 2000년대 삼성, LG 등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애써 무시했던 일본의 분위기와도 비슷합니다.
물론 위안을 삼는 분위기도 있습니다. 한국이 처진 시장에 딥시크라는 변수가 생겨 다행이라는 것입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네이버, 카카오, 삼성전자 등과 협력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또 반도체 기업이 수혜를 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
이렇게 위안하고 싶지만 상황은 심각합니다. 한국은 AI 경쟁에서 크게 처져 있습니다. 딥시크에 질문하니 “한국은 중국에 뒤져 있으니 자동차, 반도체 등 특정한 AI 영역을 공략하라”고 조언할 정도입니다.
딥시크 창업자의 발언은 더 충격입니다. “모방에서 시작했지만 창조와 공유를 통해 존경받고 싶다.” 중국 사업가 입에서 존경이란 말이 나오고, AI 레시피를 공개한 것이 파격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입니다. 또 딥시크 같은 스타트업이 중국에는 4000개가 된다는 것도 쇼킹합니다.
반면 한국 스타트업들은 조용합니다. 인터넷 시장이 열릴 때 네이버, 다음 등이 등장했고 스마트폰이 등장했을 때 국내에서 수많은 앱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AI 소스가 공개된 지금 한국 스타트업들은 조용합니다. 박태웅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은 “마치 제초제를 뿌린 듯하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딥시크의 주요 멤버들은 모두 중국 대학 출신입니다. 미국 유학파는 없습니다. 이공계 천재들이 새로운 산업의 주역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반대입니다. 이공계 인재들이 떠나고 있습니다. 2023년 미국이 고숙련 고학력 인재에게 주는 EB-1·2 비자를 받은 한국인은 5684명이었습니다. 인구 10만 명당 환산하면 10.98명. 중국, 일본의 10배로 세계 1위입니다. 지금도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의대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최근 3년간 서울대 공대와 자연대 등에서 600여 명, KAIST에서는 180여 명이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의대로 가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게 중론입니다. 2024년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감축이 치명타였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천재들을 모아도 따라가기 힘든 AI 전장에서 한국은 이공계 인재들을 해외에, 의대에 빼앗기고 있습니다.
병원에만 골든타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산업에도 제시간에 따라잡지 못하면 낙오자로 전락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인터넷 시대, 스마트폰 시대에 한국은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AI 시대는 불안합니다. 골든타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부, 기업, 대학, 정치권이 머리를 맞대고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2류 국가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지금 달리지 않으면 산업의 심장이 멈출지도 모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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