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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숨진 전 MBC 기상캐스터 오요안나씨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사진 인스타그램 화면 캡처

4년 차 프리랜서 방송작가 김모(25)씨는 최근 불거진 MBC 기상캐스터였던 고(故) 오요안나씨 관련 논란이 남 일 같지 않았다. 지상파 한 프로그램에서 막내 작가로 일하는 그는 선배들이 물·핫팩·휴지 등을 가져오라고 하면 바로 달려가야했다. 단체 채팅방에서 답이 1분만 늦어도 날선 말이 돌아왔다. 막내라는 이유로 다른 작가들보다 10시간은 더 걸릴 것 같은 자료 조사 업무를 맡았을 때 못하겠다고 했다가 “감히 네가 업무를 정하냐.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말을 들었다. 선배들은 “착해야 된다. 네 행동이 시시각각 평가되고 있다”고 했다. 김씨는 “부당한 일을 당해도 회사에 알리면 예민한 사람 취급하고 다른 프로그램에서 부르지도 않는다”며 “참고 버티는 게 당연한 이곳에서 나도 제2의 오요안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MBC 기상캐스터 故(고) 오요안나씨가 생전 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권 논란에 다시 불이 붙었다. 방송계는 비정규직 비율이 높고, 비정규직 안에서도 고용 형태가 다양한 대표적인 산업군이다. 비슷한 비극을 막기 위해선 구조적인 차별과 무한 경쟁 체제를 바꿔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법상 근로자 아니다”…괴롭힘 사각지대 속 비정규직
오씨처럼 프리랜서 등 지위에 있는 비정규직 근로자는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해도 법적으로 구제 받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방송 제작 조연출(AD)로 일했던 성모(27)씨도 그랬다. 사수가 자막 실수해놓곤 밤 늦게 전화해 “너 때문에 틀렸다”고 화를 내거나, 밤 늦게까지 일을 시키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조연출과 작가 등을 모아놓고 다른 동료들 평판을 하며 “나중에 잘 되려면 처신을 잘 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그는 “당장 내일 그만 나오라 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조퇴조차 잘릴까봐 말할 수 없었다”며 “내 앞에서 누군가를 심하게 욕하는 것을 일상적으로 보면서 회사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스스로를 옭아매게 됐다”고 말했다.

2019년 제정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게만 적용된다. 프리랜서·기간제· 파견·도급·단기직 등 비중이 높은 방송계에선 피해를 입어도 법적 사각지대에 놓이는 셈이다. 프리랜서의 경우 사용자(회사 측)의 지휘와 통제를 받아 실질적인 근로자로 일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는데, 조건이 까다로운 데다 통상 수개월 이상 걸려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지난 2022년 방송통신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지상파 방송사 13곳의 비정규직 구성원은 9199명에 달했다. 전체 근로자수(1만 3827명)의 66%에 달하는 수치다. 이들 방송사가 전년도에 신규 충원한 제작 인력의 64%가 비정규직이었다. 고용 유형별로는 프리랜서가 32.1%로 가장 높고, 파견직 19.2%, 용역업체 15.3%, 자회사 14.5%, 계약직 12.5% 등이 뒤를 이었다.

비용 절감을 위해 필수 업무에도 비정규직을 확산하는 관행이 계속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10년 차 프리랜서 작가 김모(35)씨는 “프리랜서는 자유롭게 일하고 능력만큼 돈을 버는 것을 뜻하는데, 방송계는 똑같이 일하고 돈은 못 받는다”며 “방송사 구조상 비정규직 없인 버티지 못하면서 대우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계약 연장 위한 차별·경쟁…을의 전쟁터
고용 안정성이 떨어지면서 계약연장 등 생존을 위해 차별과 경쟁을 당연시 여기는 풍토가 생겼단 지적이 나온다. 3년차 프리랜서 방송작가 유모(26)씨는 “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게 평판인데 그 평판을 동료가 만든다”며 “결국 누군가는 욕을 먹고 떨어져야 내 밥그릇이 보장되는 구조이니 온갖 흠집내기와 소문이 끊이질 않는다”고 털어놨다.

방송계 노동단체들은 오요안나 사건의 본질은 ‘비정규직 문제’에 있다고 지적했다. 미디어 노동단체 엔딩크레딧의 진재연 집행위원장은 “MBC뿐 아니라 다른 방송사에서도 중요한 업무를 프리랜서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은데, 실질적인 근로자인 점이 명확한 경우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을 하거나 취업 규칙에 신고 대상 범위를 확대하는 등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장은 “오요안나 한 명의 일을 조사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관계 부처가 합동해 방송계 프리랜서의 근무 환경을 조사하고 그에 따른 권고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며 “이와 더불어 비정규직도 고충 처리를 요구할 수 있는 창구가 있어야 한다. 방송사를 평가할 때 고용 실태를 포함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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