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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도장업체 11년 일한 네팔인 '파우델 엄릿'
현장 경험 가장 많아...한국 직원도 꿈쩍 못 해
"엄릿 같은 외국인 없으면 뿌리산업 유지 안 돼"
2년제 산업공학과 수업 들으며 자기개발 몰두
거주 비자 취득하고 영주권까지 얻는 게 목표
"5년 내에 네팔 가족과 한국에서 지내고 싶어"
파우델 엄릿이 서정대 글로벌산업공학과 용접 실무 수업을 듣고 있는 모습. 서정대 제공


경기 포천시에 위치한 국내 도장업체 '삼진산업'에 몸담고 있는 네팔 국적 파우델 엄릿(33)은 자신의 업무 수첩을 자신 있게 내놓았다.
곁에 있던 정협 삼진산업 대표는 "엄릿이 한글을 얼마나 잘 쓰는지 아세요?"라며 기대감을 끌어올렸다.

엄릿의 손이 멈춘 페이지에는 '생산 현황 메모'가 있었다.
메모에는 '공용선반' '하부연결대' 같은 한자로만 이뤄진 제품 이름은 물론이고 제품의 크기를 알 수 있는 '6단 3열' 같은 표현도 아주 정확하게 쓰여 있었다.
각 제품의 수량과 단가도 매일 확인해 기록해뒀다. 업무 일지만 보면 꼼꼼한 성격의 한국인이 썼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엄릿은 "삼진산업 현황을 모두 꿰뚫고 있어 가능한 메모"라고 설명했다.

엄릿은 삼진산업에서 현장팀장을 맡고 있다.
엄릿과 11년째 함께하고 있는 정 대표는
"엄릿만큼 현장을 잘 알고 작업 이해도가 높은 직원이 없다"며
"아무리 한국인 직원이어도 엄릿을 따라갈 수 없어 현장팀장을 맡겼다"고 말했다.


외국인 근로자라면 당연히 한국인 '지시를 받으며' 일 할 것이라는 편견은 옛 이야기가 된 지 오래고 오히려 외국인 근로자가 '없으면 안 되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한국 뿌리산업 현장을 엄릿의 한국생활기를 통해 엿본다.

"숙련 기술 필요한 도장...엄릿은 외부 영업도 나가"

파우델 엄릿(왼쪽 첫 번째)이 경기 포천시에 위치한 삼진산업 공장에서 정협 대표와 함께 업무 공정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모습. 포천=이상무 기자


2024년 말 기자가 찾은 삼진산업은 경기 포천시에 공장을 두고 있는 도장업체다. 25년 넘게 농기계, 산업용 기계, 전봇대, 울타리 등 중장비 도장을 전문으로 했다
. 중장비 도장은 크게 세 가지 공정을 거친다. ①거칠거나 각종 불순물이 있는 철제 제품의 도장면을 깨끗하게 하고 ②도장 라인에서 고루 도포를 한 뒤 ③고온에서 도장면을 말린다. 특히 ①에서 작업자가 신나로 직접 닦거나 기계를 이용해 전처리하기도 한다. 도장면 전처리 수준에 따라 도료가 잘 달라붙는지가 결정된다. 이들
공정 모두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③에서는 250도까지 올라가는 건조로에 여덟 시간 이상 제품을 넣는데 이때 건조로 주변 온도가 46도까지 올라간다. 도료가 잘 마르고 있는지 확인해야 해서 근처에 작업자가 머물러야 한다. 이동식 에어컨을 둬도 건조로 주변 온도가 쉽게 떨어지지 않아 여름에는 상당히 덥다고 한다.

엄릿은 이런 환경에서 11년째 일하고 있다.
이제는 현장 노하우를 모두 습득해 '현장팀장'을 맡고 있다.
엄릿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직원만 11명이다. 이 중에는 외국인 근로자뿐만 아니라 한국인 직원도 있다.
엄릿은
회사 임원과 외부 영업도 함께 나간다.
사무실에는 어엿한 현장팀장 책상도 따로 마련돼 있다.

배운 기술 써먹고 싶어...E7 비자도 따낸 엄릿

파우델 엄릿이 직접 작성한 '업무 일지'. 생산현황과 관련된 어려운 한자어도 틀리지 않고 꼼꼼하게 기록돼 있다. 파우델 엄릿 제공


엄릿은 네팔에서 은행원이었다. 좋은 직장이기는 했지만 월급이 충분하진 않았다.
는 "미래를 보고 한국에서 일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그때 엄릿은 스물두 살이었다.
특별한 기술이나 능력이 없었던 엄릿은 단순노무 취업비자인 'E9'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 E9 비자로는 3년을 일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추가로 3년을 일할 수 있다.

문제는
E9 비자는 추가 3년을 일한 뒤 무조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
이다.
엄릿은 삼진산업에서 배운 기술을 계속 써먹고 싶었다.
엄릿은 "삼진산업에서 꾸준히 일하려면 E7 비자가 필요했다"며 "
E7 비자를 얻으려면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한 이력과 한국어능력시험, 출입국사무소 시험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E7 비자는 한국인으로 대체하기 어려운 외국인 전문인력을 고용하기 위해 존재
한다. 이에
E7 비자로는 근로 계약을 유지한다는 조건에서 한국에서 장기간 지낼 수 있다
.
엄릿은 두 번째 한국 입국 때는 'E7 비자 소지자'였다.


고향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어진 엄릿은 삼진산업 업무에 몰두했다. 고용주도 자연스럽게 엄릿에게 여러 혜택을 주게 됐다. 정 대표는 "엄릿에게는 한국 운전면허증을 따라고 하고 공장에 있는 숙소가 아니라 따로 아파트 숙소도 구해서 차로 오갈 수 있도록 해줬다"고 말했다.

심지어 정 대표는 엄릿에게 종종 "
자기 개발을 하면 급여가 더 좋은 곳을 소개시켜 주겠다"는 말
도 심심찮게 한다
고 한다.
정 대표는 "엄릿같이 열심히 하는 직원이 잘 되는 모습을 봐야 다른 외국인 근로자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된다"며 "그처럼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열심히 하는 직원들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삼진산업에서 일하는 다른 외국인 근로자 중에서는 엄릿을 보고 E7 비자를 딴 직원이 생겼을 정도다.


국내 대학 진학해...쉬는 주말에도 수업 듣는 엄릿

파우델 엄릿이 서정대에서 용접 실무 수업을 듣는 모습. 서정대 제공





엄릿은 이런 정 대표의 절대적 지지에 2023년부터 아예 국내 대학도 다닌다
.
엄릿은 일요일만 되면 '서정대 글로벌산업공학과' 수업을 듣는다.
경기 양주시에 있는 서정대까지 운전하고 가서 오전 9시~오후 5시 30분 하루 종일 강의를 듣는다. 쉴 수 있는 주말 이틀 중 하루를 온전히 자기 개발에 사용하는 것이다.

기존에는
E9 비자를 가진 외국인 근로자는 '근로' 외에 활동을 할 수 없었지만 2023년 7월부터 대학을 다니는 것도 가능해지면서 서정대 같은 뿌리산업 외국인 근로자 육성 대학에서 학과 정원과 강의를 크게 늘렸다
.
엄릿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엄릿은 "삼진산업에서 알게 된 기술에 더해서 다른 기술과 이론을 배우기 위해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고 했다.


엄릿은 서정대 글로벌산업공학과에서 주로 용접 기술을 배우면서 '생산 운영 관리' 같은 경영학 기초 지식도 습득한다.
엄릿은
"옛날에는 단순하게 일만 했는데 이론을 배우니까 확실하게 다르다"며
"단가, 이윤배치, 생산성 올리는 법, 작업 시간 줄이는 법 등을 주도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이 생겼다"고 말했다.


현재 엄릿과 함께 서정대 글로벌산업공학과에서 수업을 듣는 외국인 근로자만 해도 84인이나 된다. 이들 대부분은 E9 비자를 가진 외국인 근로자로 서정대에서 2년제 전문학사 학위를 따고 나면 엄릿이 가지고 있는 E7 비자를 취득하게 된다.

신덕상 서정대 교수는
"현재 E9 비자로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근로자가 약 50만 명"이라며 "E9 비자로 입국한 외국인 근로자들도 한국에서 3년 일하면 현장 용어도 알고 단순 업무에는 이골이 나 있는 수준에 이른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그런데 업체들이 어차피 본국으로 돌아갈 사람이라고 여기고 고급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며
"이들에게 용접, 도장, 전기 등 고급 기술을 알려주면 금방 우리 뿌리산업 현장에서 초급 관리자급으로 중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엄릿이 대표 사례다.


"엄릿, 정말 필요한 사람...한국 뿌리산업 지탱"

파우델 엄릿의 삼진산업 사무실 책상 모습. 엄릿은 현장팀장으로 어엿하게 사무실 책상이 있다. 책상 잘 보이는 곳에 가족 사진이 걸려 있다. 포천=이상무 기자


엄릿은 E7 비자가 있기 때문에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다.
일단 올해 여름이면 2년제 산업공학과를 졸업하는데 이어서 서정대에서
4년제 산업공학과 진학을 바로 도전할 계획
이다. 나아가
거주 비자인 'F2' 비자를 얻으려 한다.
F2 비자를 얻으면 하루 여덟 시간만 한 사업장에서 일하면 겸업도 할 수 있고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다
.

엄릿은 "E9, E7, F2 비자에 영주권까지 따고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는 과정이 너무 길고 힘들게 느껴지지 않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처음에는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포천)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가야 한다면 멀게 느껴진다"며 "
그렇다고 처음부터 포기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이어 "일단 의정부까지 걸어가 보면 서울이 가까워지는 것처럼 하나하나 해내고 능력으로 이겨내면 된다"며 "앞으로도 기술이나 일에 대한 이해도도 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엄릿의 최종 목표는 네팔에 있는 아내, 아들, 딸을 모두 한국으로 데리고 오는 것
이다. 엄릿은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건 사실 너무 힘든 일"이라며 "향수병을 심하게 앓아 링거를 맞으면서 일한 적도 있다"고 떠올렸다. 그는 이어 "5년 안에 가족과 한국에서 생활하고 싶다"며 "영주권까지 따 한국에서 사업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함께 일하는 정 대표는 이런 엄릿을 두고 "이제는 정말 필요한 사람"이라고 했다.
정 대표는
"숙련 외국인 근로자가 없으면 한국 뿌리산업은 지탱할 수 없다"
며 "전문 기술이 필요하면서도 대표적 3D 업종인 뿌리산업에 한국 젊은이들이 취업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엄릿 같은 직원이 계속 한국에 들어올 수 있도록 업체들도정부도 대우를 잘 해줘야 한다"고 바랐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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