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삶 재현한 연기에 몰입감 고조<BR> “관객의 호흡까지 들려 항상 긴장”<BR> 세종시 초청 무대에서도 활약
“넌 그냥 가만히 있어. 엄마가 다 해줄게.”
“네가 무슨 마라톤이야? 위험하게 그걸 어떻게 한다고?”
2024년 11월 7일 인천 미추홀구 학산소극장. 8명의 시각장애인과 1명의 비장애인이 무대에 섰다. 조명도, 화려한 무대장치도 없었다. 의자와 단순한 소품 몇 개가 전부였다. ‘희망5미리’ 극단의 창작극 <꽃분씨의 홀로서기>는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온 시각장애인 꽃분씨가 가족의 과도한 보호를 벗어나 마라톤에 도전하는 과정을 그린다.
장애인 스스로 자신의 삶 그대로를 재현한 연기와 TV 프로그램 ‘인간극장’을 옮겨 놓은 듯한 내레이션, 라이브로 연주되는 배경음악까지 더해져 관객들의 몰입감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꽃분씨는 퇴역 마라톤 선수 양봉씨와 함께 훈련할 때 서로 다른 삶의 방식으로 부딪히지만 점차 협력해 마라톤을 완주해 낸다. 그리고 외친다.
“우리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자고요. 장애가 있어도 홀로 설 수 있다는 걸. 파이팅 파이팅 파이팅!”
최근 인천 미추홀구 학산문화원에서 희망5미리 극단의 주역들을 만났다. 희망5미리는 인천 미추홀 학산문화원과 인천광역시 시각장애인복지관이 협약해 결성한 시각장애인 예술동아리 ‘마냥’에서 출발해 지금까지 7편의 창작극과 1편의 영상극을 제작했다.
인터뷰 당일 이례적인 폭설에도 불구하고 단원 9명 중 4명(김광열, 박성민, 안지숙, 이금희)과 오지나 연출가가 참석해 연극에 대한 애정을 전했다.
50대 중반의 시각장애인인 이금희 단원은 어린 시절부터 약시로 시야가 흐릿했으며, 스무 살이 넘으면서 전맹이 되었다. 드라마는 ‘듣는’ 방식으로 시청하는 데, 시각 외 다른 여러 감각을 동원해 깊이 감상한다고 한다.
그는 “TV 드라마를 보면서 대사나 캐릭터를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면서 “인현왕후보다는 장희빈과 같은 악역에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 단원은 2017년에 시각장애복지관 연극 교실에 참여하면서 오지나 연출가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1년에 한 작품 씩 공연에 참여한다. 악역이 아닌 역할을 맡은 건 이번 공연이 처음이었다고.
그는 “무대에 서면 관객이 보이지 않아도 주목받고 있다는 기운을 느낄 수 있다”면서 “관객의 호흡이나 소리에 굉장히 민감해서 항상 긴장된다”고 말했다.
박성민 단원은 ‘희망5미리 극단의 평균 연령을 낮췄다’는 말을 듣는다. 나이(1997년생)도 어리지만,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극단에 밝은 에너지를 불어 넣는다. 그는 17살 때 원인불명으로 앓게 된 뇌수막염이 뇌염으로 진행된 탓에 그 후유증으로 시각장애(1등급, 전맹)와 지체장애(1등급)를 갖게 됐다. 박 단원은 ‘꽃분씨의 홀로서기’에서 사회복지사 역할을 맡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뜻밖의 ‘야심 찬 계획’도 귀띔했다. 그는 “평소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면서 “MBC 예능 PD를 만나면,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획기적인 예능 기획안을 공유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어릴 때부터 연극의 생동감을 좋아했다는 50대 김광열 단원은 “오지나 선생님이 연출을 맡는다고 해서 여러 차례 부탁해 극단에 합류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녹내장으로 시각을 잃어가는 중이다.
김 단원은 “눈이 보이지 않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안마수련원에 다니면서도 내가 여기에 있는 게 맞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연극이 주는 힘을 실감했다. 김 단원은 “장애가 있어도 홀로 설 수 있다는 이번 연극 메시지에서 용기를 얻었다”면서 “시각장애인이 아무것도 못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너 그것도 할 수 있어? 혼자서 걸어 다녀?’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요리도 척척 해내고,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극단의 유일한 비장애인인 안지숙 단원은 “공연이 끝난 후 난생처음으로 환희와 희열이라는 감정을 느꼈다”며 뿌듯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박 단원의 이모이자 활동지원사로 인천에 왔다가 우연히 연극에 참여하게 됐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연극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배역을 맡으면서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오지나 연출가 덕분에 발음이 좋아졌고, 말을 천천히 하며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연출을 맡은 오지나씨는 2004년부터 장애인 관련 활동을 해왔고 9년 전부터는 시각장애인 연극단 연출을 맡고 있다.
오 연출가는 단원들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단원들의 열정이 대단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금희 씨는 일주일 만에 대본을 완벽하게 외우고, 점자로 대본을 직접 만들어 내레이션에 활용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며 “나 대신 군기반장 역할도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광열 씨는 안마학교에 다니면서도 극단 활동을 포기하지 않고, 총무 역할까지 맡아 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은 사실 가족으로부터 가장 많은 상처를 받는데, 이는 ‘시각장애인은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편견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연극의 에필로그에서는 “누군가는 당연히 누리는 일상과 권리를, 누군가는 힘겹게 쟁취해야 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오 연출가는 “장애인에게도 당연한 일상이 편안히 주어지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활동에 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희망5미리라는 극단 이름은 2023년 공연작 ‘희망, 5mm’에서 따왔다. 5mm 정도 되는 새우젓만큼 보인다는 한 시각장애인의 말에서 착안했다. 희망5미리는 세종시 초청 무대에 서는 등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다.
“극단 해체는 쉬워도 창단은 정말 어렵습니다. 어렵게 만들어진 극단인 만큼, 우리 극단이 더 많이 알려지고 무대에 설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단원들의 열정은 거리 곳곳에 쌓인 한겨울 눈을 녹일 정도였다.
“넌 그냥 가만히 있어. 엄마가 다 해줄게.”
“네가 무슨 마라톤이야? 위험하게 그걸 어떻게 한다고?”
2024년 11월 7일 인천 미추홀구 학산소극장. 8명의 시각장애인과 1명의 비장애인이 무대에 섰다. 조명도, 화려한 무대장치도 없었다. 의자와 단순한 소품 몇 개가 전부였다. ‘희망5미리’ 극단의 창작극 <꽃분씨의 홀로서기>는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온 시각장애인 꽃분씨가 가족의 과도한 보호를 벗어나 마라톤에 도전하는 과정을 그린다.
학신시민극단 희망5미리의 '꽃분씨의 홀로서기' 장면 / 미추홀학산문화원
장애인 스스로 자신의 삶 그대로를 재현한 연기와 TV 프로그램 ‘인간극장’을 옮겨 놓은 듯한 내레이션, 라이브로 연주되는 배경음악까지 더해져 관객들의 몰입감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꽃분씨는 퇴역 마라톤 선수 양봉씨와 함께 훈련할 때 서로 다른 삶의 방식으로 부딪히지만 점차 협력해 마라톤을 완주해 낸다. 그리고 외친다.
“우리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자고요. 장애가 있어도 홀로 설 수 있다는 걸. 파이팅 파이팅 파이팅!”
최근 인천 미추홀구 학산문화원에서 희망5미리 극단의 주역들을 만났다. 희망5미리는 인천 미추홀 학산문화원과 인천광역시 시각장애인복지관이 협약해 결성한 시각장애인 예술동아리 ‘마냥’에서 출발해 지금까지 7편의 창작극과 1편의 영상극을 제작했다.
인터뷰 당일 이례적인 폭설에도 불구하고 단원 9명 중 4명(김광열, 박성민, 안지숙, 이금희)과 오지나 연출가가 참석해 연극에 대한 애정을 전했다.
50대 중반의 시각장애인인 이금희 단원은 어린 시절부터 약시로 시야가 흐릿했으며, 스무 살이 넘으면서 전맹이 되었다. 드라마는 ‘듣는’ 방식으로 시청하는 데, 시각 외 다른 여러 감각을 동원해 깊이 감상한다고 한다.
그는 “TV 드라마를 보면서 대사나 캐릭터를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면서 “인현왕후보다는 장희빈과 같은 악역에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 단원은 2017년에 시각장애복지관 연극 교실에 참여하면서 오지나 연출가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1년에 한 작품 씩 공연에 참여한다. 악역이 아닌 역할을 맡은 건 이번 공연이 처음이었다고.
그는 “무대에 서면 관객이 보이지 않아도 주목받고 있다는 기운을 느낄 수 있다”면서 “관객의 호흡이나 소리에 굉장히 민감해서 항상 긴장된다”고 말했다.
박성민 단원은 ‘희망5미리 극단의 평균 연령을 낮췄다’는 말을 듣는다. 나이(1997년생)도 어리지만,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극단에 밝은 에너지를 불어 넣는다. 그는 17살 때 원인불명으로 앓게 된 뇌수막염이 뇌염으로 진행된 탓에 그 후유증으로 시각장애(1등급, 전맹)와 지체장애(1등급)를 갖게 됐다. 박 단원은 ‘꽃분씨의 홀로서기’에서 사회복지사 역할을 맡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뜻밖의 ‘야심 찬 계획’도 귀띔했다. 그는 “평소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면서 “MBC 예능 PD를 만나면,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획기적인 예능 기획안을 공유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어릴 때부터 연극의 생동감을 좋아했다는 50대 김광열 단원은 “오지나 선생님이 연출을 맡는다고 해서 여러 차례 부탁해 극단에 합류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녹내장으로 시각을 잃어가는 중이다.
김 단원은 “눈이 보이지 않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안마수련원에 다니면서도 내가 여기에 있는 게 맞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연극이 주는 힘을 실감했다. 김 단원은 “장애가 있어도 홀로 설 수 있다는 이번 연극 메시지에서 용기를 얻었다”면서 “시각장애인이 아무것도 못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너 그것도 할 수 있어? 혼자서 걸어 다녀?’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요리도 척척 해내고,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극단의 유일한 비장애인인 안지숙 단원은 “공연이 끝난 후 난생처음으로 환희와 희열이라는 감정을 느꼈다”며 뿌듯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박 단원의 이모이자 활동지원사로 인천에 왔다가 우연히 연극에 참여하게 됐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연극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배역을 맡으면서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오지나 연출가 덕분에 발음이 좋아졌고, 말을 천천히 하며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학산시민극단 '희망5미리' 연출가와 단원들이 2024년 11월 7일 인천 미추홀구 학산소극장에서 열린 학산시민예술단 공연이 끝난 후 학산시민풍물단, 학산문화원 관계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김서영 기자
연출을 맡은 오지나씨는 2004년부터 장애인 관련 활동을 해왔고 9년 전부터는 시각장애인 연극단 연출을 맡고 있다.
오 연출가는 단원들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단원들의 열정이 대단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금희 씨는 일주일 만에 대본을 완벽하게 외우고, 점자로 대본을 직접 만들어 내레이션에 활용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며 “나 대신 군기반장 역할도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광열 씨는 안마학교에 다니면서도 극단 활동을 포기하지 않고, 총무 역할까지 맡아 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은 사실 가족으로부터 가장 많은 상처를 받는데, 이는 ‘시각장애인은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편견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연극의 에필로그에서는 “누군가는 당연히 누리는 일상과 권리를, 누군가는 힘겹게 쟁취해야 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오 연출가는 “장애인에게도 당연한 일상이 편안히 주어지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활동에 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희망5미리라는 극단 이름은 2023년 공연작 ‘희망, 5mm’에서 따왔다. 5mm 정도 되는 새우젓만큼 보인다는 한 시각장애인의 말에서 착안했다. 희망5미리는 세종시 초청 무대에 서는 등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다.
“극단 해체는 쉬워도 창단은 정말 어렵습니다. 어렵게 만들어진 극단인 만큼, 우리 극단이 더 많이 알려지고 무대에 설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단원들의 열정은 거리 곳곳에 쌓인 한겨울 눈을 녹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