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계 '무늬만 프리랜서' 관행, 다시 도마에
오요안나 비극의 근본 원인은 '왜곡된 고용 구조'
을(乙)끼리 싸우게 만드는 방송계 신분제 없애야
오요안나 비극의 근본 원인은 '왜곡된 고용 구조'
을(乙)끼리 싸우게 만드는 방송계 신분제 없애야
직장 내 괴롭힘 의혹으로 지난해 9월 숨진 전 MBC 기상캐스터 오요안나씨. 고인 인스타그램 화면 캡처
기상캐스터 고 오요안나(28)씨에게 MBC는
첫 번째 직장
이었다. 보도국 소속의 '프리랜서'
였던 그는 생전 과로·극심한 경쟁·낮은 임금·동료들의 사내 괴롭힘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다 입사 3년 4개월 만인 지난해 9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사는 게 너무 피곤하다"
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였다. 유족에 따르면 오씨는 입사한 지 반 년도 되지 않아 선배들로부터 비난, 폭언, 망신주기 등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괴롭힘은 2년 넘게 이어졌다.오씨가 자신의 휴대폰에 남긴 녹음과 메신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생전 MBC 동료 4명에게 직장 내 괴롭힘 피해 사실을 알렸으나 별다른 조치를 받지 못했다. 고용이 불안정한 프리랜서였던 그로서는 조직에 공식적으로 피해 사실을 알리고 구제받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씨의 사망을 계기로 방송계의 오랜 병폐인 '무늬만 프리랜서'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2019년 제정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만을 보호 대상으로 한다.
프리랜서 계약을 맺은 오씨는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방송계 '무늬만 프리랜서' 관행, 다시 도마에
방송업계는
필수 제작 인력의 절반 이상을 비정규직으로 고용
한다. 근로자를 고용하는 데 따르는 법적 책임은 회피하면서 인건비를 절감하고 해고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다. 방송계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는 대표적인 직군인 방송작가·아나운서·기상캐스터
등은 사실상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 일하지만 프리랜서 계약을 맺어 노동권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이러한 구조 속에서 같은 비정규직 내에서도 고용 형태에 따라 위계가 생긴다. 프리랜서·기간제· 파견·도급·단기계약 중 어떤 유형에 속하느냐에 따라 조직 내에서 주장할 수 있는 권리, 입지 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방송계에 '
비정규직 백화점'
이란 오명이 붙은 배경이다.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사옥. 연합뉴스
방송통신위원회의 2022년 보고서에 따르면 KBS·MBC·SBS·EBS를 포함한 주요 지상파 방송사 13곳의 비정규직 구성원은 9,199명에 이른다. 2021년 신규 충원한 방송 제작 인력을 살펴보면, 10명 중 6명 이상(64%)이 비정규직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방송사 내 제작 인력의 비정규직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고용구조의 악순환은 전혀 개선되고 있지 않다.
오씨처럼 날씨 뉴스를 전문적으로 전하는 기상캐스터는 방송사 보도국의 필수 인력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지상파 3사에서 일하고 있는 약 18명의 기상캐스터들은 모두 오씨처럼 '프리랜서'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 "오요안나 비극의 근본적 원인은 왜곡된 고용 구조"
전문가들은 오요안나씨 사건을 방송계의 무늬만 프리랜서 관행과 직장 내 괴롭힘 문화가 결합한 비극적 사건으로 봤다. 김유경 노무법인 들꽃 대표노무사는
"방송국에서 직장 내 괴롭힘이 만연한 이유는 부조리한 고용구조가 만드는 사실상의 '신분제' 때문"
이라며 "철저히 약자일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괴롭힘이나 성폭력을 당해도 조직에 알리기 어렵다"
고 설명했다. 피해사실을 알렸다가 업무에서 배제되거나, 해고를 당하면 좁은 업계에 영영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에 압도되기 때문이다.비정규직 근로자도 '사용종속관계'를 따져 근로자성을 인정받으면 괴롭힘 방지법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하은성 샛별노무사 사무소 노무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법원으로부터 ‘근로자성’을 인정받기까지는
짧아도 수개월, 길게는 1년
까지 걸린다"며 "사측이 선의에 따라 가해자와 분리 조치를 취해주지 않는 한 피해자는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며 이 시간을 버텨내야만 하는데, 그런 상황을 오래 견디긴 어렵다"고 말했다. "을(乙)끼리 싸우게 만드는 비정규직 없애라"
방송계 노동인권단체들은 일제히 "사건의 본질은 ‘비정규직 문제’에 있다"며
"비정상적인 위계질서를 만드는 방송계 특유의 고용 구조를 바뀌야 한다"
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미디어 노동단체 '엔딩크레딧'은 4일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사건은 MBC 내부에서 무늬만 프리랜서들이 불법 부당한 피해를 입었을 때 상식적인 경로로 올바르게 해결할 수 없음을 드러낸 사례"라며 "'프리랜서 계약서'는 신고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족쇄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단순히 취업규칙에 신고 대상 범위를 확대하는 조항을 신설하는 형식적 조치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며 "기상캐스터처럼 근로자임이 명백한 노동자는 불법 프리랜서 계약을 중단하고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방송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MBC 차별없는노조는 6일 성명문을 내고
"기상캐스터나 리포터 직군은 일의 특성상 방송에 얼굴이 나와야 가능한 일이기에 동료를 짓밟을 정도로 내부 경쟁이 치열했다"
며 "프리랜서 채용으로 사람을 소모하고, '을'끼리 싸우지 않도록, MBC는 방송국 내 비정규직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촉구했다. 김한별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방송작가유니온) 부지부장이 2019년 찍은 다큐멘터리 '일하는 여자들' 속 한 장면. 이 다큐멘터리는 프리랜서로 고용된 방송작가들의 노동 현실을 다루고 있다. 김 부지부장 제공
'근로자성 인정' 법적 판결만으론 해결되지 않아
그동안 방송계 프리랜서 노동자가 사실상 '근로자'라는 법적 판단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방송사의 왜곡된 고용 구조는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김유경 노무사는 "지난 5년간 방송계 내 프리랜서 노동자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판결이 연달아 나왔지만 현실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며 "방송사는 여전히 비정규직을 동등한 동료로 인정하지 않고 배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MBC는 지난 2021년 MBC '뉴스투데이'에서
10년간 일하다 해고된 작가 2인이 근로자성을 인정받자, 이를 고용 개선의 기회로 삼은 것이 아니라 근로자성을 아예 부정하는 방향으로 대응
했다. 당시 MBC는 작가들에게 제공하던 책상을 없애고 공용 책상으로 바꾸거나 컴퓨터, 전화기 등의 비품을 제거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부당해고 판결을 받은 작가들은 정규직보다 처우가 열악한 '방송지원직군'으로 복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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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노무사는 "이런 전례를 고려하면, MBC가 오씨 사건을 계기로 취업규칙을 개정하더라도 근본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고용 구조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취약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회사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고 신고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오씨의 유족 역시 "기상캐스터는 사고를 당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배달 노동자와 같다"며
을(乙)끼리 싸우게 만드는 프리랜서 제도를 바꿔줄 것
을 요구하고 있다.MBC 진상조사위, "형식적"이란 비판도 줄이어
MBC가 최근 구성한 진상조사위원회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나오고 있다. MBC 차별없는노조는 진상조사위에 대해 "
비정규직 경험이 없는 인사들로만 꾸려진 조사위
가 사건의 진위 파악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자칫) 진상조사 결과가 '비정규직끼리 갑질에서 발생한 개인 간의 비극'이라고 선 긋기 하는 것으로 끝날 수 있다"
고 지적했다.김 노무사 역시 "위원 대부분이 비정규직 관련 사건을 다룬 경험이 부족한 법조인들"이라며 "형식적인 조사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현재 유족 측은 MBC에 진상조사위를 재구성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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