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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에이징북
의존은 관계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돌봄을 청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의존의 관계를 내 삶에 수용하겠다는 적극적 의지의 표현이다. 게티이미지뱅크

폐 끼치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가장 어려운 말이 “도와줘”이고 남에게 신세 지는 일을 끔찍하게 여겨온 나로선 큰 결심이다.

때마침(?) 왼발 골절로 몇 주간 석고붕대를 한 상태라 집중적으로 이 연습을 할 수 있게 됐다. 매주 찾아와 음식을 만들어준 친구, 집 청소를 해준 동생, 죽을 끓여 온 후배 등의 도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넙죽넙죽 받는 거 누가 못 하랴 싶겠지만, 예전처럼 “필요 없어” “안 와도 되는데”라는 쓸데없는 말로 돕는 사람 맥 빠지게 하는 대신 입 닥치고 고맙게 도움을 받은 것만 해도 큰 진전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도와달라고 말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도움 요청을 어려워하는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다. 그건 내가 비장애인이기 때문이고, 운 좋게도 청하기 전에 곧잘 도움이 제공되는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독립의 환상에 찌든 나머지 내가 약하고 기댈 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이 독립의 환상이 초고령사회에 많은 이들을 괴롭힌다. 병문안 삼아 놀러 온 친구는 한숨을 푹푹 쉬며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구순을 넘긴 친구의 아버지는 노쇠가 꽤 진행됐는데도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이기 싫다”며 장기요양보험 이용 신청을 거부했다. 귀가 어두운데 보청기도 마다하더니 아예 외출을 끊다시피 했다. 그렇다고 혼자 온전히 지낼 수도 없는 상태여서, 친구는 오빠와 교대로 아버지를 돌보러 다닌다. 친구는 “돌봄을 잘 받는 것도 능력”이라는 말로 신세 한탄을 마무리했다.

내 또래 친구들의 부모 중에는 이 친구의 아버지처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거나 신체의 보조용품을 사용하는 사실을 수치스러워하는 분들이 많다. 그 심정은 이해할 만하다. 몸이 늙고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대놓고 혐오하는 사회에서 누가 의존을 기꺼워하겠는가. 언젠가는 누구나 겪을 일이 자연스럽기는커녕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 된다는 건 슬픈 일이다.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의 김영옥 등이 쓴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는 독립과 의존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기존의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며 “인간의 취약함을 사유하는 데에서 출발”하여 다른 사회를 상상해보자고 제안한다.

의존이 두려운 이유는 ‘독립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성장과 교육의 목표이자 도덕적 규범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독립적인 성인 노동자를 이상적 인간으로 표방하는 사회에서 의존이 불가피한 장애인과 아픈 사람, 노인은 낙인찍히고 때때로 유아 같은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의존적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의존 없이 생존할 수 없고, 아프거나 장애가 생겨 의존이 반복될 수 있으며, 노쇠로 인해 다시 완전히 의존하게 된다. 의존이 열등한 것이 아니라, 되레 의존이 기본이고 독립이 일시적인 것 아닌가?

누구도 온전히 자기 충족적일 수 없으며, 삶은 폐 끼치는 일의 연속이다. 내가 더 늦기 전에 폐 끼치는 연습, 정확하게는 도움을 주는 것뿐 아니라 도움을 청하고 받는 것도 자연스럽게 여기는 연습을 하는 이유는 취약함을 인정하고 우리 삶을 구성하는 의존 관계의 연쇄적 흐름을 내 일상에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의존을 우아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을 갖추면서 늙고 싶다.

이 책은 의존과 독립의 이분법을 벗어나 취약함을 새롭게 정의하는 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당신은 치매에 걸릴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라는 아찔한 질문을 던진다. 보통은 치매에 ‘걸리지 않을’ 준비를 하는데, ‘걸릴’ 준비라니.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운 나쁘게 치매 환자가 된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 만들어진 몸의 습속들, 자아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어떤 것들”은 치매로 인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인지능력보다는 몸에 밴 습관에 의해 만들어진 “사소한 행동들이 사실은 그 사람이 삶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그 사소한 몸짓에 기울이는 관심과 배려에 따라 치매 환자의 삶도 나름의 의미와 색채를 띤다.

그런 점에서 돌봄은 일방적 과정이 아니라 “돌봄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의 상호작용”이다. 누군가를 돌본 경험이 있다면 이 말을 단박에 이해할 것이다. 돌봄을 받는 사람이 상황에 맞게 몸에 힘을 빼서 돌보기 수월하도록 협력하고 눈을 마주치며 긍정의 표시를 보내거나 작은 몸짓으로 반응하는 것은 돌보는 사람에게 노력의 인정과 응답과도 같다. 이 응답의 능력을 이 책은 “감응 가능성”이라고 불렀다.

감응 가능성은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해도, 상대가 나의 응답을 초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응답하는 능력”,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가능성이다. 이 역량이 피어나려면 돌봄과 의존이 삶의 기본 조건임을 인정하며 돌봄의 열악한 여건을 개선해야 한다. “아프고 늙고 의존하는 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의미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 책을 읽은 뒤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의존)의 반대말은 ‘기대지 않는 것’(독립)이 아니라 ‘기댈 사람이 없는 것’(고립)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의존은 관계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돌봄을 청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의존의 관계를 내 삶에 수용하겠다는 적극적 의지의 표현이다. 필요한 것은 용기다. 2023년 아카데미상을 탄 단편 애니메이션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에서 소년이 “네가 했던 말 중 가장 용감했던 말”이 뭐냐고 묻자 말이 대답했다. “‘도와줘’라는 말”이라고.

전 여성가족부 차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의존 없이 생존할 수 없고, 아프거나 장애가 생겨 의존이 반복될 수 있으며, 노쇠로 인해 다시 완전히 의존하게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김희경 전 여성가족부 차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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