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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노르웨이 '이스달 여인' 미스터리
유류품서 신원 알 수 있는 실마리 하나도 없어
겨우 알아낸 이름마저 가짜... 최소 8개 신분
2016년 재수사 시작됐지만 여전히 의문남아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좇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이스달 여인이 시신으로 발견된 다음 날인 1970년 11월 30일, 노르웨이 법의학자들이 베르겐 인근 계곡 이스달렌의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사건을 재조사한 노르웨이 공영방송 NRK가 베르겐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서 발견한 사진. NRK 홈페이지 캡처


'죽음의 계곡(Death Valley)'. 노르웨이 서남부 도시 베르겐 인근에 위치한 얼음 계곡 '이스달렌'을 마을 주민들은 이렇게 불렀다. 중세시대 많은 사람들이 이 부근에서 자살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1960년대엔 안개 속에서 등산을 하던 사람들이 추락사하는 사건이 왕왕 발생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미스터리는 1970년 11월 29일, 이곳을 등산하던 한 남성과 그의 두 딸이 바위 틈에서 기묘한 형체를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한쪽 팔을 앞으로 쭉 뻗은 자세로, 얼굴을 포함한 신체 앞면만 불에 까맣게 탄 여성 시신이었다.

주변에 흩어진 유류품이 이상하다

이스달 여인 사건 당시 노르웨이 경찰의 현장 분석 보고서. 현장에는 의류와 음료수 병, 보석 등이 시신을 둘러싼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BBC 홈페이지 캡처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시신 근처에서 여러 유류품을 발견했다. 보석이 여러 점 있었고, 시계와 망가진 우산, 음료수 병도 있었다. 불에 조금 그을린 나일론 스타킹과 고무 부츠도 찾아냈다. 그런데 이 물건들의 위치가 이상했다. 마치 여성을 가운데 놓고 의식을 치른 듯, 물건들이 시신을 둘러싸고 부자연스럽게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불에 덜 탄 옷을 살펴보니 상표와 라벨이 모두 인위적으로 잘려나가 있었다. 플라스틱 병에도 조그만 스티커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여성의 신원을 추측조차 할 수 없도록 상황을 꾸며 놓은 것만 같았다. 키 164㎝ 정도의 젊은 여성. 노르웨이 경찰은 신원 미상의 이 여성을 '이스달 여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남겨놓은 흔적... 그녀는 누구인가

베르겐기록보관소에 남아 있는 당시 증거 사진. 베르겐 기차역에서 발견된 두 개의 여행가방과 그 안에 있던 보습 연고의 모습으로, 개인정보를 알 수 있는 모든 라벨과 스티커는 깨끗하게 제거된 상태였다. BBC 홈페이지 캡처


사건 발생 사흘 뒤 경찰은 베르겐 기차역 사물함에서 이스달 여인과 연관성이 높아 보이는 여행가방 두 개를 발견했다. 가방 속 선글라스에 남겨진 지문도 시신과 일치했다. 워낙 다양한 물건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이번에야말로 여성의 신원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물건을 꺼낼수록 이 가방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가 어려워졌다. 일단 가방에는 옷이 여러 벌 들어 있었는데, 이 옷들 또한 라벨이 모두 제거된 상태였다. 독일과 노르웨이 지폐뿐 아니라 벨기에, 영국, 스위스의 동전까지 나와 국적도 불분명했다. 외모를 바꿀 수 있는 가발도 두 개나 발견됐다. 처방이 필요한 보습 연고에는 의사와 환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스티커가 깨끗하게 떼어져 있었고, 심지어 화장품과 머리빗마저 브랜드 등이 모두 지워져 어떠한 정보도 알 수 없었다. 함께 들어 있던 노트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암호문만 가득했다.

난감해진 경찰은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먼저 가방에서 나온 비닐봉지를 분석한 끝에 이것이 노르웨이 남부 도시 스타방에르에 위치한 신발가게에서 제공하는 것임을 알아냈다. 가게 주인으로부터 '머리카락이 검고 단정하게 생긴, 서툰 영어로 말하던 여성'이 부츠 한 켤레를 사갔다는 증언도 확보했다. 이를 토대로 탐문수사를 벌인 끝에 이 여성이 가게 인근 호텔에 묵었다는 사실과 호텔에 체크인한 사람의 이름이 '페넬라 로르크'였다는 것도 밝혀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사건을 더욱 미궁으로 몰아넣었다. 존재하지 않는, 가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한 명의 여성, 8개의 여권과 8개의 이름

여성이 묵었던 베르겐 호텔 중 한 곳에 남아있던 숙박카드. 이곳에 묵은 여성은 자신이 벨기에 브뤼셀 출신의 '클로디아 틸트'라고 주장했다. NRK 홈페이지 캡처


또다시 벽에 부딪혔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경찰은 여성의 몽타주를 만들어 노르웨이 모든 호텔에 확인을 요청했다. 그리고 지난 1년간 이 여성이 최소 두 차례 노르웨이를 여행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3월엔 오슬로와 베르겐에서 묵었고, 시신 발견 직전인 10월부터 11월 사이에는 스타방에르와 베르겐, 트론헤임 등을 오간 흔적이 나왔다.

그런데 숙박객의 이름이 모두 달랐다.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오슬로에 있었던 여성은 ①벨기에 루뱅 출신 '제네비브 랭시에'였지만 ②24일부터 베르겐의 호텔 두 곳에서 묵은 여성은 브뤼셀 출신 '클로디아 틸트'였다. 10, 11월 방문 도시들에서는 ③벨기에 겐트 출신 '클로디아 닐슨'과 ④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태어난 '알렉시아 자르네-메르헤즈' ⑤벨기에 안트베르펜 출신 '베라 자를' ⑥벨기에 오스텐더 출신 '엘리자베스 레인하우어'라는 이름 등이 등장했다. 경찰들이 앞서 발견한 ⑦'페넬라 로르크'도 그중 하나였다.

1970년 10월 30일부터 베르겐의 한 호텔에서 묵은 이 여성은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태생의 '알렉시아 자르네-메르헤즈'였다. 이 여성은 자신이 현재 벨기에 브뤼셀에 살고 있으며 직전에는 영국 런던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NRK 홈페이지 캡처


조사 범위를 유럽 전역으로 넓히자 프랑스와 스위스에서도 목격자가 나왔다. 사망 한 달 전엔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에 묵었는데, 당시에는 ⑧'베라 슐로세네크'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으로 조사됐다. 호텔에 체크인하기 위해 내밀었던 최소 8개의 여권에 모두 다른 정보가 기재돼 있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중 어떤 이름도 실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위에 남은 수면제 수십 알... 자살일까, 타살일까



노르웨이 언론은 이 여성이 외국 비밀요원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동서 냉전 시기였고, 당시만 해도 여성 혼자 장기간 여행을 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가방 속 노트에 적혀 있던 암호문은 여성의 이동 경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어 'N 9 N 18 S'는 그가 11월 9일부터 18일까지 스타방에르에 머물렀다는 의미였다. 굳이 암호를 쓰고 위조여권을 가지고 다니며 전문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흔적을 숨기는 젊은 여성. '스파이 설(說)'에 무게가 실렸지만, 이 또한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1971년 2월 진행된 이스달 여인의 장례식. 참석자는 모두 경찰이었다. 당시 경찰은 혹시라도 가족이 찾아올 경우에 대비해 이 사진을 남겨뒀다고 한다. NRK 홈페이지 캡처


그사이 시신 부검이 완료됐다. 폐에선 그을음이 발견됐고, 혈중 일산화탄소 수치가 상당히 높았다. 몸에 불이 붙었을 때 살아 있었다는 의미다. 위 속에는 '페네말'이라는 수면제가 무려 50알 넘게, 채 소화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 및 수면제 다량 섭취. 스스로 수면제를 먹고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단 뜻일까? 모든 게 이상한 사건이었지만 경찰은 범인의 흔적은커녕 타살 증거조차 찾을 수 없었다.

1971년 2월, 경찰은 이 사건에 대해 '자살 추정(probable suiside)'이라 결론 내리고, 신원을 알 수 없는 이스달 여인을 위해 장례를 치렀다. 경찰관 몇 명만 참석한 쓸쓸한 장례식이었다.

발전한 과학기술, 새로운 국면

이스달 여인의 남아 있는 치아에 대해 2016년 동위원소 분석을 한 결과 이 여성이 10대 시절 살았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표시한 그림. 영어가 서툴렀다는 목격담이 있는 만큼 영국은 후보에서 제외됐고, 필적 감정 결과 프랑스와 독일 국경지대 출신일 확률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NRK 홈페이지 캡처


45년이 지난 2016년, 갑자기 이스달 여인 사건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노르웨이 공영방송 NRK가 경찰과 함께 이 사건을 다시 파헤치기로 한 것이다. NRK는 부검이 진행됐던 병원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여성의 턱뼈와 부검 당시 장기에서 채취한 샘플 등을 발견했고, 최신 법의학으로 추가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일단 법의학자들은 여성의 치아를 분석했다. 과거 부검 과정에서 여성의 치아에 금으로 덧씌워진 크라운이 여러 개 발견됐는데, 당시 노르웨이에서 시행된 치과 치료 유형이 아니었던 탓에 여성이 남유럽 또는 남미 출신일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됐었다. 하지만 동위원소분석 기법을 적용해 새롭게 치아를 조사한 결과, 이 여성은 10대 시절 독일과 프랑스 국경 지역에서 자랐을 확률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사망 당시 나이는 36~44세 사이로 추정됐다. 장기 샘플에서 채취한 DNA도 이 여성이 '유럽인'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스달 여인에 대해 인터폴에서 2017년 5월 발행한 블랙 노티스(흑색수배). 새로 그려진 여성의 몽타주가 포함돼 있다. 인터폴 문서 캡처


여성의 몽타주는 새로 그려졌다. 미국 법의학자가 목격담을 참고해 제작했는데, 당시 여성을 만난 기억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 그림이 "놀라울 정도로 생김새가 비슷하다"고 증언했다. 노르웨이 경찰은 이 몽타주를 포함한 여성의 정보를 담아 2017년 인터폴에 '블랙 노티스(흑색수배·변사자 신원확인 목적)'를 요청했다. 여성의 DNA 정보도 인터폴을 통해 세계 191개국에 제공됐다.

NRK는 영국 BBC와 손을 잡고 2년여간의 취재와 수사 과정을 기사와 팟캐스트를 통해 공개했다. 여성이 노르웨이인이 아닌 것이 거의 확실한 만큼 유럽 전역에 이 사건을 알리기 위해서다. 연재 기간 제보 400여 건이 쏟아졌지만, 현재까지도 이렇다 할 결정적 추가 정보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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