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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 애들이 돌아왔다
양업고 설립자 고(故) 윤병훈 신부
(1950~2024)

편집자주

고인을 기리는 기억의 조각, 그 곁을 치열하게 마주한 뒤 비로소 전하는 느린 부고. 가신 이의 삶엔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별세, 그 너머에 살아 숨쉬는 발자취를 한국일보가 기록합니다.

생전 윤병훈 신부는 말하곤 했다. "우리네 인생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행로가 달라진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못난 어른을 만나 증오심을 키우며 살아야 하나. 가엾은 아이들은 때론 아무 죄가 없다." 이런 생각은 각양각색의 상처를 가진 학생들을 마주하며 더 강해졌다.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이 길이 맞을까.
이른 아침, 승용차 한 대가 흙먼지를 만들며 비포장 도로를 털털 달렸다.
김경숙 가밀라 수녀
는 체념한 표정으로 흔들리는 차에 신세를 내맡겼다.

"수녀님, 무슨 큰 죄라도 지으셨어요? 어쩌다 이런 데 좌천을..." 운전하던 봉사자 눈길이 조심스레 조수석의 수녀로 향했다. 인천 노틀담복지관을 갑작스레 떠나온 수녀를 새 부임지로 데려가 주던 길, 더 이상은 궁금함을 참기 어려웠다. 1999년 충북 청주, 두메산골도 아닌데 이런 비포장 도로라니. 그리고 그 끝에 학교가 있다니. "아니에요. 관구장 수녀님 당부로 가는 거예요." 애써 웃었지만, 작은 옷 가방을 움켜진 김 수녀 손엔 힘이 잔뜩 들어갔다.

1년 전이었다. "어떤 신부님이 부적응 학생만 받는 학교를 세운대요." 격려 방문을 간 인천 노틀담수녀회 모두는 어안이 벙벙했다. 입학식이 코앞인데 흙먼지 날리는 공터에 시멘트를 붓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는 학교 설립 반대 가로막이 나부꼈다.
"쓰레기장이 들어온다더니 인간 쓰레기 학교가 웬 말이냐!"
공사장 안, 새카만 얼굴의 중년 사내가 근심과 설렘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학교 설립자이자 교장이 될
윤병훈 베드로 신부
였다.

"이건 무조건 도와야 해요." 수녀회가 큰 결심을 했다. 허허벌판에서 냉대받을 게 뻔한 학교로 교사 자격을 가진 수녀 3명을 파견키로 했다. 인내가 특기인 수녀들이건만, 개교 첫해 부임자로부터 비명이 터져나왔다. "매일 담배, 욕설, 폭력을 말리느라 혼쭐이 난대요. 날이 밝아도 아무도 교실에 없대요. 첫해 교사들이 다 떠난대요." 김 수녀는 비명을 지른 첫 부임자의 후임, 2년 차 파견자로 학교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꼭 25년 후, 김 수녀와 함께 수백 명의 졸업생과 재학생, 가족, 동료 교사들이 손을 맞잡고 한 장례식장을 가득 채웠다. 그 곤혹의 날, 잊지 못할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을 남긴 학교, 그리고 근심 가득했던 새까만 얼굴의 교장.
2024년 3월 27일, 윤병훈 베드로 신부가 선종했다. 향년 74세.





1998년 문을 연 양업고는 공사가 덜 끝난 학교 대신 인근 꽃동네 연수원에서 첫 학기 수업을 시작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여파에 모두가 떨 때였다. 학교 현장에는 급히 유학을 강제중단하고 귀국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부터 성적 비관이나 가정 환경으로 인한 부적응, 학교 폭력 가해 및 피해 후유증 등으로 고통받는 학생이 수두룩했다. 첫 모집에 40명이 지원해 모두 입학시켰다. 양업고 제공


시험대에 오르다



문장 딱 한 줄에서 시작됐다.
"매년 중도 탈락 학생 10만 명 넘어."
1996년, 어느 신문 기사의 한 대목이었다. 고교 윤리 교사이기도 했던 윤 신부는 교장 자격 연수을 받고 있었다. 연수를 마치면 가톨릭계 학교 교장의 길이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10만 명이라는 숫자가 마음 깊이, 콕 박혔다. 보통 학교 교장은 할 사람이 많았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이들은 누가 돌보나 싶었다. 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교사 중에서도 사제인 내가 해야 할 일 아닐까.

그는 본래 농부였고, 사제와 교사로 성장했다. 육남매 중 둘째 아들로 농사꾼을 꿈꾸며 자랐고, 충남대 농과대 3학년에 재학하다 중고교 물리교사였던 아버지를 여의었다. 초교 교사였던 모친은 홀로 된 뒤 고된 농사로 생계를 꾸렸고, 신앙에 의지했다. 모친의 깊은 신앙심에 육남매 중 둘은 사제와 수녀가 됐다. 신학교로 편입해 1983년 사제가 된 그중 한 사람이 윤 신부다.

결심을 끝낸 윤 신부는 바삐 움직였다. 그땐 비인가였던 대안학교를 견학했고, 96년 4월 당시 청주교구장이었던 정진석 주교를 찾아가 "학교가 필요하다"고 청했다. 정 주교는 우려 섞인 격려로 답했다. "교회가 꼭 해야 할 일이군요. 그런데 어떻게 감당하시려고요?" 일단 허락은 떨어졌다 생각했다. 윤 신부는 교구와 교육청 등을 바삐 오가며 방법을 알아봤다. 마침 1997년 특성화고 설립이 합법이 됐고, 교구는 공식 사업으로 학교 설립을 허락했다.

갈 길은 멀었고, 난관도 여럿 지나야 했다. 학교 터 구하기부터 힘겨웠다. 찾는 부지마다 주민 반대로 쫓겨난 게 수차례. 어렵사리 터를 구한 게 청주 환희리(里)였다. 부도난 공장 건물을 허물고 부랴부랴 공사에 나섰지만, 이번엔 돈이 문제였다. 온 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여파에 떨 때였다. 후원금으로 많은 걸 해결해야 했다. 충주 가르멜봉쇄수녀원이 첫 후원금을 보탰고, 전국 성당에서 보는 '매일미사'책에도 작은 광고를 실었다. 여전히 건축 현장 인부들 임금조차 부족했다. 윤 신부는 급히 은행에서 개인 명의로 7,000만 원을 빌려야 했다.

가만히 앉아, 후원만 기다린 것도 아니다. 윤 신부와 동료 수녀들이 매주 서울, 대전, 광주, 부산, 수원 등 전국 성당을 돌며 후원미사를 열었다. 주중엔 가르치고, 주말 모금을 다니는 여정은 그 후 10년 넘게 이어졌다. 윤 신부는 "돈 이야기를 하려니 죄인처럼 주눅이 들겠지만 학교가 서서히 틀을 갖추는 걸 보는 건 큰 기쁨 아니냐"고 다독였다.

1998년 3월, 마침내 학교 문을 열고 아이들을 불러들였다. 공사가 한창이었지만, 더 미룰 수도 없었다.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이름을 빌린
'어질 양(良), 일 업(業)', 양업고
의 첫 입학식이었다.

입학식 풍경은 딱히 어질지 못했다. 아이들은 다짜고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오늘 처음 봐놓고 머리채를 잡고 발길질, 욕설을 주고받았다. 서로 기분 나쁘게 쳐다봐서 학교를 안 다니겠다고도 했다. 학교는 금세 거대한 흡연터가 됐다. 곳곳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는 어른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이날 밤, 윤 신부는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교사들은 공허함을 추스르며 벼랑 끝에 서 있는 듯 위태로운 아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한 문장을 더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몫
이다."

양업고에는 한때 '흡연터'라는 이름의 컨테이너가 존재했다. '금연'을 외쳐봤지만 몰래 숨어 피우는 학생들이 버린 꽁초로 학교 뒷산에 거듭 불이 나자 어쩔 수 없이 마련한 곳이었다. 양업고 제공


아이들 잘못이 아니다



아이들, 역시나 만만치 않았다. 공사 중인 학교 대신 기숙사 겸 학교로 삼았던 인근 꽃동네 연수원은 하루가 멀다 하고 기물이 부서지고 불탔다. 폭력 사태도 빈번했고, 대부분 학생이 제때 수업에 오지 못하고 건물 곳곳에서 방황했다. '눈칫밥 먹는 셋방살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뭐, 이런 자식들이 다 있어?" 윤 신부의 장탄식은 기겁에 가까웠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어른을 안 믿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보다 심각했던 '불신'. '뭐 우릴 사랑한다고? 웃기고 있네!' 신뢰의 연결고리는 헐거웠고, 그나마도 위태로웠다.

윤 신부가 결국 폭발했다. 윤리 수업에 단 한 명의 학생도 오지 않은 날이었다. 180cm 넘는 장신의 윤 신부가 기숙사로 내달렸다. 커튼을 친 방에서 학생들은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지금 뭣들 하는 거야! 자려고 온 거야?" 이불을 걷어차고 호통을 퍼부었다. 예상치 못한 노기와 불호령에 기 쌘 아이들조차 눈만 끔벅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 윤 신부는 빈 교실보다 더 당혹스러운 장면을 마주했다. 누군가 교장실 화분들을 무참히 깨 운동장에 내동댕이 쳐 둔 것이다. 전면전 선포였다.

"너희들은 당장 자퇴서를 써."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다. 부모를 싹 소환하겠다고 했다. 함께한 수녀들도, 학생들도 처음 본 모습이었다. "신부님, 이유라도 물어보세요." 생각 깊은 한 수녀의 만류가 있었다. 저녁이 다 돼서 화가 가라앉은 윤 신부가 이유를 묻자 그때서야 한 아이가 입을 열었다. "비난부터 하셨잖아요. 비난은 이제 넌덜머리 나요. 이 학교는 기다려 줄 줄 알았는데."

윤 신부는 저녁 내내 침묵 속에 침잠했다. 그날부터였을까. 윤 신부는 교사들에게 ‘기다리자’는 말을 자주했다. "
기다리세요. 천천히 하세요.
스스로 변할 때까지 기다려주면 저희한테 올 겁니다. 다 아이들 탓만은 아닙니다." 때론 스스로 하는 다짐 같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말처럼 쉽지만 않았다. 일단 '중노동'이었다. 학교가 유지되려면 어른들이 아이들 곁을 계속 지켜야만 했다. 첫 3년은 모두 퇴근을 반납했다. 파견된 신부, 수녀, 교사 다 마찬가지였다. 윤 신부는 늘 "노동부에 제소되면 교장이 해고감"이라고 미안해했다. 교사들은 윤 신부를 '야전사령관'이라고 부르며 견뎠다. 물론 "여기서 계속 근무하다간 암에 걸릴 것 같다"는 호소도 들릴 듯 말 듯 있었다.

사고는 일상이었다. 아침 교무회의는 뉴스 브리핑을 방불케 했다. 당직 교사는 말했다. "A가 술을 먹다 들켰습니다. B는 PC방으로 도망가서 안 왔습니다. C는 몰래 외출했다 혼났습니다." 그나마 빈도가 줄어 당직조와 퇴근조를 나눠 2교대 혹은 3교대 체제를 돌릴 수 있게 된 건, 개교 4년이 되던 해부터다.

윤 신부의 마음도 타들어갔다. 당시 신학교 교수이자 동료 사제인
장홍훈 신부
와 만날 때면 "야, 학교 그만둬야겠다"는 말부터 꺼냈다. 그러곤 대화를 마치고 일어설 때 "씨앗을 뿌렸으면 기다릴 줄 알아야지, 이런 학생들이 나중엔 큰일 한다더라"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곤 했다.

학교 문을 닫을 뻔한 일도 있었다. 세찬 비가 쏟아지는 어느 여름, 학교 앞 하천을 둘러보던 윤 신부가 사람 같은 물체가 떠내려가는 걸 발견했다. 두 학생이 급류 속에서 버둥대고 있었다. 윤 신부의 고함소리가 교무실에 울려 퍼졌다. "큰일이야! 다들 나와봐!" 교사들 여럿이 달려 나와 한참 줄을 던지고 안간힘을 써서야 상황이 수습됐다. "대체 이 빗속에서 뭘 한 거냐" 묻자 헤엄 시합을 했다고 쭈뼛댔다. 아찔했다. 아무도 밖을 보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을까. "기도하자"는 말에 도망만 다니던 전교생이 이날만큼은 조용히 손을 모았다.

양업고는 설립 초기부터 현장학습, 봉사, 등반, 노작, 영성 등 특성화 수업 비중을 대폭 늘려 운영됐다. 청소년 성장 수업에서는 '내적 통제력'을 키우는 훈련을 비롯해 세계시민교육 등을 다뤘다. 아이들이 각자 가진 사연을 자세히 알게 된 뒤로 고인은 "학교에서 가정에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상처받은 학생들이어서 야단을 칠 수도 없었다"며 "누가 이 지경으로 만든 건지 안타깝고 슬펐다"고 말하곤 했다. 양업고 제공


기다린다, 어른이니까



시간은 윤 신부의 편이었을까. 윤 신부가 강조한 '체험'으로 변화의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아이들은 특히 '학교 밖'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교사들은 책상에서 버티지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 산을 오르고, 산책하고, 쑥을 캐고 밤을 구우며 학생들의 조잘대는 말을 들어줬다. 높은 산을 오를 때면 캠프를 지키며 포기하는 학생을 달랬다. 저녁이면 스르르 긴장이 풀린 학생들 표정을 보며 "뭔가 해볼 수 있겠다"는 확신도 생겼다. 산악등반, 봉사활동, 노작, 현장학습 등 특성화교과가 매년 늘고 체계를 잡았다. 설악산을 오르고, 오이밭과 수박밭을 일구고, 중국 동북3성 역사 현장을 찾았다. 제 근육으로 능선을 오르고, 맨손으로 생명을 일구고, 몰랐던 세상을 눈에 담는 동안, 학생들 표정에 하루씩 흥미가 담겼다. 뜨개질, 도예, 퀼트, 제과제빵 등 감정조절 관련 활동은 뭐든 들고 와서 시도했다.

윤 신부는 그새 든든한 방패막이가 돼 줬다. 그는 "학생만 탓하면 안 된다"면서도 '모든 것을 학교나 교사가 떠맡아야 한다는 생각'을 경계했다. 폭력 사태가 일 때면 "학교는 뭘 했냐, 교사는 뭘 했냐"는 식의 항의를 막아섰다. 윤 신부는 매번 "나한테 맡겨" 하고 혼자 가해자 부모, 피해자 부모 등과 한자리에 앉아 몇 시간이고 직접 토론하고 설득에 나섰다. 학생들 부모도 그렇게 변해갔다.

극적인 전환은 개교 3년 차 어느 날 벌어졌다. 모두를 긴장시킨 '10월 마지막 밤' 사건. 늦은 저녁 학교 밖 먼 밭두렁에서 학생들이 하나 둘 보이다 사라지더니, 전교생 60여 명이 한꺼번에 학교를 뛰쳐나갔다. "어디 가니? 얘들아, 저녁인데!" 학생들 뒤통수에 대고 교사들이 외쳤지만 학생들은 앞만 보고 걸었다. 무슨 생각인지 윤 신부는 조용히 바라만 봤다.

기숙사 통금 전엔 오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아침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휴대폰 전원도 꺼져 있었다. 밤새 기다린 교사들은 텅 빈 건물을 보며 넋이 나갔다. 누군가 기숙사에 남은 한 학생을 발견했다. "어디 있는지는 몰라요. 학교가 자꾸 이래라저래라해서 다 그만둔대요."

아이들은 다음 날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초조함과 긴장감. 이렇게 끝나는 걸까. 그런데 3일 차 오후 4시쯤, 멀리서 줄지어 걸어오는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굳은 표정의 윤 신부와 교사들이 교문 앞으로 달려나갔다. 교사들은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신부님 불호령이 얼마나 무섭게 떨어질까. 다 자퇴서 쓰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지.'

'오늘 정말 큰일 나겠구나.' 정적 속에 첫 학생이 들어선 순간, 몇몇 교사들 눈에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윤 신부가 학생을 말없이 꽉 안아준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도 봇물이라도 터진 듯 흐느꼈다. 윤 신부가 나지막이 말했다. "무사히 왔으니까 됐다. 잘 왔어. 잘했다." 마지막 학생까지 한 명씩 안으며 운동장은 울음바다가 됐다. 몇몇은 죄송하다며 무릎을 꿇었다. 눈물 범벅이 된 김경숙 수녀는 생각했다. '따져 묻지 않았는데도 죄의 반성이 저절로 이뤄지는 이런 날을 우리가 기다렸던가.'

그날 김 수녀는 궁금증에 몇에게 물었다. "그래서 잠은 어디서 잤는데?" 주차장, 찜질방, 터미널 등 다양한 노숙터 이름이 불려 나왔다. 부모님 집으로 도망가지도 못하고 삼삼오오 노숙하며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냥 껴안아주시길 참 다행이다.'

학생이 스스로 변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린 대표 사례는 금연 교육이다. 한 때 학교에서는 금연을 선언하는 학생에게 천연기념물상을 줬다. '좋은 선택을 하고 행동에 책임을 지는 학생'을 기르겠다는 취지의 하나였다. 흡연터 탓에 방문자 중에는 "이곳도 학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었다. 고인은 그때마다 "무던히도 기다리는 일이 방종을 허용하는 게 아닐까 고민될 때도 있지만, 결국 자발적으로 얻은 내적 추동 에너지만이 아이들을 거침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게 한다"고 말하곤 했다. 양업고 제공


스스로 선택하는 날이 온다



그렇게 '기다려준다'는 믿음이 아이들 마음에 조금씩 새겨져갔다. 4기 입학생
전상규
도 그걸 느낀 학생 중 하나였다. 상처 받고 꿈이 없고 화를 못 이기던 그는 여러모로 방황하고 있었다. 사건 사고가 쌓였고, 나무라는 윤 신부 앞에서 자판기를 부순 일도 있었다. 스스로도 퇴학을 예상할 무렵 '봉사 100시간' 결정과 함께 또 다른 신부님의 당부가 돌아왔다. "봉사 열심히 하고 와서 나랑 학교에서 1년 같이 살자."

몇 번씩 도망다니는 그를 수녀님들이 선배들까지 대동해 인천 집으로 잡으러 왔다. "와서 실컷 체험학습만 해도 좋으니 일단 학교에서 살아라." 그렇게 돌아온 학교에서는 별의별 체험을 다 했다. 지리산을 탔고, 설악산에 올랐고, 전국 대안학교를 견학했고, 서해 갯벌에서 맛조개를 캤다.

체험에 재미를 느낀 상규는 난데없이 "붕어빵을 구워 보고 싶다"고 외치기도 했다. 며칠 뒤, 정말 어디서 급히 빌린 붕어빵 기계가 학교에 등장했다. 열심히 붕어빵을 판 돈 몇십만 원을 기부하는 마음은 묘하게 벅찼다. '신부님, 수녀님이 이 정도로 나를 믿고 기다려주시는 구나. 이제는 이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않다.' 20여 년 전 붕어빵 맛을 또렷이 기억하는 그는 이제 어엿한 업체 대표로 전국 체인 세차장을 이끈다.

양업고 하면 첫손에 떠오르던 '흡연터'도 결국엔 사라졌다. 흡연을 금지해봤지만, 몰래 버린 꽁초로 학교 뒷산을 세 번이나 태운 뒤 최후의 수단으로 생긴 컨테이너였다. 새벽 5시 아침 기도를 드린 뒤 미사 전까지 흡연터 주변에 버려진 꽁초를 줍는 게 윤 신부의 일과였다. "흡연엔 반대하지만 무엇이 좋고 옳은지를 결국 스스로 선택할 때까지, 그 결정의 힘을 기르는 일만 도우며 기다려주겠다"는 취지였다. 이런 힘을 윤 신부는 '내적 통제'라고 불렀다. 아이들 안에 다 자기 능력이 있고, 조금만 기다리면 아이들이 스스로 나올 수 있다는 취지다. 이 힘을 북돋으려면 마음속에 좋은 그림을 많이 넣어줘야 한다고도 윤 신부는 강조했다.

정말 그 힘이 발휘된 것일까. 개교 7년 만인 어느 날, 이 흡연터는 교내 학생회의 정식 안건으로 올라왔다. 학생들은 스스로 '철거'를 결정했다. 눈발이 날리던 날이었다. "당장 지게차를 부릅시다!" 교사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운동장 한쪽의 흡연터가 실려 나가던 그날을 김경숙 수녀는 "인생 최고로 기뻤던 날"이라고 불렀다.

어느 새 학생들은 윤 신부를 '우리 대장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정확한 어원은 몰랐지만 '우리가 인정하는 보호자'쯤의 의미라고 교사들은 생각했다. 주말까지 모금을 다니던 일정도 잦아들었다. 꼭 개교 10년이 되던 무렵, 윤 신부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내가 다 갚았어요." 건축 기금으로 진 빚 이야기였다.

부도난 공장을 허문 공터에 설립된 양업고는 이제 아름다운 교정을 자랑한다. 학교 건물, 교사동, 기숙사, 도서관등도 세웠다. 건축기금을 모으려 주말도 없이 고인과 동료들이 10년 넘게 전국 성당 미사에서 모금 강론을 한 결과다. 양업고 제공


어른을 위한 어른



양업고가 위태 속에서도 버텨온 건 윤 신부가 '어른들의 어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재직 교사들은 입을 모았다. 양업고에서 교직을 시작한
정수연 교사
는 늘 "괜찮아. 내가 다 책임질게"라고 말해주는 윤 신부를 보며 '진짜 어른'의 모습을 배웠다. "나도 학생들에게 저런 어른일 수 있을까." 늘 돌아보고 고민했다. 김경숙 수녀는 자신이 실수로 사무실에 불을 냈는데도 단 한마디 면박도 없이 묵묵히 상황을 수습하는 윤 신부의 모습을 보며 용서와 신뢰의 힘을 곱씹었다.

9기 입학생
권환준의 기억도 다르지 않다.
어느 날 문득 교장 선생님의 표정에 사로잡혔다. ‘길 잃고 방황하던 나를, 그리고 친구들을, 선생님들을 바꾸는 저런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렇게 어른들을 주시하던 고3 어느 여름 날, 교장실에 노크를 했다. "교장 선생님 같은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아니, 이 학교 교장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환준이의 선언에 윤 신부는 생각보다 태연하게 답했다. "교장? 그럼 신학교 가서 신부가 돼야 하는데?" 그날로 꿈에 길이 생겼다.

윤 신부는 2021년 1월, 정말 사제가 된
권환준 신부
가 처음 참석한 청주 옥산 성당 미사에서 말했다. "권환준 시몬 신부님, 사랑합니다. 새 신부님이 드디어 사제가 되었다는 안도감으로 이제 저도 여유를 갖고 오랜만에 심호흡을 해봅니다." 권 신부는 교직 이수를 위해 충북대 교육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격무 등으로 고통받는 교사들의 소식이 끊이지 않지만 그는 다짐하고 있다. '나처럼 단 한 명이라도 은사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길을 걸어갈 힘을 얻는다면 그분들은 모두 '성공한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게 아닐까.'

고인은 2012년 교장에서 물러났다. 2019년부터는 청소년을 위한 놀이·체험·인성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놀체인 양업 사회적 협동조합'을 세웠다. 여타 기관에서 손사래 치는 학교폭력 가해 청소년 프로그램을 꾸리며 학생, 부모들과 땀 흘렸고 장기적으로는 학교 밖 청소년을 위한 교육사업을 마련하겠다고 각오했다. 자리만 옮겼을 뿐 여전히 아이들과 만나고 텃밭을 가꾸며 가축을 길렀다.

부지런히 움직였던 그는 지난해, 수년 전 극복했던 암이 갑작스레 악화해 입원했다. 찾아온 제자들로 병실은 붐볐다 '봉사 100시간'의 당사자
전상규 대표
도 병원을 찾았다. 병상에 누운 윤 신부는 연신 농을 건넸다. "이야, 상규야. 너 외제차 타고 왔다면서. 그게 몇 마력이냐. 너 그런 차는 몇 대냐. 요즘 매장은 몇 개냐. 그래서 얼마나 벌었냐." 제자도 너스레로 받아쳤다. "에이, 신부님. 왜 안 어울리게 속세에 관심을 가지고 그러세요." 웃어 보였지만 전 대표는 왜소해진 은사의 몸집에 자꾸만 눈이 갔다. 크고 따뜻했던 어른의 품을 떠올렸다.

눈물 없던 19세 소년은 졸업식 날 무너졌었다. 윤 신부는 꽉 안아주면서 나직히 말했었다. "자네를 미워한 게 아니야." 그 품에서 무너져 한참을 울었다. 둘러보니 오열하지 않은 친구가 없었다. 전 대표는 새벽에 눈을 뜰 때면 종종 학교가 사무치게 그립다. 그런 날이면 부천에서 청주까지 운전을 해 먼발치에서 교정을 바라본 뒤 돌아오곤 한다.

권환준(왼쪽 두 번째) 시몬 신부의 2018년 3월 신학생 독서직 수여 미사가 열린 날, 윤병훈(왼쪽 세 번째) 신부가 함께해 축하하고 있다. 양 옆은 임정진 신부와 최법관 신부. 놀체인 양업 사회적 협동조합 제공


천천히 천천히... 그 길이 맞았다



마지막을 직감했던 것일까. 윤 신부는 입원 직전 김경숙 수녀를 급하게 찾아 놀체인 조합으로 향했다. 체험 교실 뒷줄에 앉아 수업 중인 초교생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마당에서 키우던 닭 '꼬꼬야'와 '뚱땡이'에게도 "잘 지내"라는 인사를 건넸다. 그러곤 벤치에 누워 한참을 말없이 푸른 하늘을 바라봤다. 그날 오후 직접 짐을 싸 병원에 입원했고, 꼭 엿새 뒤 눈을 감았다.

윤 신부는 영면했고, 양업고 앞에는 이제 매끈한 도로가 깔렸다. 날 선 설립 반대 현수막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운동장엔 흙먼지 대신 푸른 잔디가 자란다. 전국 신자들이 1,000~2,000원씩 모아준 건축 기금으로 올라간 학교 건물, 기숙사, 교사동, 도서관, 급식소 등이 조용히 학생들의 수업을 바라본다. 2013년 WGI(William Glasser International) '좋은 학교(Quality school)' 인증을 받았다. 2014년 대한민국 행복학교 박람회 공로 표창(교육부장관)과 전국 100대 교육과정 우수학교 표창(충북교육감)도 받았다. 고인이 세운 놀체인 조합에서도 여러 체험 · 인성 프로그램이 계속되고 있다.

별세 전 고인은 학교의 인기가 많아지는 게 고민이었다. 입학 희망자가 늘고, 재학 의지가 강한 이들을 추리다 보니, 정말 거칠고 아픈 아이들을 품을 수 없게 됐다는 이유에서다. 고인은 생전에 후임자인 장홍훈 교장 신부에게 연신 당부했다고 했다. "우리는 더 어려운 학생들을 입학시켜야 해요. 항상 더 힘들고, 더 어렵고, 더 사랑이 절실한 친구들을 받아주세요."

제25회 졸업식을 몇 달 앞둔 지난가을, 교무실 한쪽에선
지송근 교사
가 한 해를 매듭짓는 교지 원고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고인의 별세 소식이 담겨 있었다. 29세부터 17년째 근무 중인 지 교사에게도 고인은 각별했다. 동료 교육자라기보단 진정한 교육 철학, 대안학교 교사의 책무감 등을 모두 가르쳐 준 은사였다. 한 교무실에 자리한 정수연 교사도 몇 번씩 휴대폰 속 고인의 마지막 메시지를 열어보곤 한다. "사랑해요, 수연쌤."

두 사람을 비롯한 교사들은 '학생들 눈높이에서 아이들과 함께 가야 한다는 그 교육철학을 꼭 이어가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되묻는다. 20여 년이 흘러 왔는데도, 이토록 많은 학생이 경쟁하고, 상처 받고, 도태되는 불행 속에 살아가는 비극은 왜 여태 끝낼 수 없는 걸까.

이 길이 맞을까.
학교는 어떤 곳이어야 할까. 대한민국에선 학생도 교사도 왜 여전히 시름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도 기다림이 더 필요한 걸까. 남은 교사들은 고인의 말을 곱씹고 있다. "천천히 하세요. 천천히. 혼자 다 해결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계십니다."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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