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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인 지난 1월29일 사고로 사망한 배달노동자 유종백씨의 오토바이가 6일 서울 강남구 신논현역 인근에 파손된 채 널부러져 있다. 정효진 기자


한파가 몰아친 6일 오전 서울 서초구 교보타워사거리 인도 한쪽에 심하게 파손된 오토바이 한 대가 덩그러니 쓰러져 있었다. 설날인 지난달 29일 배달 일을 하다가 사고로 숨진 배달라이더 유종백씨(61)의 오토바이였다. 유씨는 이 사거리를 지나다 버스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출근길 시민들은 발걸음을 바쁘게 옮기며 유씨의 오토바이를 지나쳤다. 오토바이 위에는 노란색 ‘자진 이동 계고장’이 붙어있었다. ‘차량이 방치돼 있어 교통소통 장애, 도시미관 저해, 타인의 재산 침해, 범죄 이용 등 공익을 해할 우려가 있다’며 ‘2025년 2월16일까지 자진 회수 또는 폐차하라’고 적혀있었다. 오토바이 안에는 유씨 사망 약 열흘 전에 발부된 교통질서 안내장이 들어있었다. ‘위험성이 낮거나 시일이 오래돼 범칙금을 부과하지 않지만 향후 같은 위반으로 단속될 수 있다’는 경고문구가 보였다. 유씨가 교차로 적색 신호에 대기하며 건널목 위에 멈춰선 장면을 누군가 찍어 신고한 것이었다. 반쯤 부서진 유씨의 배달상자 안에는 누군가 두고 간 국화꽃 한 송이만 남겨져 유씨의 넋을 달래고 있었다.

서울 강남구 신논현역 인근에서 지난 1월29일 사고로 사망한 배달 노동자 유씨의 오토바이 아래에 6일 국화꽃이 놓여있다. 정효진 기자


설 명절 유씨를 기다리던 가족들은 황망히 그를 떠나보내야 했다. 유씨 여동생의 남편인 A씨는 이날 기자와 통화하면서 “당일 아침 아내가 명절을 혼자 보낼 형님에게 ‘직접 만든 만두를 가져다 주겠다’며 통화했었는데 그것도 못 먹고 가버렸다”며 한숨을 쉬었다. 유씨는 제주에서 배달 일을 하다가 코로나19로 경기가 나빠지면서 3년 전 서울에 왔다고 한다. A씨는 “형님은 배우자와 자녀가 없어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직접 모시며 고생도 했고, 성실히 살았다”고 말했다.

오늘도 수백명의 라이더가 ‘위험한 사거리’를 지난다

지난 1월 29일 사고로 배달 노동자가 사망한 서울 강남구 신논현역 인근 사거리에서 6일 배달 오토바이들이 이동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이 사거리에서 숨진 배달라이더는 유씨뿐만이 아니다. 3년 전에도 이곳에서 라이더 한 명이 사고로 사망했다. 라이더유니온 측은 지난달 30일 유씨를 추모하는 성명에서 “(교보타워사거리는) ‘좌회전 신호가 떨어져도 버스전용차로에서 달려오는 버스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고 위험이 크다”며 “반복적인 비극을 막기 위해 실질적인 교통안전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관할 경찰서 관계자는 “이 사거리처럼 버스차로가 도로 중앙에 있는 경우 구조적으로 유사한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사무실이 밀집한 이 사거리는 점심시간부터 오토바이 행렬이 이어졌다. 이날도 오전 11시45분부터 오후 12시 사이 15분간 200대가 넘는 배달 오토바이가 지나다녔다. 신호가 바뀔 때면 아슬아슬한 상황이 자주 연출됐다. 사거리를 가로지르던 한 라이더는 함께 진입한 차량이 바짝 붙어서자 불안한 듯 옆 차와의 간격을 계속 확인했다. 다른 라이더는 옆 차선에 버스가 지나가자 속력을 줄이며 버스 쪽을 흘끔거렸다. 사거리를 건넌 라이더들은 인근 골목 곳곳으로 바삐 사라졌다.

“비 오는 날이라도 배달 자제해요” 쓸쓸한 죽음 곁에 선 시민들

지난 1월29일 사고로 사망한 배달 노동자의 소식을 알리는 포스터를 제작해 붙인 한모씨(21)가 6일 서울 강남구 신논현역 인근에서 자신이 만든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다. 정효진 기자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유씨의 죽음은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잊지 않으려고’ 나선 시민이 있었다. 직장인 한모씨(24)는 지난 2일 저녁 사거리 인근 곳곳에 ‘지난주, 이 사거리에서 일어난 죽음을 아시나요?’라는 제목의 포스터를 붙였다. 이날 사거리에서 만난 그는 “사고가 난 곳이 회사 바로 앞인 점이 계속 마음이 쓰여 뭐라도 해보고 싶어 포스터를 붙이게 됐다”며 “저희 회사도 배달 음식을 많이 시켜 먹는 데다 최근에는 날이 추워 회사 건물로 배달 오시는 분들이 많아져서 사고가 남 일 같지 않았다”고 했다.

한씨는 포스터에서 “점심시간이 되면 ‘식당이 멀다, 춥다, 비가 온다, 때로는 그저 귀찮다’는 이유로 가볍게 배달 주문을 한다”며 “우리는 3000원 남짓한 돈을 지불하면서 ‘값을 지불했으니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금액을 지불해도 사람의 목숨을 대신할 값이 될 수는 없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주십시오. 비가 오는 날, 눈이 오는 날만이라도 배달 주문을 피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포스터 사진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되면서 누리꾼들도 “오토바이 사고를 눈앞에서 몇 번이고 목격하니 기상 악화 시에는 배달 주문을 하지 않게 된다”라거나 “궂은 날씨에 배달을 자제하는 행동이 (라이더의) 권리 신장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는 등 반응을 보였다.

지난 1월29일 사고로 사망한 배달 노동자의 소식을 알리는 포스터를 제작해 붙인 한모씨가 6일 서울 강남구 신논현역 인근에 놓인 사고 오토바이를 바라보고 있다. 정효진 기자


한씨는 ‘건당’으로 수익을 책정하는 AI 플랫폼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보며 플랫폼 노동에 의문을 품게 됐다고 했다. 최근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여의도·남태령·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시위 현장 등에서 체험한 시민 연대의 경험도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행동에 나서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목소리 내야겠다고 생각해 왔다”고 했다.

그는 ‘배달 노동도 결국 자신이 선택한 일 아니냐’는 사회의 인식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한씨는 “‘일한 만큼 보상받는다’는 말은 그 이면의 열악한 노동을 은폐하는 것 같다”며 “포스터를 보고 공감한 이들이 비 오는 날이라도 배달 음식을 시키지 않아 사고가 없어졌으면 한다”고 했다. 한씨는 이날 유씨의 오토바이가 남아있는 사거리에 한참동안 서 있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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