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대받던 후발 주자 ‘렉라자’…개발 진행 밀어붙여 안정적 수익 확보
오너 리스크·비용 압박 없는 전문가 경영 강점
오너 리스크·비용 압박 없는 전문가 경영 강점
조욱제 유한양행 사장이 지난해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유한양행
“블록버스터(연매출 10억 달러 이상 의약품)는 신이 내린다.” 제약 업계에 퍼져 있는 말이다. 후보물질을 발굴해 개발과 임상까지 통과한 뒤 시장성까지 얻는 것이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것이다.
한국에선 유한양행이 최초로 ‘신의 선택’를 받았다. 최근 각종 악재 속에서도 유한양행 실적은 증가하고 있다. 2024년 한 해 연결 매출은 2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기대된다. 영업이익은 980억원으로 영업이익률이 전년 3%에서 약 5%까지 높아질 전망이다.
2018년 글로벌 빅파마 존슨앤드존슨(J&J)에 ‘라이선싱 아웃’ 했던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가 지난해 국산 항암신약으로선 처음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1차 치료제로서 허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2024년 9월 J&J 자회사인 얀센바이오테크로부터 수령한 마일스톤 6000만 달러(약 800억원)는 유한양행의 수익성을 올리는 데 한몫했다.
주가 흐름도 나쁘지 않다. 지난해 FDA 승인 이후 16만6900까지 올랐다 내려왔지만 ‘렉라자 효과’로 연초 13만원대까지 반등한 뒤 좋은 전망이 들려오고 있다. 지난 연말 유럽에서 허가를 받는 데 성공한데 이어 최근에는 추가로 받을 마일스톤 및 로열티 기대감에 따라 증권가에서 ‘고환율 수혜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같은 성과를 내기까지 유한양행만의 강점이 어떻게 발휘됐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각에선 “그저 운이 좋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국산 신약은 1990년부터 나왔으며 전통 제약사 중에서도 한미약품, GC녹십자, 동아ST, 대웅제약 등 경쟁사들이 연구개발(R&D) 및 오픈이노베이션에 꾸준히 투자하며 지속적으로 신약개발에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개발 후발주자로서 ‘선택과 집중’ 전략에 탁월했던 점과 후보물질의 가능성만을 믿고 업계에서 외면받던 폐암 치료제 개발에 뚝심 있게 투자한 점이 ‘렉라자 성공신화’에 한몫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렉라자 탄생시킨 ‘선택과 집중’ 전략
3세대 상피세포성장인자수용체(EGFR) 표적항암제 렉라자를 최초 개발한 곳은 미국 보스턴에 R&D센터를 둔 바이오텍 제노스코다. 제노스코 대표인 고종성 박사는 2013년부터 렉라자의 후보물질을 공동개발할 연구실을 찾아다녔다.
고 박사는 LG화학(옛 LG생명과학)에서 개발한 제미글로의 핵심 개발자였지만 고생 끝에 2015년이 돼서야 모회사 오스코텍을 통해 유한양행에 기술이전을 하게 됐다. 여전히 국내 연구 인프라에 한계가 있었던 데다 다른 국내 제약사들은 협업을 망설였기 때문이다. 렉라자 이전까지 미국 시장에서 허가를 받은 국산 항암신약은 없었고 항암치료제 분야에서도 규모가 큰 폐암 치료제 시장에는 이미 쟁쟁한 경쟁자들이 있었다.
당시 제약업계 톱이었던 유한양행도 신약개발 분야에선 후발주자였다. 이에 따라 2015년 이정희 전 대표(현 이사회 의장)가 신약개발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시작하면서 택한 전략이 ‘선택과 집중’이었다. 신약개발 비용을 절감하고 개발 속도를 단축하기 위해 오픈이노베이션이 추진됐다. 그 과정에서 고종성 박사의 전임상 단계 후보물질이 눈에 띄었다.
유한양행으로 기술이전이 된 이후에도 렉라자는 업계의 냉대와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다. 하필 2015년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성분명 오시머티닙)가 FDA로부터 2차 치료제로 허가받은 뒤 2018년에는 1차 치료제로 승인을 받았다. 세계적 제약사가 내놓은 경쟁작이 10여 년 앞서 시장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조병철 신촌세브란스 연세암병원 교수를 비롯한 연구진은 해외 학회에서 냉대와 텃세를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유한양행은 물질 최적화와 임상 단계에서 지원과 신뢰를 아끼지 않았다. 타깃이 명확했다. 유한양행은 렉라자가 의료 현장에서 충족되지 않는 항암 수요를 충족하리라는 점을 믿고 개발을 밀어붙였다. 해당 물질은 EGFR 돌연변이 비소세포폐암을 표적 질환으로 삼는데, EGFR 돌연변이 비소세포폐암은 뇌로 전이가 발생하는 등 치료가 까다롭다. 특히 서구권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 유병률이 높다.
유한양행만의 전문경영인 시스템도 이 같은 결정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유한양행은 창업주인 유일한 회장의 철학에 따라 50년 이상 오너가(家)가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하는 한편, 대표이사 임기 또한 3년이며 1회만 연임이 가능하다. 임원진은 전문가 위주로 구성되고 부사장 중 자사 직원의 내부 승진을 통해서만 대표이사를 선임한다. 대표는 통상 1회 연임을 통해 6년간 회사를 이끌며 대체로 임기가 보장되지만 그 이상 장기집권은 어렵다.
이로 인해 매출 대비 낮은 영업이익 규모에도 비용 절감보다 투자 위주의 결정이 가능했다. ‘오너 리스크’가 없는 점도 회사가 외부의 풍파 없이 장기 전략을 짜는 데 유리했다. 유한양행 관계자는 “당시 경험 부족, 임상시험의 복잡성, 높은 연구비용 등 해결해야 할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며 “당시 이정희 사장은 유한양행 R&D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물질적 투자와 라이선싱 아웃 등 주요 고비마다 결단을 내리며 개발을 사실상 진두지휘했다”고 설명했다. 높아진 수익성, R&D 투자에 박차
결국 유한양행은 임상 1상 단계였던 2018년 11월 렉라자를 얀센에 기술수출을 하는 데 성공했다. 총 계약규모는 12억5500만 달러, 계약금은 5000만 달러였다. 현재 계약 규모는 9억5000만 달러, 약 1조4000억원으로 변경됐다. 이번에 FDA 승인을 받은 렉라자와 J&J의 ‘리브리반트’(성분명 아미반타맙) 병용 요법의 효능이 기대 이상으로 나타나자 기존 계약조건에 포함되었던 4세대 EGFR 타이로신키나제억제제(TKI)를 추가 개발할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계약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전자공시에 따르면 2024년 3분기 기준 유한양행은 얀센으로부터 2020년과 2021년, 2024년 3차례 총 1억6000만 달러를 마일스톤으로 받았다. 지난해 말 유럽 허가에 따라 3000만 달러를 추가로 수령하게 됐다. 렉라자는 2021년 국내에 출시됐지만 해외 판권은 넘긴 상태로 미국, 유럽 시장 매출에 따라 10~12%의 로열티를 받게 된다. 렉라자가 시장에 블록버스터로 안착할 경우 유한양행이 매년 수령하는 로열티가 3000억원에 달할 수도 있을 전망이다.
불황이 심화하는 요즘 렉라자의 성과는 유한양행은 물론 제약업계에 신약개발 지원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원·달러 환율이 치솟는 상태에서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트럼프 2기 행정부 취임으로 수출에 경고등이 켜졌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의 원가 투입 없이 들어오는 정기적 외화 수입으로 인해 유한양행의 수익성은 지속적으로 높아질 전망이다.
이로 인해 추가적인 R&D 투자도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미 관련 투자 규모와 연구 인력은 증가하는 추세다. 렉라자를 비롯해 총 4개 물질이 기술수출된 상태에서 계약이 현재진행형이다. 다른 바이오텍, 제약사로부터 기술이전 받은 물질은 9개다. 이 중 지아이노베이션에서 도입한 알레르기 치료제(YH35324)와 국내와 호주에서 임상 1상을 진행 중인 면역항암제(YH32367)가 유력한 ‘제2의 렉라자’로 꼽히며 집중 투자를 받고 있다.
렉라자 개발에 성공한 경험으로 내부에선 후속작 개발에 대한 자신감이 붙은 상태다. 무엇보다 10여 년에 걸친 렉라자 개발 과정에서 J&J와 협업하며 쌓은 노하우와 R&D 프로세스 혁신이 자산이 되고 있다.
조욱제 유한양행 대표는 “올해 수익 구조 안정화와 함께 신약개발 등 핵심 과제에 대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성과를 조기 창출할 것”이라며 “이를 통해 확보된 재원을 바탕으로 연구개발에 재투자하는 선순환구조를 확립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