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취임 8일만에 38건 행정명령 서명
한미 FTA 재검토, ‘바이든 정책 지우기’ 등
한국 경제 영향 커 “협상 지렛대 마련해야”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들이 쓰는 [경제뭔데] 코너입니다. 한 주간 일어난 경제 관련 뉴스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서 전해드립니다.한미 FTA 재검토, ‘바이든 정책 지우기’ 등
한국 경제 영향 커 “협상 지렛대 마련해야”
행정명령에 사인하는 트럼프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 임기 첫 일주일이 한국 기업의 운명을 좌우할 것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기 직전 한 기업 관계자는 이같이 말했습니다. 다른 나라 대통령의 취임인 만큼 한 발짝 물러서 볼 수도 있지만,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무차별 관세 부과 으름장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까지 한 상황인 만큼 기업 입장에선 걱정할만한 상황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일(현지시간) 취임했습니다. 그러니까 31일 기준으로 하면 이제 겨우 열흘 정도 지났습니다.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트럼프 대통령 또는 트럼프가 지명한 인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한국 경제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형국입니다.
“전광석화 같은 행정명령”
한국 관세 언급 아직은 없어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이후 8일간 서명한 행정명령만 38건에 달했습니다. 취임 첫 한 달 간 12건의 행정명령에 서명한 트럼프 1기 행정부는 물론, 부시 행정부(7건)·오바마 행정부(15건)·바이든 행정부(32건)를 크게 웃도는 규모입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를 “전광석화”라고 평가했습니다.
의외로 ‘신중 모드’인 부분도 있었습니다. 전 세계가 가장 우려했던 보편 관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과정부터 모든 외국 수입품에 10∼20%의 보편 관세를 물리고, 중국산 제품에는 6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대미 수출 의존도가 큰 나라는 말 그대로 날벼락인 상황인 셈입니다. 산업연구원은 보편 관세 부과 시, 한국의 대미 수출액은 최소 9.3%에서 최대 13.1%까지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은 일부 국가에 대해서는 관세 부과를 예고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2월 1일부터 멕시코와 캐나다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한데 이어 중국도 10% 관세 부과 방침을 밝혔습니다. 최근에는 유럽연합(EU)에 대해서도 관세 부과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불법 이민자 송환을 거부한 콜롬비아는 이미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위협’에 백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아직 없지만,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일에 무역적자 원인 조사와 무역 상대국들과 체결한 기존 무역협정 재검토 등을 조사해 4월 1일까지 권고안을 내라고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기준, 한국은 미국의 8대 무역 적자국인 만큼 트럼프의 시야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멕시코와 캐나다 사례를 유추해 볼 때 보편관세 부과 후 양자 간 FTA 협상을 통해 일부 품목에 대한 관세율을 조정하는 경로도 상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LG에너지솔루션 미국 애리조나 공장 조감도. LG에너지솔루션 제공
반도체 보조금 축소 여부 주목
‘바이든 정책 지우기’도 한국 경제에는 리스크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전기차 의무 구매 명령을 폐기하는 ‘미국 에너지 활성화’ 행정명령에 서명했습니다. 한국 기업에 당장 영향을 미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생산 보조금 축소는 없지만, 전기차 의무 구매 폐지는 시장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타격은 불가피할 전망입니다. IRA 전면 폐기는 반대하는 공화당원들이 있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지만, 법안이 폐기되지 않더라도 세액공제 수혜요건을 까다롭게 변경하는 등 지원 규모를 축소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우려를 반영해 전기차 관련 주가도 출렁이고 있습니다. 지난달 20일에 주당 37만5000원이었던 LG에너지솔루션 주가는 31일 기준 35만원까지 떨어졌습니다. 같은 기간 삼성SDI 주가도 24만3500원에서 22만500원으로 하락했습니다. 증권사들도 트럼프 취임 이후 정책 리스크 확대로 이들 업체의 목표 주가를 잇달아 낮추고 있습니다.
최근 ‘반도체 보조금’ 재검토를 시사하는 발언도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습니다.
미국 반도체 보조금의 지원 대상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포함됐습니다. 당장 이들 기업에 불똥이 튈 전망입니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는 삼성전자는 지난해 12월 미국 상무부와 47억4500만 달러(약 6조9000억원)의 직접 보조금을 지급하는 계약을 최종 체결했습니다.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인공지능(AI) 메모리용 어드밴스드 패키징 생산 기지를 건설키로 한 SK하이닉스도 미 상무부로부터 최대 4억5800만 달러(약 6639억원)의 직접 보조금을 지급 받을 예정입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산업·무역 정책을 총괄할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 지명자의 발언으로 기업들은 불똥이 튈까 걱정입니다. 러트닉 지명자는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반도체법 보조금을 받기로 미국 정부와 확정한 계약을 이행하겠냐는 질문에 “말할 수 없다. 내가 읽지 않은 무엇을 이행할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이미 확정한 계약인데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죠. 혹시라도 이미 지급이 결정된 보조금이 줄면 기업 입장에선 공장 착공이나 생산 지연, 투자 일정 등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습니다. ‘트럼프 리스크’로 인한 불확실성이 커지는 셈이죠.
이같은 흐름에 입법조사처는 미국 현지에 통상외교 협상을 전담하는 ‘통상협력대사’(가칭)을 임명하고 적극적인 외교 활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대중국 견제를 강화할수록 한국과 일본의 역할 확대를 요구할 수 있으므로 이를 지렛대 삼아 협상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민간경제연구소의 제언도 나옵니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여러 자리에서 “트럼프 행정부 정책에 대한 초기 대응이 중요한 만큼 앞으로도 신속하게 동향을 파악하고 대응 방안을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 직후부터 리더십 공백 상태인 점을 고려하면 권한대행 체제로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웃나라인 일본에선 2월 7일 이시바 시게루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조율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트럼프와 협상을 해야 할 골든타임을 놓쳐 기회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