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 때 한양 대화재를 겪자, 세종은 금화도감을 설치해서 화재로 고통받는 백성과 재산 피해가 없도록 조치했다.
한양 대화재는 방화로 인명 피해가 32명 이상, 민가 약 2400여채가 소실된 큰 사건이었다. (방화범들은 전원 능지처사, 가족들 중 남성은 교형에 처해지는 중벌이 내려졌다.) 




한양 대화재 때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냐면 때마침 세종과 세자가 사냥과 군사훈련의 목적을 지닌 "강무"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 가던 중이었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소헌왕후가 진두지휘해서 화재 피해를 줄이고 종묘에 불이 옮겨 붙는 것만은 저지하며 불을 껐다.

따라서 금화도감은 한양 대화재의 피해를 되새기며 향후 발생할 화재를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한 세종의 후속조치였다. 금화도감은 화재 방지와 개천과 하수구의 수리 및 소통을 담당하고, 화재를 이용한 도적들을 색출하였다.
이후 금화도감은 도성 관리를 맡던 성문도감과 합쳐져 수성금화도감이 되었다. 수성 금화업무 외에도 하천·도랑 소통, 도로·교량 수축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이런 수성금화도감은 세조 때 폐지되어 도성 관리 업무는 공조가, 소방 업무는 한성부가 담당하도록 분리 조치되었다. 업무도 별로 없으니까 재원 낭비 하지 말라는 취지로 폐지한 것이었다.

당시엔 세조가 필요하다고 여겼고 돈을 아꼈으니 훌륭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성종 때 화재가 발생해서 민가 수백 호가 활활 불타게 된다. 결국 조정은"아 이거 이대로 두면 위험하겠구나;;" 라고 느끼고 수성금화사라는 관청을 새로 만들었다.
성종 때 사람들은 현재 소방업무의 해이(解弛)로 화재가 자주 일어나고 도둑질을 위한 방화가 많기 때문에 금화도감을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세조가 고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세조의 조치 이후 화재 피해가 크게 발생했으니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세조 특: 자기가 나름 똑똑하고 뛰어나다고 자기 생각대로 판단해서 제도를 고침.
단점: 근시안적임. 그게 니보다 뛰어난 세종이 만든 거라는 건 생각 안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