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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이슬’ 발표 뒤 저항의 상징으로
학전 만들어 ‘앞것’ 배우·가수들 뒷받침
“돈 안 되는 일 하려” 어린이극 몰두도
김민기 학전 대표. 학전 제공

21일 세상을 떠난 김민기의 삶은 ‘저항’과 ‘뒷것’으로 상징된다. 인생 1막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항의 아이콘’이 되어 고초를 겪었고, 인생 2막에는 ‘앞것’인 배우·가수들 뒤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그들을 밝게 비추는 ‘뒷것’을 자처했다.

김민기는 서울대 미대에 진학한 뒤 그림 대신 음악에 몰두했다. 고교·대학 동창 김영세와 포크 듀오 ‘도비두’를 결성하고, 1970년 당시 청년 문화의 집결지였던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회관 ‘청개구리의 집’에서 노래했다. 대표곡 ‘아침 이슬’이 태어난 것도 이 시기다. 서울 강북구 어느 묘역의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창작자의 의도와 달리 ‘아침 이슬’은 정치·사회적 맥락을 지니게 됐다. ‘청개구리의 집’에서 만난 가수 양희은이 1971년 9월 데뷔 앨범에 먼저 싣고, 김민기도 한달 뒤인 10월 자신의 데뷔 앨범에 실었을 때만 해도 아름다운 노랫말로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유신 정권 반대 시위에서 불리기 시작하면서 돌연 금지곡 판정을 받았다. 이후 김민기는 정권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발표하는 노래마다 금지곡 딱지가 붙었다.

김민기 학전 대표. 학전 제공

대학 졸업 뒤 공장과 탄광을 다니며 생계를 꾸렸다. 그러나 음악은 놓지 않았다. 공장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리는 노동자들을 위해 축가 ‘상록수’를 만들어 불렀다. 열악한 환경의 노동자들을 보고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만들었다. 1984년 대학 노래패를 기반으로 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음반을 제작했다. 1990년 한겨레신문 ‘겨레의 노래 사업단’에 참여해 ‘겨레의 노래’ 음반을 만들고, 이를 기념하는 전국 순회공연에서 20년 만에 ‘아침 이슬’을 부르기도 했다.

이후 김민기는 새로운 길을 걸었다. 자신의 음악 인생을 정리한 4장짜리 음반을 발매하기로 하고 그 계약금으로 1991년 서울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열었다. ‘배울 학’(學)에 ‘밭 전’(田) 자를 쓴 이름을 두고 그는 “못자리 농사를 짓는 곳”이라고 말했다. 모내기할 모를 기르는 조그만 논에 빗대 나중에 크게 성장할 예술가들의 디딤돌 구실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김민기 약력.

그 뜻대로 많은 예술가가 학전을 거쳐 성장했다. 동물원·들국화·강산에·장필순·박학기·권진원·유리상자 등이 이곳에서 노래했고, 김광석은 생전 1천회 공연을 채웠다. 김민기가 연출한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4200회 이상 공연하며 수많은 배우를 배출했다. ‘학전 독수리 5형제’로 통하는 배우 설경구·김윤석·황정민·장현성·조승우를 비롯해 세계적인 재즈 가수 나윤선도 이 무대를 거쳤다. 윤도현은 1995년 ‘개똥이’로 첫 뮤지컬 출연을 했다.

공연이 흥할수록 그는 더 낮은 곳을 바라봤다. 2004년 ‘우리는 친구다’를 시작으로 ‘고추장 떡볶이’ 등 어린이극을 올렸다. 돈은 안 되지만 어린이들의 정서적 성장에 도움이 되겠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2008년 흥행 가도를 달리던 ‘지하철 1호선’을 멈추면서까지 어린이극에 몰두했다. “돈 되는 일만 하다 보면 돈 안 되는 일을 못 할 것 같아서”라고 그는 말했다.

김민기 학전 대표. 학전 제공

그는 이전부터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왔다. 어려운 형편으로 중학교도 못 가고 일터로 내몰린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야간학교를 열었고, 달동네 아이들을 위한 유아원 건립을 돕는 공연에도 기꺼이 참여했다. 지속적인 재정난에다 김 대표 건강 문제까지 겹쳐 지난 3월15일 폐관한 학전은 넉달 만인 지난 17일 어린이·청소년 중심 공연장 ‘아르코꿈밭극장’으로 재탄생했다.

학전 폐관 당시 김민기는 “좀 더 열심히, 더 많이 뛸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학전을 기억해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다”는 소회를 전했다. 그는 이제 가고 없지만, 그가 남긴 노래들과 학전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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