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현장] 거리에서 일하는 사람들
서울 마포구 망원1동에서 만난 이아무개씨가 눈에 띄는 옷으로 중무장한 채 대기하고 있다. 조영은 교육연수생

“어차피 저희는 못 쉬어요. 아이스박스에 담긴 음식물을 당일 배송하지 않아 상하면 저희가 다 물어줘야 하거든요. 어쩔 수 없이 해야죠.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서울 하루 강수량이 101.3㎜에 이른 지난 18일 오후 2시 마포구 서교동, 세차게 내린 빗소리에 바로 옆 사람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날이었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 택배 차량에 기대어 잠시 숨을 돌리는 장우빈(38)씨의 얼굴은 땀과 빗물로 젖었다. 여러 번 문을 여닫은 탓인지 택배 트럭 안쪽에도 빗물이 고였다. 장씨는 물건을 옮기느라 우산을 쓸 수 없지만, ‘박스는 젖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배송 박스들을 온몸으로 감싸며 옮겼다. “내가 젖는 건 괜찮아요. 박스가 젖는 게 제일 힘듭니다.”

기록적인 폭우로 온 도시가 물에 잠긴 날에도, 거리로 나선 이들이 있다. “먹고살기 위해서”라고들 했다. 한겨레는 세찬 비가 쏟아졌던 지난 18일 서울 곳곳에서 물건과 편지를 전달하고, 끼니와 간식을 파는 이들을 만났다.

서울 종로구 혜화역 근처에서 만난 70대 김순자씨. 새벽 6시부터 큰 우산 두 개를 세워두고 좌판과 가래떡을 굽는 화로를 뒀다. 조승우 교육연수생

서울 종로구 혜화역 주변에서 떡 파는 노점을 운영하는 70대 김순자씨는 이틀을 연이은 폭우에도 매일 같이 거리로 나섰다. 새벽 6시부터 큰 파라솔 두 개를 세워두고 좌판과 가래떡을 굽는 화로를 그 밑에 뒀다. 옆에 둔 박스에 빗물이 튀자 작은 우산도 받쳤다.

김씨는 “떡을 받아오는 곳에서 떡이 날마다 오는데 안 팔면 어떡하느냐. 힘들지만 어쩔 수 없이 팔러 나왔다”고 말했다. 근처 직장에 다닌다는 이아무개(42)씨는 “(김씨가)쉬는 날 없이 늘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1주일에 3∼4번은 떡을 사는 단골 입장에선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김씨는 “밖에서 일하는 건 마찬가지 아니냐”고 웃으며, 기자에게 따끈한 떡을 건넸다.

음식 배달 라이더인 30대 이아무개씨는 빗물에 거치대가 자꾸 흔들린다며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한 정비소를 찾았다. 눈에 띄는 형광색 옷으로 중무장한 이씨는 “비가 오면 죄다 힘들다. 앞이 안 보이고 길도 미끄럽고 빨리 가는 것도 힘들다”고 말했다. 이씨는 “비가 오는 날엔 주말 기준으로 20∼30건은 더 주문이 들어오고 ‘우천할증’이 붙기도 하기 때문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정비를 마치자마자 휴대전화에 뜬 주문을 받고 서둘러 다음 배달을 위해 출발했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주택가에서 만난 장우빈(38)씨. 몸이 비에 젖는 것보단, “박스가 젖는 게 제일 힘들다”며 온몸으로 감싸며 물건을 옮겼다. 조영은 교육연수생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만난 요구르트 판매원 ㄱ(67)씨는 우비를 입고서 비를 뚫고 이동하다가 한 건물 앞에 자리를 잡았다. 한참을 서도 손님이 오지 않자 잠시 건물 밑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기도 했다. ㄱ씨는 “아파트 단지에 가도 아무도 안 나온다. 손님도 없지만, 그냥 서 있는 거다. 그래도 일을 해야 세금도 내고 돈도 버니까”라고 말했다. 같은 일을 하는 장아무개(68)씨는 커다란 우산 두 개를 펼친 뒤 그 아래 웅크리고 있었다. 장씨는 “오늘도 아침부터 서 있었는데 통 사람이 없다”고 힘없이 말했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한 사거리 신호등 옆에서 만난 장아무개(68)씨. 거세게 내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커다란 우산을 펼치고 그 아래 서 있다. 조영은 교육연수생

서울 중구 충무로역 인근에서 만난 김정일(54)씨. 김씨는 “중요한 등기는 기다리는 분들이 있어 웬만하면 (비가 와도) 작업을 한다”며 우편물이 비에 젖지 않을까 몇번이고 챙겼다. 김채운 기자

‘벌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비가 쏟아지는 거리로 나섰으나 ‘주어진 일만큼은 잘 해내야 한다’는 마음을 전하는 이들도 많았다. 분홍색 우비를 입은 카드배달원 주명숙(58)씨는 허리춤에 두른 검은 봉지에 우편물을 주섬주섬 넣었다. 주씨는 “우편물이 젖지 않게 잘 챙겨야 해서 할 일이 더 많아진다”면서도 “나와서 활동하는 게 좋은 데다 수입도 벌 수 있으니 (폭우에도) 일을 한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 충무로역에서 만난 집배원 김정일(54)씨는 “중요한 등기는 기다리는 분들이 있어 웬만하면 (비가 와도) 작업을 한다”며 우편물이 비에 젖지 않을까, 오토바이 뒤 비닐로 덮은 우편물 박스를 연신 챙겼다.

(취재 도움 : 조영은·조승우 교육연수생)

한겨레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43489 불길 속 손자가 안고 뛰었지만…90대 할머니 끝내 사망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88 미국 조지아주 고교에서 총격사건‥4명 사망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87 [재테크 레시피] 금리 하락기에도 ‘연 5%’… 완판 행렬 신종자본증권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86 "우리도 한국 사람처럼 메이크업"…관광 상품화 된 K뷰티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85 미 조지아주 고교서 총격사건…최소 4명 사망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84 “난 전쟁 막는 사람” 트럼프 장담에도 “지금은 협상 한계” 회의론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83 주요 응급실 25곳 '나홀로 당직'‥수도권 병원도 한계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82 “보내지 말라니까”…尹 추석 선물 ‘보이콧’한 野의원들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81 응급실 진료제한 메시지 급증…전공의 이탈로 배후진료 부재영향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80 탕비실 간식 170개 중고로 판 대기업 직원… 회사 “엄중조치”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79 미 애틀랜타 인근 고교서 총격…최소 4명 사망·9명 부상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78 [단독] 한국도 비타민D 토마토 허용되나…유전자 교정 작물 규제 없앨 법 개정 추진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77 윤 대통령, 권역응급의료센터 방문…“필수 의료 지원 획기적 강화”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76 “공산주의”·“간첩” 소란 피우던 열차 승객, 승무원 제지하자…“지X하고 있네” 막말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75 장관 최초 '육휴' 썼다…고이즈미 빼닮은 40대 아들의 출사표 [줌인도쿄]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74 美 "러, 1년간 北에서 컨테이너 1만6천500개 분량 탄약 등 조달"(종합)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73 '9.5% 급락' 美엔비디아 주가 반등실패 또 하락…1.7% 더 떨어져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72 "바이든,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 불허 방침 발표 준비 중"(종합)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71 [단독] '배현진 돌덩이 피습' 10대 소년범, 심신미약에도 기소 가닥 new 랭크뉴스 2024.09.05
43470 드레싱 하던 초보의사가 기도삽관? "공보의, 군의관 투입 '응급실 뺑뺑이' 못 막아" new 랭크뉴스 2024.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