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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의 돌아보고 내다보고] 10 _ 대통령 영부인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지난 8일(현지시각)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75주년 정상회의 참석에 앞서 미국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에 도착해 도열병의 거수 경례를 받으며 공항을 빠져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의 수준에 가장 강한 영향을 미치는 행위자는 대통령이다. 그 대통령이 정치, 그너머 민주주의까지 퇴행시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선거결과나 여론조사에 아랑곳하지 않고, 보도에 따르면 여당의 당무에 수시로 개입하고, 야당과 국회를 대놓고 무시한다. 역대 이런 대통령은 없었다. 그런데 현정부 들어서는 ‘뉴 액터’가 새롭게 등장했다. 대통령 배우자다. 대통령 못지 않게 특이하다. 지금까지 그 어떤 대통령 배우자도 여당의 대표와 직접 소통하며 정무적 사안을 논의하고, 부적절한 선물 등으로 검찰수사와 야권의 특검 공세에 직면하지 않았다. 역대 이런 대통령 배우자는 없었다. 새역사다.

역사를 보면, 최고 권력자의 배우자가 강한 권력의지를 드러낸 경우가 적지 않다.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어떤 일을 결정하기 전에 항상 내게 먼저 얘기하고, 내가 그것에 관해 적절한 조언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으면 하는 거예요.” 부인 클레멘타인이 남편 처칠 수상에게 한 말이다. “나는 만약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녀에게 가장 먼저 연락해야 한다는 걸 알았죠. 왜냐하면 그녀는 어떤 방법을 쓰든 결국 알아내고 말거든요. 만약 그녀를 따돌렸다간 끝장날 수 있죠. 그녀는 모든 걸 다 알고 싶어하니까요.” ‘나’는 대통령 참모이고, ‘그녀’는 레이건 대통령의 부인 낸시다.

그럼 우리만 유난 떠는 것일까? 으레 대통령 배우자는 권력에 개입하고, 국정에 참여하는데 우리가 몰랐던 것일까? 미국의 대통령과 영부인의 관계, 행태를 탐구한 케이티 마튼이 이런 얘기를 했다. “정치가로 성공하려면 야망과 체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권력과 지위로 인해 고립된 자신을 현실세계와 연결시켜줄 믿음직한 파트너가 필요하다. 자신의 은밀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마음놓고 털어놓을 수 있고, 권력을 향한 과도한 욕망까지도 드러내보일 수 있는 절대적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 파트너로서 배우자만한 존재가 없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자신만만한 대통령들은 대체로 자기 아내를 존경할 뿐만 아니라, 아내에게 개인적·정치적 조언을 구하고 귀기울여 들었다. 대통령 부인의 ‘숨은 권력’(hidden power)은 국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파트너도 없이 대통령이 공적·사적 업무를 수행하길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생각이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그렇다. 역대 대통령의 부인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대부분 히든 파워였다. 대통령 배우자의 역할, 현대 민주주의가 직면한 딜레마 중 하나다.

한창 진행 중인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바이든의 대안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이 오바마 전대통령의 부인 미셸이다. “미국의 퍼스트레이디에게 주어지는 지침서 같은 것은 없다. 엄밀히 말해서 퍼스트레이디는 직업이 아니고, 정부의 공식 직함도 아니다. 연봉도, 정해진 의무도 없다. 대통령에게 딸린 사이드카 같은 자리일 뿐이다.” 미셸의 말이다. 그는 백악관에 들어간 뒤 퍼스트레이디의 상을 바꾼 탓에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들었던 힐러리를 만나 어떻게 처신하면 좋은지 물었다. 아픈 경험 탓인지 힐러리의 메시지는 간명했다. ‘유권자들이 선출한 것은 남편이지 내가 아니며, 웨스트윙에 퍼스트레이디의 자리는 없다.’ 미셸은 그 충고에 따라 웨스트윙 정무에 직접적으로 혹은 노골적으로 끼어들지 않으려고 각별히 주의했다. 예컨대, 오바마가 빈 라덴의 소재를 찾아낸 것 같아 쳐들어가서 찾을 수 있을 듯한데 아직 확실치 않다고 털어놓았을 때 미셸은 더 캐묻거나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다그치지 않았다. 오바마는 높은 인기 속에 퇴임했고, 미셸은 워너비가 됐다.

물론 모두가 미셸처럼 하진 않았다. 반대의 경우도 많다. 압권은 남편을 대신해 국정을 대행한 경우다. 윌슨 대통령의 부인 이디스 얘기다. 이렇게 된 데에는 윌슨의 책임이 컸다. 재임 중 이디스와 재혼한 윌슨은 결혼 전부터 이디스를 통찰력 있는 조언자로 대우하면서 국정에 참여시키고자 애썼다. 에피소드 하나. 국무장관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윌슨이 투덜대자 이디스는 경질을 권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 자리에 임명되고 싶다는 얘기도 했다. 와우~ 윌슨에게는 3명의 사생 참모가 있었다. 윌슨이 자신의 또 다른 자아라고 평가한 에드워드 하우스, 오랜 측근 조지프 투멀티, 사위 윌리엄 맥아두가 그들이었다. 안그래도 대통령의 신임을 질투하던 차에 이들이 재혼에 반대하고 나섰다. 재선에 미칠 악영향 때문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이디스는 ‘베갯잇 송사’로 이들을 윌슨으로부터 떼어냈다. 마침내 이디스는 윌슨의 정서적 동반자이자 정치적 파트너가 됐다. 이디스는 거의 모든 회의에 참여했다. “저는 당신이 소중한 한 손을 제게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역사의 페이지를 넘기는 그런 방식을 사랑해요.” 이디스의 고백이다. 이쯤에서 자연스레 누군가 떠올려진다.

그러던 차에 윌슨이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1919년 9월부터 거동이 어려웠고, 하루에 겨우 몇 분만 주의를 집중할 수 있었다. 그 때 이디스는 주치의와 짜고 핵심참모들이 아예 접근조차 못하게 차단하고 내각과 의회, 국민을 속였다. 그로부터 1921년 3월4일 물러날 때까지 무려 18개월 동안 이디스가 대통령이었다. 그동안 윌슨이 열망하던 국제연맹도 좌초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윌슨에게도 비극이었지만 이디스는 덕분에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역대 그 어떤 대통령 배우자보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퍼스트레이디!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취임 후에는 감독 역할을 한 배우자도 있다. 바로 낸시 레이건이다. 레이건의 평생 측근 마이클 디버에 따르면, 낸시가 없었다면 레이건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퇴역한 이류 배우의 두 번째 부인으로서 그녀는 레이건을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대통령으로 만들어냈다. 이런 지분이 있었기에 낸시는 이디스 이후 가장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퍼스트레이디가 될 수 있었다. 낸시에겐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 레이건 옆에 최고의 참모들을 골라 앉혔고, 문제 있는 참모들은 가차없이 쳐냈다. 그래서일까 레이건은 낸시를 ‘나의 전부’, ‘나의 영혼을 구해준 여인’으로 불렀다. 여기서도 누군가 연상된다.

이디스와 달리 낸시는 국무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았고,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웨스트윙에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었다. 그는 전화를 통해 일일이 간섭했다. 레이건의 피격 사고 뒤 낸시가 참모들에게 석 달치의 대통령 일정을 달라고 했다. 점성술사에게 불길한 날들을 물어보겠다는 게 이유였다. 레이건이 악의 제국으로 직격한 소련(Soviet Union)의 지도자가 고르바초프로 바뀌었다. 낸시는 남편을 설득해 적극적인 대화에 나서게 했다. 반대하던 국가안보보좌관은 아예 잘라버렸다. 대통령의 배우자가 냉전의 교착상태를 깨는 정책 전환을 주도한 셈이었다. 모스크바 방문 때는 광장을 걸으면서 시민을 만나자는 자신의 제안을 경호팀이 반대하자 낸시는 조용히 결행했다. 행사장에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내려 남편과 함께 거리를 활보했다. 시민들은 환호했다.

대통령 배우자의 역할에 대해 현실적인 시각이 필요한 건 옳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으라는 주문은 비현실적이다. 누가 그러겠나. 오죽하면 마튼이 이렇게 결론내렸으랴. “사실 공과 사를 혼합하는 일은 대통령 부부들에게 있어 일종의 규칙이었다. 남편이 대통령이면 아내도 대통령이다.” 그럼 다 용인?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배우자는 선출된 권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 자제하고, 제도적으로 통제해야 한다.


그나저나 힐러리는 어떻게 했기에 국민밉상이 되었을까? 도덕주의자 카터 대통령의 부인 로절린은 왜 국무회의에 참석했을까?

이철희 | 방송에서 정치평론을 하다 정치에 나서 20대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 마지막 정무수석을 지냈다. 2020년 ‘대통령 탄핵 결정요인 분석: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 비교’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인자를 만든 참모들’ ‘정치가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등의 책을 냈고,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등의 역서가 있다. 우리 정치가 어쩌다 이렇게 나빠졌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나아질 것인지 등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고자 한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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