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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곤 편집인
지난달 말 미국 대선 TV토론은 경제 이슈로 시작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추락하는 경제를 넘겨받았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전임 정부 탓’이다. 식상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바이든의 급소를 바로 찔렀다. “인플레이션이 미국을 죽이고 있다.” 미국은 수년간 고물가(최고치 2022년 6월 9.1%)를 겪었다. 1970년대 오일쇼크 이래 가장 심각했다. 트럼프 발언이 더 설득력 있게 들렸다. 바이든의 적은 건강만이 아니다. 고물가를 확실하게 못 잡으면 11월 대선에서 이기기 어렵다.

성난 민심, 영국·프랑스 여당 심판
한국, 과일·채소값 이어 집값도 꿈틀
고금리만으로 고물가 막기 어려워
정부, 명운 걸고 모든 수단 동원해야

세계 어느 나라나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물가다. 좌파냐, 우파냐는 그다음 문제다. 인플레이션을 해결하지 못한 정권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1980년 미국에서 지미 카터가 연임에 실패했다. 당시 스태그플레이션(불황 속 고물가)이 한창이었다. 물가상승률과 실업률이 모두 10%를 넘었다. 대선에서 승리한 로널드 레이건은 명언을 남겼다. “인플레이션은 노상강도처럼 폭력적이고, 저격수처럼 치명적이다.” 90년대 초 냉전 종식과 걸프전 승리를 이끈 조지 H W 부시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화려한 외치와 달리 국내에선 고물가와 저축대부조합 파산 사태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빌 클린턴은 이 약점을 파고들었다. 92년 대선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슬로건을 앞세워 역전승했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최근 수년간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 세계에 고물가가 덮쳤다. 지난해 세계 평균 물가상승률은 5.8%. 삶의 질이 나빠지자 유권자는 집권당을 심판했다. 영국은 노동당이 14년 만에 집권했다. 프랑스 총선에서 범여권이 1당을 뺏겼다. 이란에선 보수파를 제치고 개혁파 대통령이 등장했다. 이들 국가는 고물가로 민심 이반을 겪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은 고물가로 화가 많이 나 있다. 앞으로도 정권 교체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인플레이션은 국내에서도 민감한 이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79년, 물가가 18.3% 치솟았다. 오일쇼크 여파로 10~20%대 상승률이 6년째 이어졌다. 박정희 정부 몰락에 여러 원인이 있지만, 고물가를 빼놓을 수 없다. 노무현, 문재인 두 진보 정부가 정권을 뺏긴 건 부동산값 폭등을 잡지 못한 탓이 크다. 4월 총선에서 국민의힘 참패 원인으로는 ‘금 사과’로 대표되는 생활물가 급등이 꼽힌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파 발언은 성난 민심에 불을 지핀 꼴이 됐다.

고물가는 진행형이다. 6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이 2.4%로 떨어지자 정부는 “안정 흐름”이라고 평가했다. 동의할 수 없다. 그동안 너무 많이 올랐다가 멈춘 것으로 봐야 한다. 1만원짜리 냉면 한 그릇이 1만5000원까지 치솟았다가 주춤한 것을 안정이라고 할 수 있겠나. 국민을 속이는 것이다. 2021년 이후 누적 물가상승률은 14%에 달했다. 생활물가는 더 많이 올랐다. 지난달 신선식품은 11.7% 상승했다. 배는 139%, 사과는 63% 올랐다. 어느새 과일·채소값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최고 수준이다. 부끄러운 OECD 1등(저출생, 노인빈곤, 자살률, 남녀 임금격차…)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정부 대책에는 위기감이 없다. 맨날 그 소리가 그 소리다. 재정을 지원하고, 유통구조를 개선하고, 시장 감시를 강화하고…. 고금리만으로 물가를 억누르는 데 한계가 있다. 자영업자 800만 명의 취약한 경제구조에서 고금리를 고집하기도 어렵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소비자물가 상승의 30%는 농산물 때문이라고 한다. 기후위기에 따른 구조적 문제라면 재배를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사과·배를 수입하자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제언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시장을 존중하지만, 시장이 실패해 작동하지 않으면 정부가 나서야 한다. 냉면·콩국수 1만5000원? 일본보다 비싼 물가? 이건 받아들이기 어렵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52개 생필품 가격을 특별 관리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자유시장 원리를 해치고, 가격을 왜곡한다는 이유였다. 돌이켜 보면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 그 정도 오르고 그친 게 정부 개입 덕분 아니었을까. ‘임기 5년간 물가는 연평균 3.3% 상승했다. 52개 생필품은 그보다 낮은 상승률을 보였다’(이명박 『대통령의 시간』).

물가는 한번 오르면 잘 떨어지지 않는 하방 경직성이 강하다. 안정을 찾기까지 오래 걸린다. 그때까지 고통을 분담할 수밖에 없다. 공공부문은 긴축하고, 기업·농민 등 생산자도 손해볼 각오를 해야 한다. 유통업자(특히 배달앱이 문제다)는 마진을 줄이고, 소비자도 가격 인상을 감내해야 한다. 모두 조금씩 양보하면서 견딜 만한 물가 수준을 찾도록 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 사과 한 개에 5000원인데, 민생토론회 백날 해봐야 무슨 소용 있겠나. 요샌 집값도 다시 불안하다. 고물가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른 것을 아무리 잘해도 실패한 정부로 낙인찍힌다. 정부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절박하게 달려들지 않으면 정권을 잃을 것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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