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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의 작은 마을 여행ㅣ전남 순천

저전동에 크고 작은 16개 정원
골목엔 꽃·화분과 어울리는 벽화
주변 순천만 정원 ‘진한 숲내음’
선암사 오래된 해우소 ‘문화유산’
마을 전체가 정원처럼 예쁘게 꾸며져 있는 전남 순천 저전마을.

전남 순천 저전마을은 일명 ‘정원마을’로도 불린다. 집 대문 앞, 담벼락, 길모퉁이마다 작은 정원이 만들어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계절마다 다른 꽃을 심고 정성 들여 정원을 가꾼다. 골목을 따라 걸으며 이 다정한 정원들을 만나다 보면 이곳에 한 달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피어오른다.

예쁜 정원, 느려지는 발걸음

인간이 발명한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을 꼽으라면 뭘까. 증기기관, 바퀴 등이 먼저 떠오르지만, 산책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인류의 많은 지성과 철학자, 작가들이 산책을 통해 영감을 얻었고 작품을 썼다. 키르케고르는 “걸으면서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라고 했고, 니체는 “심오한 영감, 그 모든 것을 길 위에서 떠올린다”라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도 유배지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을 걸으며 ‘목민’을 생각했다.

다정한 분위기의 저전마을 골목길.

산책을 가장 좋아했던 작가로 장 자크 루소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산책을 하며 깊은 사색에 빠졌고 자기를 성찰했다. 산책을 통해 길어 올린 생각은 그의 철학적 사유로 발전했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내가 그렇게 많이 생각하고, 그렇게 많이 존재하고, 그렇게 많이 나 자신일 수 있었던 것은 혼자 걸었던 여행 중이었다”라고 했는데, 산책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과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질 수 있다는 설명일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쓴 많은 책 역시 산책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나는 산책을 하며 문장을 떠올렸고, 그 문장을 잊지 않기 위해 산책을 하는 내내 생수를 머금듯 입속에서 문장을 오물거렸던 것 같다.

앞에 쓴 이 문장들 역시 모두 걸으면서 생각한 것들이다. 나는 이 문장들이 달아날까 봐 틈틈이 걸음을 멈추고 휴대폰에 메모했다. 여름이 깊어가는 6월 마지막 주, 내가 걸은 곳은 순천에 자리한 저전동이라는 마을인데 아주 한적하고 고요한 곳이다. 낮은 지붕을 인 집들 사이로 골목길이 펼쳐져 있다. 누군가 방금 청소해 놓은 듯 깨끗한 골목, 걷다 보면 하늘 한쪽에서 날아온 새소리가 발치에 떨어진다.

저전마을 ‘숲먹거리정원’에는 다양한 푸성귀가 자란다.

저전마을 골목을 걷다 보면 유난히 꽃이 많다는 걸 느끼게 된다. 대문 앞이며 담벼락, 모퉁이마다 어김없이 꽃이 심겨 있고 화분이 놓여 있다. 한두 평 공터라도 있으면 꽃들을 심어 놓았다. 지금은 해바라기가 환하다. 꽃만이 아니다. 상추와 대파도 심었다. 그런 자리마다 예쁜 푯말이 서 있는데, ‘빗물가로 정원’, ‘한 평 정원’, ‘골목 정원’, ‘건강 정원’, ‘세모 정원’, ‘숲먹거리 정원’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골목을 돌 때마다 마주치는 이 예쁜 정원 때문에 발걸음이 느려진다.

‘남승룡 정원’과 저전성당


저전동은 ‘정원마을’로 불린다. 마을은 약 97만㎡(약 29만평)로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이 마을에 정원만 16개가 있다. 순천에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정원이 있다. 이름도 거창한 ‘순천만 국가정원’이다. 순천만 국가정원을 ‘관’이 주도해 만들었다면, 저전동 마을정원은 ‘민’이 조성했다. 2018~2022년 저전동 3·4통 일원을 대상으로 ‘비타(Vita)민(民) 저전골’ 사업을 진행했는데, 이때 마을의 공·폐가를 리모델링해 청년 공유주택과 마을 호텔 등이 들어섰고 크고 작은 정원이 곳곳에 만들어졌다.

저전마을 모퉁이에 자리한 ‘이웃사촌정원’.

마을을 걷다 보면 ‘보랏빛 향기 정원’, ‘수더분 정원’, ‘오월의 정원’ 등이 연이어 나온다. 허리를 숙여 정원에 핀 꽃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있으면 꽃 한 송이가, 화분 하나가 마을을 이토록 다정하게 채색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자기도취에 빠져 허우적대는 시끄러운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이 마을의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 속을 산책하며 며칠만 지내다 보면 삶에 대한 더 현명한 태도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골목에는 예쁜 벽화도 그려져 있다. 과한 수준이 아니고 딱 보기 좋을 만큼이다. 꽃을 보며, 벽화를 감상하며 천천히 걷다 보면 ‘남승룡 정원’과 만난다. 저전마을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3위를 차지한 마라토너 남승룡(1912~2001)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그렇게 발걸음은 저전성당에 닿는다. 100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순천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성당이다. 성당도 도시재생 사업에 참여해 높은 담장을 허물고 성당 옆길을 새로 텄다. 유휴 공간을 마을 방문객을 위한 무료 주차장으로 제공하고 있다. 성당 앞 벚나무가 흐드러지게 피는 봄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100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순천에서 가장 오래된 저전성당.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 천천히 걷다 보니 약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개천 옆에 잠깐 앉았다 가기 좋은 정자가 있는데, 정자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차가운 물을 마신다.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그렇게도 열심히 달렸던 걸까. 젊었을 때는 어딘가에 목표와 정답이 있고,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고투해 나갔던 것 같은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딱히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 같다. 지나고 보면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다. 태어나서 학교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그 과정에서 좌절과 성취감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좋은 날씨 속에서 작은 행복을 챙기며 만족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소설가 제임스 설터가 “삶은 날씨고 식사”라고 단언했던 것도 이 이유에서다.

여름꽃이 화려하게 핀 순천만 국가정원.

조금 더 걷고 싶어 순천만 국가정원으로 왔다. 저전마을에서 가깝다. 옛날부터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다. 이날 기온이 30도를 훌쩍 넘었다. 파도 소리 시원한 바다도 좋지만, 이젠 나이가 들어서일까, 진한 숲 내음을 맡으며 나무 그늘 아래를 거니는 것이 더 좋다.

순천만을 처음 찾은 것은 1998년이었다. 철새 취재차 갔다가 거대한 갈대밭에 그만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이후 자주 순천만을 찾았다. 그동안 순천만의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한때 마구잡이로 식당이 들어섰고 단체 관광객으로 어수선했던 갈대밭은 깨끗하게 정비됐으며 자연생태관이 들어섰다. 그 사이 순천만을 찾는 철새도 많이 늘어났다. ‘국가정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이 붙은 공원도 생겼다.

순천만 국가정원 서문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만난 곳은 습지공원. 여름 햇살 속에서 눈부신 색상으로 반짝이고 있었는데 마치 모네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천천히 걸어 동문 쪽으로 가 메타세쿼이아 숲길을 걷다가 다시 서문으로 나왔다. 두 시간 정도가 걸렸다. 중간에 위치한 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 연간 입장권도 팔고 있었는데, 순천에 산다면 연간 입장권을 사서 매일 아침 오고 싶을 정도였다. 짙은 메타세쿼이아 그늘 속을 걸으며 다음 책을 구상했고, 몇 개의 문장을 얻었으니 입장료 1만원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생을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꼽으라면 여행과 산책 그리고 도서관에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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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에서 절까지 팽나무·조팝나무…

고즈넉한 분위기의 선암사.

순천에는 꼭 가봐야 할 절집 두 곳이 있다. 선암사와 송광사다. 두 절은 조계산을 끼고 있는데, 동쪽 자락에는 선암사가, 서쪽에는 송광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선암사를 찾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절로, 백제 성왕 때인 529년 아도화상이 세운 고찰이다.

선암사는 절도 절이지만, 매표소에서 절까지 이어지는 숲길이 너무 좋다. 이팝나무, 서어나무, 굴참나무, 팽나무, 조팝나무, 산딸나무, 느티나무가 울창하다. 이 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몸과 마음이 깨끗하게 씻기는 기분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아치형의 다리 승선교가 있다. ‘선녀들이 승천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승선교를 지나면 선암사다. 빛바랜 기왓장, 모서리가 닳아 둥그스름해진 돌계단, 바람이 불어 풍경이라도 울리면 마음 한구석이 환해지는 느낌이 든다. 대웅전은 절 규모에 비해 그리 크지 않지만 단아한 느낌을 풍긴다. 세월의 흔적처럼 단청은 빛이 바랬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정겹다. 삼인당이라는 작은 연못과 전통 방식으로 덖은 차를 내는 찻집인 선각당도 선암사가 주는 소소한 즐거움이다.

‘선녀들이 승천한다’는 뜻을 가진 승선교의 그림 같은 풍경.

선암사의 또 다른 명물은 해우소다. 우리나라 사찰의 재래식 해우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다.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장실이기도 하다. 정호승 시인은 ‘선암사’라는 시에서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고 위로하기도 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선암사를 돌아보고 숲길을 되짚어 내려간다. 급할 것 없는 걸음이다. 이렇게 천천히, 무언가에 쫓기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걷고 있으면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든 것 같아 기분이 흡족하다. 오늘은 그냥 걸어서, 걸어서 더 좋은 하루였다. 여행은 갑자기 가는 것이 좋고, 여행에서는 정해진 것 없이 자유롭게 다닐 때가 가장 행복하다. 바다 위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노을을 바라보거나, 강물 위를 유유히 헤엄쳐 가는 백조를 바라볼 때, 담장 너머 풍성하게 핀 장미를 볼 때면 무언가를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인생의 정답 같은 건 없다. 삶을 이해만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 모든 것이 헝클어져 버리는 것이다. 다만 날씨가 만드는 장미꽃 같은 기적들이 있고, 그 앞에 잠시 멈춰 서서 경탄하고 즐길 줄 알면 되는 것이다. 오십이 넘어 이걸 겨우 깨닫기 시작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숲길 옆 개울물 소리가 귓전으로 명주실처럼 흘러들어오고, 어디선가 실바람이 불어와 격려처럼 팔꿈치를 툭 건드리며 지나간다.

여행 정보

쌍암기사식당의 김치찌개.

선암사 앞에 장원식당(061-754-6362), 길상식당(061-754-5599), 선암식당(061-754-5232) 등 산채를 내는 집들이 있다. 선암사 가는 길 쌍암기사식당(061-754-5027)과 진일기사식당(061-754-5320)도 백반을 푸짐하게 차려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쌍암기사식당은 뷔페식으로 바뀌었다. 순천 웃장은 1920년 조성된 전통시장. 웃장의 국밥집들은 선술집 형태로 운영하다가 언제부터인가 순천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제일식당과 향촌식당, 쌍암식당, 황전식당, 순복식당, 백가네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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