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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의 요즘 어디 가ㅣ 천리포수목원

오후 6시30분 시작 ‘노을 산책’
바닷바람 맞으며 전문가 해설
붉게 물든 해거름으로 마무리
해 질 녘 천리포수목원에 있는 ‘노을 쉼터’에서 보이는 낭새섬. 지역민들은 닭볏처럼 생겼다고 해서 ‘닭섬’이라고 부른다.

나뭇가지는 하늘 향해 위로만 뻗을까. 그렇게 생각되지만 사실과 다르다. 나뭇가지는 아래로도, 옆으로도 뻗는다. 충남 태안에 있는 천리포수목원에는 땅을 향해 뻗은 나뭇가지들이 있다. 여느 숲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이는 천리포수목원의 창립자 민병갈(1921~2002, 본명 칼 페리스 밀러) 원장의 철학이 빚은 풍광이다. 그가 살아생전 입에 달고 산 말이 있다. “나무의 눈으로 (수목원이나 숲을) 보고, 나무가 자라는 대로 두며, 사람이 보기 좋게 하기 위해 가지를 잘라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인위적으로 자르지 않은 가지는 때로 땅을 향해 뻗는다. 이는 스스로 선택한 생명유지책이다.

한국 숲 역사에 이정표를 남긴 민 원장은 한국에 귀화한 미국인 1호다. 그가 전 재산을 털어 평생을 일군 천리포수목원은 이제 쉰살을 훌쩍 넘겼다. 사람으로 치면 중장년인데, 수목원은 팔팔한 청년보다 더 짙은 녹음을 자랑한다. 전체 면적은 대략 59만㎡인데, 이중 일반에 공개된 밀러가든은 약 6만5천㎡ 정도다. ‘파란 눈의 나무 할아버지’가 세운 원칙과 자연 친화적인 관점은 지금도 지켜지며 매년 다채로운 프로그램들로 거듭나고 있다. 수목원이 지난달부터 처음 운영을 시작한 ‘가드너와 함께 걷는 노을 산책’(이하 노을 산책)도 그중 하나다. 오후 6시 수목원이 문을 닫으면 시작되는 프로그램이다.

폭염의 습격을 피해

땅 쪽으로 가지를 뻗은 나무.

지난달 15일 오후 6시30분. 천리포수목원 매표소 앞에 도착했다. 사전 예약으로 ‘노을 산책’을 경험하려는 15명이 모였다. 강희혁(31) 식물연구원이 나타났다. 이날 해설과 안내를 맡은 그는 식물 연구 경력만도 7년 차인 베테랑이다. 수목원 전체 직원 40여명 중 15~20여명이 해설 업무를 병행한다. 강 연구원은 “낮 더위에 수목원 여행을 꺼리시는 분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했다. ‘수목원 야간개장’인 셈인데, 맹렬한 폭염의 습격도 무력화시킬 만큼 근사한 피서 여행이 될까.

이날 수목원 문이 다시 열리자 어디선가 밤 마중 나온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1970년 처음 공개한 때부터 자란 나무들이 반겼다. 과거 이 일대는 세찬 바닷바람 때문에 인간이 생존하기도 버거울 정도로 휘청거렸다. 지금은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바닷바람을 막아주며 인간의 친구가 됐다. 목련꽃이 필 무렵이면 수목원은 화려한 꽃 세상이 된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목련 품종을 보유한 수목원이다. 수목원이 처음 목련을 심은 때는 1972년. “당시 많은 꽃을 심었는데, 그중에서 유독 목련이 잘 자랐다고 합니다. 지금은 920종 목련이 피고 지죠.” 그가 연못으로 안내하며 말을 이었다.

“이 지역은 물이 귀했죠. 식물들 생존에 필요한 물을 주기 위해 팠던 연못입니다.” 관람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종유석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것을 가리키며 퀴즈를 냈다. 바로 옆에는 너른 그늘을 드리운 나무가 서 있다. “땅에서 튀어나온, 이 이상하게 생긴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궁금증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낙우송 뿌리예요. 습지에서 호흡하기 위해 나무가 스스로 만든 겁니다.” 외계 행성 돌부리처럼 보였던 그것은 강한 생명력의 증표였다. 이때 짠맛을 품은 바람이 몇 자락 휙 지나갔다. 바람은 햇살 가득한 아침처럼 상쾌했다. 모두의 얼굴을 쓰다듬고 멀어져갔다.

이날 태안의 최고 기온은 29도, 서울은 30도였다. 저녁나절이라고 해도 그 열기가 쉽게 사라지진 않을 터. 하지만 어째 더위에 까무룩하는 이가 없었다. “여긴 봄이 가장 늦게까지 머물고 여름은 내륙보다 늦게 오죠. 내륙보다 기온이 낮습니다.” 수목원을 걷는 내내 등줄기에 땀 한 방울도 맺히지 않은 이유였다. 찬 음식을 먹거나 시원한 물속에서 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피서법이 수목원 ‘식물여행’인 것을 여행객들은 그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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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경험 ‘숲에서 하룻밤’

강희혁 연구원을 따라 수목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여행객들.

설립자가 사무실로 썼던 한옥 건물에 이르자, 어느 틈에 해무가 달려와 똬리를 틀었다. 푸른 나무와 회색빛 안개는 서로를 애무하듯 스며들었다. 이내 하나가 되었다. 소담한 논도 보였다. 수목원 안에 있는 논이라, 신기할 따름이다. 설립 때부터 있던 논인데, 지금은 초등학생 체험 학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생산되는 쌀은 직원용 끼니로, 기념품으로 팔린다. 강 연구원은 올해부터 오리농법을 도입했다고 했다. 그가 한 집을 가리켰다. 집 문패엔 ‘천덕 꾸러기네’라고 적혀있었다. “천리포수목원이 키우는 ‘덕’(오리)이란 뜻입니다.” 센스 넘치는 ‘오리 축사’ 작명에 웃음꽃이 폈다. 이내 안개나무, 호랑가지나무, 노루오줌, 멀구슬나무 등 다양한 식물 설명이 이어지자 여행객들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이 몰랐던 ’나무의 세계’에 경외감이 든 것이다.

“같은 식물이라도 시간대마다 그 모습이 다릅니다. 우리는 주로 꽃구경하려고 식물원이나 정원을 찾죠. 진짜 식물원 여행은 ‘나무’를 살피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꽃 필 때만 밀물처럼 몰렸다가 잎 떨어지면 썰물처럼 사라지는 여행객들의 태도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진짜 ‘식물 여행’의 감동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가 느닷없이 또 물었다. “목련의 뜻을 아시나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색이 예쁘다”만 외쳤던 우리였다. “‘나무에 피는 연꽃’이란 뜻입니다.” 다들 배시시 웃는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는데, 놓친 게 아쉽다’는 표정들이었다.

어느 틈에 해거름이 빨라졌다. 이날 일몰 시각은 오후 7시56분. 강 연구원의 안내로 도착한 ‘노을 쉼터’에선 무인도 낭새섬이 보였다. 일본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섬처럼 보였다. 이 섬은 수목원 소유로, 자생상록활엽수 복원지다. 지역민들은 닭벼슬처럼 생겼다고 해서 ‘닭섬’이라고 부른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낭새섬에 붉은 노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동전만 한 해가 시시각각 떨어지면서 붉은 색칠을 했다. 여행자들은 너도나도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광에 여행자들의 가슴은 뛰었다. 이날 고등학교 1학년 딸과 여행하면서 ‘노을 산책’에 참가한 김은숙씨는 “‘이런 풍경이 우리나라에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런 숲을 지켜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의 딸 장수아양은 “비슷비슷한 식물들인 줄 알았는데, 장소마다 다르다는 걸 알았고 정말 신기하다”고 말했다. 다른 참가자는 “낮에도 다녀갔는데, 설명을 들으니 낮에 뭘 봤나 싶고 완전 다른 곳이란 생각이 든다”고 했다.

천리포수목원은 다른 식물원과 달리 ‘숲에서 하룻밤’이 가능하다. ‘가든하우스’와 ‘에코힐링센터’를 운영한다. ‘가든하우스’ 8채는 수목원 안에 있다. 숙박 다음날 미공개 구역 투어를 신청할 수 있다. ‘비밀의 숲’이 열리는 셈이다. 후원회원에게 30% 할인이 적용된다. ‘에코힐링센터’는 수목원 바로 앞에 있는데, ‘가든하우스’ 이용료보다 대략 50% 저렴하다. ‘노을 산책’은 오는 8월 말까지 운영한다.(입장료 포함 2만원, 후원회원은 1만원)

노을과 나무의 속삭임, 새들의 인사. 지상에 안착한 천국이 따로 없다. 세상 격랑도 이곳에선 힘을 못 쓴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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