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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메지마섬에서 일본군 수비대가 주민 20명 살해…7명은 조선인 가족
실재 인물 구중회 ‘스파이’로 몰려 희생당하는 과정 소설화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상상하고, 쓰고 싶지 않은 것을 써야 했다”
김숨 작가는 최근 1945년 발생한 ‘구메지마 수비대 주민 학살 사건’을 다룬 장편소설 <오키나와 스파이>를 펴냈다. 백다흠 제공


오키나와 스파이|

김숨 지음 |모요사|396쪽 |1만9000원

“모르던 오키나와, 모르고 싶었던 오키나와.” 김숨 작가는 최근 출간한 장편소설 <오키나와 스파이>를 두고 “‘소설화할 수 없는, 하고 싶지 않은’ 기록”이었다고 토로한다. <오키나와 스파이>는 1945년 태평양 전쟁 시기, 오키나와 본섬에서 서쪽으로 100km 떨어진 섬 구메지마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구메지마 수비대 주민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당시 일본군 수비대장 가야마 다다시의 지휘 아래 20명의 주민이 무참히 살해됐다. 이 20명의 희생자 중 7명은 조선인 구중회와 그의 가족들이었다. <오키나와 스파이>는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실재 인물인 구중회를 모델로 한 ‘조선인 고물상’과 그의 가족들이 무고하게 희생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소설은 구메지마에 주둔 중인 일본군 총대장 기무라의 명령으로 ‘인간 사냥꾼’이라 불리는 10대 섬 소년들이 9명의 주민을 무참히 학살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들에게는 미군에게 납치됐다가 풀려났다는 이유로, 혹은 풀려난 이들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파이’ 누명이 쓰인다. 구체적으로 묘사된 학살의 장면들은 읽어내기 쉽지 않다. “오늘 밤 섬 어디에도 인간은 없다” “오늘 밤 섬에는 대대로 이어 내려온 윤리 규범이 완전히 잊혀 무시되고 기무라 총대장의 명령만 있다”라는 문장처럼 전쟁의 한복판, 군국주의의 잔악한 얼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군은 섬 전체가 “스파이로 우글우글하다”라며 주민들을 잠재적 스파이로 간주했고, 패색 짙은 전쟁에 대한 분풀이 대상도 필요했다. 섬사람들은 우리 중에 누가 스파이인지, 다음 처형 대상은 누구인지, 혹시 그 대상은 자신이 아닐지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짓눌린다. 주민들은 희생자들의 유해가 바람에 쓸려 나는 소리를 귀신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정말로 무서운 건 살아 있는 인간이 내는 발소리다. 인간 사냥꾼들의 발소리. 그는 자신의 집 앞으로 지나가는 모든 발소리가 인간 사냥꾼들의 발소리로 들린다”라며 학살의 공포에 휩싸여 있다.

주민들 일각에서는 자신들이 스파이로 지목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리고 그 대상은 식민지 위계질서의 최약자였던 ‘조선인 고물상’을 향해 간다. 당시 오키나와에는 본토 일본인, 오키나와인, 조선인들의 순서로 서열이 매겨졌고, 이에 따른 차별과 혐오가 만연했다. 오키나와 아이들은 스파이 사냥꾼 놀이를 했고, 이들은 조선인 고물상의 아들을 매번 스파이로 지목하며 폭력의 대상으로 삼았다. 스파이 의혹은 점점 조선인 고물상을 조여오고 그와 그의 가족들은 호소할 곳도 도망칠 곳도 의지할 곳도 없이 불안과 공포에 시달린다. 소설은 처음처럼 끔찍한 비극으로 치닫는다.

<오키나와 스파이>. 모요사 제공


소설은 전쟁의 한복판, 군의 끔찍한 폭력이 자행되는 공간에 놓여 있던 다양한 인물 군상들을 그려낸다. 어린 아기까지 학살한 것에 대해 “주민들이 스파이로 밀고한 자들을 처형”했을 뿐이라는 기무라는 악인의 잔혹함과 뻔뻔함을 보여준다. 군이 학살의 도구로 이용한 ‘인간 사냥꾼’들은 집단적 광기에 휩싸인 인간을 그려낸다. 조선인 고물상을 혐오해 눈엣가시로 여기며 그를 사지로 내모는 사토는 교활한 인간의 전형이다. 한편에서는 군인들이 조선인 고물상을 죽이러 간다는 것을 미리 알고 그에게 도망치라고 알려주는 다마키,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인 고물상과 그의 아들을 숨겨주는 사네요시 등 잔혹한 폭력 속에서도 상실되지 않은 인간성을 보여주는 이들도 등장한다.

작가는 당시 기록과 참고자료, 수차례에 걸친 현지 취재를 토대로 참혹한 학살의 현장과 전쟁의 광기가 짓눌렀던 당시의 역사를 재현한다. 그는 “너무도 분명한 악과 악행과 악인을 상상하는 것이, 쓰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소설을 어떻게든 끝맺기 위해서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상상해야 했고 쓰고 싶지 않은 것을 써야만 했다”라고 말한다. 가차 없이 드러난 인간의 잔혹함, 희생자들이 겪었을 구체적인 고통, 숨 막히듯 조여오는 군국주의 광기의 재현을 마주하는 일은 독자 또한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절망과 인간성에 대한 회의 끝에 선명히 남는 것은 숫자가 아닌 구체적인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 전쟁의 비인간성에 대한 절실한 각성이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서경식)의 일부를 인용한다. “무시무시한 정치 폭력의 세기였던 20세기가 끝나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세기(20세기)에 일어난 일이, 두 번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 다음 세기에도 인류는, 자신들의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증명하게 될까. 내 전망은 비관적이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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