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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영빈관에서 열린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및 역동경제 로드맵 발표\' 회의에서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 등에 관해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제공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상법 개정 땐…30대 기업 중 29곳의 이사회, 외국 투기자본에 뚫릴 수도”

2020년 9월 <조선일보>의 상법 개정에 반대하는 기사 제목이다. 당시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법개정을 추진했다. 경영진을 감시·견제하는 감사위원의 독립성을 높이기 위해 최소 1명 이상을 다른 사외이사와 분리선출하고, 최대주주(특수관계인 포함)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재계와 보수언론은 외국 투기자본에 의한 기업 경영권 침해가 우려된다며 격하게 반발했다.

이런 반대를 뚫고 법개정이 이뤄진지, 4년이 흘렀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우려한 일이 벌어졌다는 얘기를 들은 바 없다. 애초부터 수많은 외국 투자자가 하나로 뭉쳐 지배주주와 표대결을 벌인다는 가정 자체가 비상식적이었다. 자본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국민을 상대로 거짓선동을 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최근 재계와 보수언론이 다시 상법개정 저지에 나섰다. 윤석열 정부는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 해소를 위한 투자자 보호 차원에서 법개정을 추진 중이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이익)로 확대하는 내용이다. 한경협·상의 등 8개 경제단체는 법개정 반대 건의서를 정부·국회에 제출했다. 보수언론도 맞장구친다.

재계와 보수언론의 반대 논거는 일견 그럴듯하게 보인다. 하지만 4년 전과 마찬가지로,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왜곡으로 점철된 엉터리 주장에 불과하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했으니, 가장 핵심적인 주장을 살펴보자. “회사이익과 주주이익을 별개 개념으로 병렬적으로 규정한 해외 입법사례가 없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위배된다.” 이 주장은 ‘팩트’부터 틀렸다. 법제처 산하 세계법제정보센터 누리집 검색창에 ‘델라웨어주 회사법 102조’만 입력하면 바로 확인 가능하다. 회사법의 모범으로 불리는 미 델라웨어주 회사법은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이익을 포함하지 않는 국가들도 있다. 나라마다 법제도가 상이한 것은 환경이나 조건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상법개정 여부는 우리경제 현실에 대한 인식에 달렸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된 원인이 후진적 기업지배구조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 그 중심에 지배주주의 이익을 위해 일반주주에 손해를 끼치는데도 이사가 제대로 감시·견제 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는 데도 대부분 동의한다.

최근 한화에너지의 ㈜한화 지분 8% 공개매수를 둘러싼 논란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공개매수의 목적은 총수 아들이 100% 지분을 가진 한화에너지를 통해 총수 아들→한화에너지→㈜한화→다른 계열사로 이어지는 경영권 승계구도를 완성하는 것이다. 소액주주들은 3만원의 공개매수 가격(4일 종가에서 8% 할증)이 낮다고 반발한다. 근본원인은 PBR(주가÷주당순자산)이 0.28%에 불과할 정도로 주가가 저평가된 점이다. 승계작업을 위해 주가를 의도적으로 낮게 관리했다는 주장이 맞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게 있다. 지배주주로서는 총주주수익률(주가상승률+배당금수익률)을 높일 유인이 작고, 이사회가 전체 주주보다 지배주주의 이익에 더 충실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이런 터에 재계가 지배주주를 위한 경영권 보호장치 강화를 요구하는 것은 더욱 기가 찰 일이다. 재벌 총수일가는 지금도 절대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지배주주 보유주식에 1주당 여러개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복수의결권’이나, 적대적 인수합병 직면 시 기존주주가 싼값에 지분을 인수할 수 있는 ‘포이즌필’까지 허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총수의 지배권은 더욱 철옹성이 되고, 지배주주의 이익을 위해 일반주주의 이익을 훼손할 잠재적 위험성은 더 커질 것이다.

재계와 보수언론의 상법개정 반대는 성공했다. 정부는 최근 ‘기업밸류업’ 지원대책에서 상법개정을 쏙 빼버렸다. 대신 상속·증여세 할증평가 폐지 등 지배주주 부담을 낮추는 방안을 포함시켰다. 대통령이 연초부터 직접 불을 지피고, 부총리와 금감원장까지 공개적으로 추진 의지를 밝힌 사안이 이렇게 흐지부지되다니, 할 말을 잃게 한다. 세수부족 심화와 부자감세 논란은 차지하더라도, 정말 국민을 우롱하자는 것인지 묻고 싶다.

코로나19 이후 개인투자자가 급증하며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에 육박한다. 동학농민운동에 빗대어 ‘동학개미’로 불리는 이들의 정치적 힘이 밸류업 정책을 이끌어낸 원동력이다. 경고한다. 재계와 보수언론, 정부여당이 1400만 주식투자자를 계속 ‘호구’로 취급하다가는 큰 코 다칠 것이라고. 상법 개정에 찬성하는 민주당도 말로만 민생을 외치지 말고,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 문재인 정부 때 여당으로서 상법 개정안까지 발의하고도 뭐했느냐는 지적이 뼈아프지 않은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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