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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지대 탈북민 2세들]
나의 이름은 김민영(가명)입니다. 나이는 스물 한 살. 내가 한국에서 민영이로 살게 된 것은 1년 남짓밖에 되지 않습니다. 스무 살까지 나는 중국 랴오닝성에서 장웨이(가명)로 살았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했고, 중국에서 아버지를 만나 나와 동생을 낳았습니다.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인 김민영(가명)씨가 갈빗집 주방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 올해 스물 한살인 김씨는 지난해 4월 중국을 떠나 한국에 입국해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우리들학교 제공
중국에서 어머니는 불법 체류자였습니다. 언제 공안에 잡혀 북한으로 끌려갈지 모른다며 불안에 떨며 지냈습니다. 긴 시간을 숨고 숨다가, 강제북송 위기를 겨우 한 번 넘긴 뒤 내가 17살 때 어머니는 한국으로 갔습니다.

구사일생으로 한국에 도착한 어머니가 우리를 데려오기까지는 3년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 아버지가 암에 걸렸고, 어머니는 치료비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투병 끝에 돌아가셨고, 간병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나는 동생과 함께 지난해 한국에 왔습니다.

평생 살아온 중국을 떠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한국행 선택에 망설임은 없었습니다. 중국에서도 나는 탈북민의 딸, 한국인이었으니까요. 한국 국적을 택하고, 민영이라는 한국 이름을 갖게 된 건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탈북민 정착지원 기관인 남북하나재단의 지원을 받는 서울 관악구 소재 대안학교인 우리들학교에서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 청년들이 윤동주 교장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있는 모습. 우리들학교 제공
하지만 한국인들은 나에게 중국인이라고 합니다. 한국말이 아닌 중국말을 한다고, 전철에서 나를 위협하는 어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내가 탈북민이 아니라고 합니다.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내 어머니가 북한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내가 태어났는데, 한국의 법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나는 이런 나의 조국이 낯설기만 합니다.

지난 4일 서울 관악구에 있는 '우리들학교'에서 만난 민영씨의 이야기다. 우리들학교는 북한이탈주민(탈북민) 정착지원 기관인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의 지원을 받는 자율형 초·중·고 통합 대안학교다.

민영씨는 헌법상 우리 국민인 탈북민의 딸이기 때문에 태어난 순간부터 한국 국적자이지만, 어머니처럼 탈북민 지위를 인정받지는 못한다. 현행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은 '북한에 주소 등을 두고 있으면서 북한을 벗어난 사람'만 탈북민으로 보기 때문이다. 민영씨같은 이들은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로 불릴 뿐이다.

탈북민이 아니기에 국가가 제공하는 최소한의 지원이나 보호도 받을 수 없다. 언어 장벽, 정체성 혼란 등으로 인해 다른 탈북민에 비해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은 훨씬 더 크다.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는 길'에서 태어난 축복 같은 존재지만, 역설적으로 북한이라는 지옥에서 태어나지 않은 대가를 이렇게 치르고 있는 셈이다.

김영옥 기자
고된 탈북 과정에서 탈북민의 제3국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이제 민영씨처럼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경우가 북한에서 태어난 탈북민 자녀의 수를 훌쩍 넘어섰다. 하지만 민영씨는 "한국과 중국, 두 나라에서 모두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처음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오는 14일 '북한 이탈주민의 날'을 앞두고 '낯선 조국'에서 외면당하는 수많은 민영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민영씨는 인천 청라에서 2시간 가까이 버스와 지하철을 두 차례 갈아타고 학교에 온다. "대안학교라도 다닐 수 있어서 너무 좋고 다행"이라며 "선생님들께서 고생하시는 것을 아니까 절대로 지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들은 '월요병'이 힘들다지만, 민영씨는 월요일 등교할 때가 가장 즐겁다. 월·화·수요일에 학교에서 국어와 영어 등을 배우기 위해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하루에 6시간씩 갈빗집 주방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한다.

민영씨같은 제3국 출생 청년들의 '코리안 드림'은 거창한 성공이 아니다. '한국어를 잘 할 줄 알면 주방 설거지가 아니라 편의점 카운터 알바도 할 수 있을텐데….' 평범한 일자리를 얻어 생계를 꾸리고, 제 몫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게 당장의 희망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소수의 약자인 탈북민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의 출발선은 훨씬 뒤쪽에 그어져 있다.

통일부에 따르면 국내에 입국하는 탈북민은 1인 세대 기준 1000만원의 정착기본금을 받는다. 2~4인 세대 기준으로는 1600만원~2600만원을 받을 수 있다.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는 이런 정착금을 받을 수 없다. 제3국 출생 자녀 1인당 450만원(2인까지)의 양육 가산금을 지원하는 것이 전부인데, 이마저도 자녀가 만16세 미만이어야 가능하다. 민영씨처럼 다 커서 한국에 온 경우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탈북민 정착지원 기관인 남북하나재단의 지원을 받는 서울 관악구 소재 대안학교인 우리들학교에서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 청년들이 윤동주 교장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있는 모습. 우리들학교 제공
주거·취업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 민영씨만 해도 13평(42㎡)짜리 임대주택에서 어머니 그리고 두 살 터울인 남동생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정부는 2~4인 탈북민 세대의 경우 2000만원의 주거 지원금을 지급한다. 이 돈이면 조금 더 큰 곳에 살 수도 있지만, 법적으로 탈북민 지위를 인정받은 건 민영씨의 어머니 한 명이기 때문에 1인 기준인 1600만원의 지원금만 받을 수 있다.

실제 제3국 출생 자녀를 둔 탈북민 가정의 경우에는 1인 기준 임대주택에서 4~5명이 생활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들학교에서 만난 스물 한살의 청년 최지훈(가명)씨도 청소년기로 한창 예민한 두 여동생, 어머니와 넷이서 13평짜리 임대주택에서 살고 있다.

어렸을 때 입국해도 교육 지원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한국어를 배울 기회를 찾기 어렵다. 2016년 12살 때 한국에 온 스무 살의 청년 박장군(가명)씨는 한국 생활이 어느덧 8년이 넘었지만, 체계적으로 한국어를 배운 기억이 없다. 지금도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만 가능하다.

장군씨의 탈북민 어머니는 한국에서 다른 남성과 재혼해 중국인 아버지와 원룸에서 둘이 살고 있다. 아버지는 한국인이 아니라서, 장군씨는 탈북민이 아니라서 별도의 지원은 받지 못한다. 그는 "아버지가 몸도 편찮으신데 일당을 벌고 계시다"며 "나도 공부하면서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중국에서 썼던 원래 이름을 묻자 "나는 지금 내 (한국)이름이 좋다"며 웃었다. 중국 이름은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인 이승민(가명)씨가 중국요리집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 올해 스물 네살인 이씨는 지난해 6월 중국을 떠나 한국에 입국해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우리들학교 제공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는 병역의 의무도 이행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북한에서 태어난 탈북민은 군 복무가 면제된다. 한국 사회에 적응이 어렵다는 걸 배려한 조치다. 하지만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에는 어떤 면제 사유도 적용되지 않는다.

중국 산둥성에서 살다 지난해 6월 입국한 스물 네살의 청년 이승민(가명)씨는 다음달 광주광역시의 한 육군 부대로 입영 통지를 받았다. 신체검사도 어머니가 도와줘서 겨우 받았다는 그는 군 복무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군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다. "군대에서 명령을 내려도 한국말이기 때문에 나는 이해하지 못 할 텐데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병무청은 "단순히 한국어를 못하는 것은 면제 사유인 질병·심신장애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언어 등의 이유로)군 복무에 지장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입영 일자를 조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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