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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사와 에이이치 모습이 삽입된 일본 1만엔 신권 모습. 사진=일본은행


일본 지폐의 얼굴이 바뀌었다. 지난 3일 1만 엔권, 5000엔권, 1000엔권 지폐 속 초상이 새로운 인물로 교체됐다. 일본의 신권 발행은 2004년 이후 20년 만이다.

2004년엔 5000엔권과 1000엔권 초상만 바꿨다. 이번엔 40년 만에 얼굴이 바뀌는 최고액권인 1만 엔권 속 인물에 관심이 집중된다. 주인공은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다. 기업인이 일본 지폐에 등장하는 것은 처음이다. 국내에선 한반도 침략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다.
40년 만에 1만 엔권 초상 교체
새 지폐에 들어갈 인물은 2019년 결정됐다. 1만 엔권에는 일본 메이지 시대 경제 관료를 거쳐 은행, 철도 등 500여 개 기업의 설립을 주도한 시부사와 초상화가 들어간다. 1984년부터 올해까지 40년간 1만 엔권의 주인공이었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를 대신한다.

5000엔권에는 일본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쓰다 우메코(1864∼1929)가 새롭게 등장한다. 기존 5000엔권에 있던 메이지 시대 여성 소설가인 히구치 이치요에서 바뀐다. 1000엔권은 전염병 연구자인 노구치 히데요에서 일본 근대 의학의 기초를 놓은 기타사토 시바사부로(1853∼1931)로 교체한다.

각 나라 지폐 속 인물은 당시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기존 1만 엔권 주인공이었던 후쿠자와는 아시아에서 벗어나자는 ‘탈아론(脫亞論)’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1885년 나온 탈아론은 일본이 당시 아시아의 대표적 이웃인 청나라나 조선과 가까이 지내기보다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쿠자와가 1만 엔권의 주인공이 된 1980년대 일본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일본 경제가 아시아에 포함되기에는 너무 커지면서 스스로 ‘탈아’했다고 생각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정신을 표현할 인물로 후쿠자와가 제격이었다.
시부사와의 ‘논어와 주판’
지금 일본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2021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목표로 내세운 것이 ‘새로운 자본주의’의 실현이다. 정권 출범 후엔 ‘부자와 빈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분열’을 막겠다고 내각의 기본 방침에 명시했다.

이런 생각의 뿌리가 시부사와의 ‘도덕경제합일론’이다. ‘돈을 버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지만 나만 잘살면 된다는 식으로 행동해선 안 된다’는 게 핵심이다. 시부사와는 저서 ‘논어와 주판’을 통해 이를 설파했다. ‘한 손에는 주판을 들고 돈을 많이 벌되, 또 다른 손에는 논어를 들고 항상 윤리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시부사와에 대한 국내 평가는 엇갈린다. 시부사와는 1900년대 초 대한제국 시절 자신이 설립을 주도해 은행장까지 맡은 제일국립은행이 대한제국 허가 없이 발행한 10엔 등 지폐의 주인공이었다.

대한제국이 자체 지폐를 만드는 데 실패한 사이 한반도 금융시장을 장악하려던 시부사와가 본인의 얼굴이 새겨진 지폐를 뿌렸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시부사와는 국내에선 한반도 침략의 선봉에 섰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가 화폐도 만들고 철도도 놨으니 소급해 보면 침략적 성격이 있다는 지적이다.

2019년 선정 당시부터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당시 도쿄신문은 야마다 아키라 메이지대 일본근현대사 교수의 분석을 전했다. 야마다 교수는 “시부사와가 경제 발전과 근대화를 이끌었지만 이는 국가 주도 자본주의를 통해서였다”며 “국책회사와 군수산업을 통한 경제 발전이었다”고 지적했다.
들썩이는 일본 경제
새 지폐 속 인물에 논란이 있지만 일본은 신권을 발행하면서 들썩이고 있다. 일본은행은 신권 50억 장을 준비했다. 노무라종합연구소, 다이이치세이메이경제연구소 등은 현금자동입출금기(ATM) 교체 등에 따른 경제 효과를 1조5000억 엔(약 13조원) 안팎으로 추산했다.

신권을 발행하는 가장 큰 목적은 위조지폐 방지다. 쉽게 따라 할 수 없도록 최신 위조 방지 기술을 담는 것이다. 새 지폐엔 세계 최초로 3D 홀로그램을 넣었다. 지폐를 흔들면 각종 그림이 각도에 따라 변하는 것이 특징이다. 외국인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지폐 가운데 한자 대신 숫자 10000, 5000, 1000을 크게 표시했다.

문제는 일본의 현금 결제 인프라가 아직 신권에 완벽히 대응할 준비가 안 됐다는 것이다. 재무성 조사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은행 ATM은 90% 이상 신권을 처리할 수 있다. 슈퍼나 편의점은 80~90% 정도 대응이 가능하다.

그러나 음식점의 식권 발매기는 절반밖에 신권을 인식하지 못한다. 음료 자판기는 20~30%만 신권을 처리할 수 있다. 기계를 교체할 때 수백~수천만원이 들기 때문이다. 카드나 앱 등을 이용한 캐시리스 결제가 확대되면서 신권용 기계로 교체하지 않으려는 점포도 많다.

일본의 현금 없는 결제 비율은 지난해 기준 40% 수준까지 상승했다. 그러나 50% 안팎인 다른 나라에 비해선 아직 낮은 수준이다. 유독 현금을 선호하는 일본인의 성향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지폐 유통량에서 확인할 수 있다. 1만 엔권 유통량은 2003년 약 60조 엔에서 지난해 약 120조 엔까지 불어났다. 경제 규모가 커지면 지폐 유통량이 늘긴 하지만 같은 기간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7%밖에 성장하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과하게 늘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2021년 명목 GDP 대비 통화 유통량은 일본이 23.1%로 가장 높다. 유로존은 12.8%, 미국은 9.2%로 차이가 크다.

일본은행이 설문조사에서 현금을 이용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가장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지불이 완료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신용카드 등은 후불 결제이기 때문에 빚이라는 생각을 갖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장롱 예금’ 밖으로 나올까
일본 전문가들은 그렇다고 해서 1만 엔권이 100억 장 넘게 풀려 있는 것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핵심은 가정마다 금고에 잠자고 있는 ‘장롱 예금’이다. 다이이치세이메이경제연구소는 시중에 풀린 현금의 절반가량이 장롱 속에 보관돼 있다고 추정했다. 일본은행이 2016년부터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펼치면서 은행에 돈을 맡길 이유가 사라진 것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시장의 관심은 이번 신권 발행이 장롱 예금에 어떤 영향을 줄지다. 구권을 계속 금고에 보관하기보다는 소비 또는 투자하려는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은행이 지난 3월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하고 ‘금리 있는 세상’을 연 것도 장롱 예금을 줄일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일본의 인플레이션율이 높아지면서 디플레이션의 상징인 장롱 예금이 감소할 가능성도 크다. 닛세이기초연구소는 지난해 일본 물가가 크게 오르면서 장롱 예금을 늘리는 움직임이 멈추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올해 들어 1만 엔권 유통량은 증가세를 멈추고 감소세로 돌아섰다.

일본이 늦었다곤 하지만 어쨌든 ‘캐시리스’가 진행되고 있는 만큼 앞으로 1만 엔권 유통량이 더 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번 일본의 새로운 1만 엔권은 마지막 신권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다.

도쿄=김일규 한국경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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