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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를 필요 없다.”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겠다.” 선제성을 생명으로 여기는 통화정책에 있어서는 가장 경계해야 할 발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제롬 파월을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 총재들이 마치 유행처럼 이런 말을 쏟아내고 있다. 일부에서는 중앙은행 총재 역할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 Fed 무용론미국 중앙은행(Fed)은 1913년 설립 이후 금물처럼 여기는 두 가지 실수가 있다. 하나는 ‘에클스 실수’다. 1929년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미국 경제가 침체를 보이자 당시 매리너 에클스 의장은 금리를 내렸다. 그 후 물가가 곧바로 오르자 서둘러 금리를 올린 것이 화근이 돼 대공황을 낳았다. Fed로서는 치욕적인 일이다.

다른 하나는 ‘볼커의 실수’다. 2차 오일쇼크 이후 스태그플레이션이 닥치자 폴 볼커 전 Fed 의장은 고심 끝에 금리를 올렸다. 오랫동안 갈 것으로 예상했던 물가가 의외로 빨리 잡힐 기미를 보이자 이번에는 금리를 성급하게 내린 것이 화근이 돼 물가가 올랐다. “볼커의 키가 1cm만 작았더라면”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가장 아쉬운 조치로 평가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Fed의 통화정책을 보면 두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강박관념에 선제성을 잃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2년 전 코로나 사태 후유증으로 물가가 오르자 에클스 실수를 우려해 금리인상에 주저했다. 초기에는 ‘일시적’으로, 나중에는 ‘평균물가목표제’까지 도입해 방관하는 과정에서 물가가 급등하자 2022년 3월에 가서야 금리를 올렸다.

Fed가 금리인하에 주저하는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위기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금융이 실물보다 3배 이상 커졌다. 금융 우위 시대에 금리 변경은 소득대체효과와 자산효과가 겹쳐 두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높아진다. 금리변경에 따라 전자는 저축을 통래 소비에 미치는 효과를, 후자는 자산가격 변화가 소비에 미치는 효과를 뜻한다.

코로나 사태 이후 물가가 오를 때 Fed가 금리인상을 왜 주저했는가를 두 효과를 통해 분석해 보면 명확해진다. 2년 전처럼 경기가 안 좋은 상황에서 금리를 서둘러 올리면 부(負)의 소득대체효과와 자산효과로 에클스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높아진다. 최근처럼 물가가 다 집히기 전에 금리를 서둘러 내리면 정(正)의 소득대체효과와 자산효과가 겹쳐 물가가 다시 오를 확률이 높아져 Fed로서는 주저할 수밖에 없다.

Fed의 무용론이 나올 정도로 선제성을 잃는 데는 ‘최적통제준칙(OCR·optimal control rule)’에 근거한 통화정책 운용방식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OCR은 양대 목표로부터의 편차를 최소화하는 기준금리 경로를 말한다. 그때그때 통화정책 여건을 반영하는 유연성 면에서 적정금리를 토대로 운용하는 테일러 준칙과는 차이가 난다.

문제는 OCR를 의존할 때 Fed 인사들의 ‘자의성(discretionary)’이 너무 개입한다는 점이다. 2년 전처럼 금리를 올릴 때 ‘에클스 실수’를, 최근처럼 금리를 내릴 때 ‘볼커 실수’를 우려부터 하면 OCR에 의한 경로보다 앞당겨 단행해 선제성을 확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제지표를 해석할 때 Fed의 통계조작 문제가 자주 거론되는 것도 같은 논리다. 통계조작은 정량적 통계의 ‘작성’ 단계에서 발생한다. 작성 조작은 각각의 통계당 세부 구성항목 선정과 가중치 설정 문제로 귀결된다. 인플레 지표의 경우 국민 경제생활에 민감한 항목을 제외하거나 가중치를 낮게 설정하면 늘 안정된 것처럼 나온다.
◆ 금리 내리지 못하는 한은미국 Fed, 유럽중앙은행(ECB)보다 앞서 금리를 올렸던 한국은행은 아직까지도 피벗(pivot), 즉 금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한은의 1선 목표인 물가가 여전히 불안해서일까. 아니면 다른 곳에 문제가 있어서인가. 이미 선진 7개국(G7) 중 4개국이 금리를 내리는 전환기를 맞아 한은이 갖고 있는 몇 가지 과제를 점검해 본다.

첫째, 한은의 설립 목표 변경 여부다. 중앙은행의 1선 목표는 ‘물가안정’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저물가 시대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과연 이 목표를 계속 가져갈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지속돼 왔다. 먼저 칼을 빼든 곳은 금융위기가 물가안정 목표를 고집한 것이 원인이라는 반성을 토대로 2012년부터 고용창출 목표를 첨가한 Fed다.

중앙은행 설립 목표와 관련해 Fed처럼 고용창출을 양대 책무로 하는 국가와, 인플레이션 악몽을 갖고 있는 ECB처럼 물가안정을 고수하는 국가로 양분화돼 있다. 우리는 저출산 고령화 구조, 강한 노조, 반이민 정서 등을 고려하면 Fed처럼 고용창출 목표를 첨가하는 방안은 충분히 검토해볼 만하다.

둘째, 통화정책 추진 방식을 점검해 봐야 한다. 통화정책의 양대 축은 기준금리 변경 방식과 유동성 조절 방식이다. 적용 범위에 따라 일반적·보편적 수단과 질적·선별적 수단으로 나뉜다. 1990년대 이후 정보기술(IT), 디지털, 인공지능(AI)으로 진전되는 과정에서 각종 불균형이 심화되는 때는 두 수단 간의 조합도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1980년대 초 스태그플레이션이 닥친 이후 기준금리 변경 방식이 한계를 맞고 있다. 통화정책 전달 경로상 금리와 총수요 간 민감도가 떨어지는 것이 주요인이다. 경기순환 주기가 짧아지는 과정에서 기준금리 변경 시차가 너무 긴 것도 원인이다. 한은이 기준금리 변경 방식을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셋째, 금융통화위원회(MPB) 회의 시기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Fed는 매년 8회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를 갖는다. ECB를 비롯한 대부분 중앙은행은 매월 1회씩 통화정책 정례회의를 개최한다. 한은은 매월 1회씩 금통위 회의를 개최해 오다가 2017년부터는 Fed의 방식대로 여덟 차례로 축소했다.

Fed와 한은, 달러화와 원화는 그 위상이 크게 다르다. 우리처럼 위상이 떨어지는 국가는 FOMC 회의보다 늦게 MPB 회의를 갖는 것이 무난하지만 매년 첫 회의가 먼저 열리고 마지막 회의도 먼저 끝나 혼선을 초래할 때가 많다. 종전의 방식대로 되돌아가든가, 지금의 방식을 고집한다면 그 시기를 FOMC 회의보다 늦출 필요가 있다.

넷째, 예측 모델의 노후성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Fed의 양대 책무지표 예측 실수와 통화정책의 생명인 ‘선제성(preemptive)’을 지키지 못함에 따라 예측 모델의 한계를 지적하는 시각이 많아졌다. 예측 모델을 가장 중시하는 벤 버냉키 전 의장조차도 Fed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퍼브스(Ferbus=FRB+US)’ 모델이 너무 낡았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다섯째, 경제전망을 발표할 때마다 통화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점도표(dot plot)를 넣을 것인가 문제다. 점도표는 버냉키 전 Fed 의장이 시장과의 친화를 목적으로 2012년부터 도입했다. 그 후 점도표는 FOMC 회의 발표문과 의사록, Fed 의장의 기자회견, 경제전망 요약(SEP)과 함께 반드시 챙겨봐야 할 5대 Fed 요소로 정착됐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 점도표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시장과 경제주체의 안내판 역할보다 오히려 혼선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MPB 위원이 한은 총재를 포함해 7인에 불과해 물리적으로 점도표 운용이 불가능하다. 예비 금융통화위원회(SMPB)를 공식화해 운용한다면 대안이 될 수 있다.

한은이 갖고 있는 5대 과제의 개정 여부를 전제로 피벗에 대해 결론을 내리면 현행 방식에서는 Fed보다 금리를 먼저 내릴 수 없다. 하지만 제안대로 5대 과제를 개정해 놓았다면 이번에 금리를 내린 ECB보다 앞당길 수 있었다. 우리 경제는 미국 경제보다 좋지 못하다. 5대 과제 개정 지연에 따른 부작용이 따르더라도 Fed보다 앞당겨 금리를 내려야 한다.

한상춘 국제금융 대기자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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