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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안전불감증’보다는 ‘걱정병’이 낫다
일본의 높은 안전 의식, 배울 것은 배워야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최근의 대형 화재를 바라보면서 '걱정병'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사소한 위험까지 철저히 대비하는 일본 사회의 안전의식은 여전히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임을 새삼 깨닫게 됐다. 일러스트 김일영


◇ 일본에 살아본 뒤에야 한국의 ‘안전불감증’을 실감

일본에 살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한국 사회의 ‘안전불감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대형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안전불감증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듣기는 했다. 하지만 안전을 도모하는 일을 ‘귀찮은 일’, ‘쓸데없는 일’로 취급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바로 안전불감증이라는 것을, 한국에 살았을 때에는 나 역시 뼈저리게 느끼지 못했다.

도쿄에서 살았던 공동주택 단지 부근에서는 자주 도로 공사가 있었다. 사고 위험을 줄이기 위해 통행량이 적은 심야에만 공사를 진행했고, 출근 시간인 아침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도로 상태가 깨끗하게 되돌려져 있었다. 공사 지점에는 안전을 전담하는 통제 요원이 몇 미터 간격으로 서서 자동차와 보행자를 안내했다. 아마도 그 때문에 공사 규모에 비해 공사 기간이 상당히 길었지만, 주민들이 불편을 겪거나 위험한 상황에 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또 근처 건설 현장 입구에는 공사 차량이 드나들지 않을 때도 안전 전담 요원이 상주했다. 현장 근처를 지나는 보행자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협조에 감사한다”고 말하는 전담 요원과 눈인사를 나누다 보니, 낯익은 사이가 돼버린 적도 있다.

처음에는 그런 광경이 어색했다. 어떻게 보자면 대단한 임무라고 할 수 없는 주변 정리나 통행 관리에만 서너 명씩 배치된 모습이 노동력 낭비인 양 느껴졌다. “한국이라면 한 명이면 차고 넘칠 일을 일본에서는 몇 명이 나누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안전사고는 수습보다 예방이 훨씬 더 중요하다. 안전 요원을 많이 배치해 사고를 막는 것을 지나치다고 표현할 수 없다. 그 정도로 안전을 중시하기 때문에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평가해야 마땅하다.

오랫동안 도쿄에 살면서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한국에 돌아온 지금은 길을 지나다가 흠칫 놀랄 때가 적지 않다. 멀쩡한 도심 한가운데에서 가림막도 경고판도 없이 도로를 파헤치는 보수 공사가 이뤄지거나, 대형 트럭이 수시로 드나드는 건설 현장 입구에 주변의 자동차나 보행자를 통제하는 통제 인력이 단 한 명도 배치되지 않은 경우를 자주 본다. 한국에서는 너무 흔하기 때문에 크게 주목받지도 않지만 일본이라면 안전을 무시, 경시하는 무책임한 행동으로 상당한 비판과 지적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 핵심은 ‘안전해야 효율적’이라는 사고방식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안전불감증의 이면에는 '먹고살기 위해서는 안전보다 효율성을 우선할 수밖에 없다'는 강한 합리화 정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일본의 인식은 정반대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안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버스나 택시가 과속하거나 대담하게 교통 규칙을 어기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본다. 그런 행동에 대해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교통 규범을 일일이 지키면 돈을 벌 수 없다”고 항변하는 운전기사를 많이 봤다. 사실 법정 속도를 엄격하게 지키면, 거북이 운행을 한다고 불평하는 승객도 있다. 이쯤 되면 “안전을 위해 교통 규범을 철저히 준수하자”는 슬로건은 그저 공염불일 뿐이다.

일본에서는 그와는 정반대의 정서가 있다. 버스나 택시는 법정 속도를 준수하며 달리고 교통 규칙도 철저하게 지킨다. 사실 일본의 택시 요금은 한국보다 훨씬 비싸기 때문에, 법정 속도와 신호를 철저히 준수하는 준법 운전에서는 야금야금 올라가는 미터기가 야속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들 역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만에 하나 교통사고라도 나면 그 책임의 무게가 훨씬 더 무겁다는 것이다. 운전을 업으로 삼는 상황은 동일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슬쩍 신호를 어기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위반을 합리화하고, 일본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교통 규범을 철저히 지키지 않으면 무슨 일이 났을 때에 더 큰 피해를 입는다”고 안전을 강조한다. 이 말도 저 말도 일리는 있다. 다만 교통사고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명 피해와 직결된다는 점을 생각하자면,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일본 정서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사실 안전 중심주의의 핵심은 ‘안전을 위해 비효율성을 감내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안전을 중시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사고방식에 있다.

일본이라고 안전사고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처럼 잊을 만하면 발생하는 대형 인재는 아니지만 지진과 홍수, 태풍 등으로 인한 자연재해가 자주 발생한다. 사실 매사에 안전을 부르짖는 풍토의 근저에 언제든 어디에서나 큰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마음 깊은 곳의 두려움이 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처럼 아무리 매뉴얼이 잘 갖추어져 있어도 대형 지진과 해일같이 자연의 괴력에 무릎을 꿇고 마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안전 대책이 철저해도 허점은 있기 마련이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사회의 몫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에 모두 거주한 경험을 바탕으로 단언하자면, 일본의 생활 환경이 한국에 비해 훨씬 안전하고 덜 위협적이다. 앞서 소개한 건설 현장이나 도로 안전뿐 아니라 일상적으로도 늘 재해와 사고에 대비하는 분위기가 있다. 화재 위험이 있는 장소마다 미리 소화기가 배치돼 있고, 정기적으로 지진이나 재해에 대비한 대피 훈련이 실시된다. 이러한 작은 노력들이 모여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안전을 위한 작고 꾸준한 노력을 ‘귀찮은 일’, ‘쓸데없는 일’로 평가절하하는 안전불감증이 파고들 여지가 없다.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정서가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 ‘안전불감증’보다는 ‘걱정병’이 낫다

일본에는 ‘걱정병(心配性, しんぱいしょう)’이라는 말이 있다. 매사에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을 늘 걱정하는 성격을 뜻한다. 불안장애를 뜻하는 ‘心配症’와 동음어로, '걱정도 병'이라는 우리말 속담도 있는 만큼 공식적인 질병의 이름은 아니지만 ‘걱정병’이라고 번역했다. 아무튼 일본에는 자타공인 이 걱정병에 걸린 사람이 적지 않다. 걱정병은 종종 소심한 성격과 지나친 불안함으로 여겨지지만, 나는 안전불감증보다는 차라리 걱정병에 걸리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걱정병에 걸린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철저하게 준비하고 대비하는 경향이 있다. 잠재적인 위험 요소를 미리 파악하고, 미리 대비책을 마련한다. 이런 준비가 실제로 위기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된다. 실제로 지진이 발생했을 때 대피 훈련을 자주 실시하는 일본 학교의 학생들이 침착하게 대피할 수 있었던 사례가 많다. 철저한 준비와 대비의 긍정적인 결과다.

반면 안전불감증은 이런 대비를 등한시하게 만든다. 안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는다. 결국 사고가 발생했을 때 큰 피해를 초래한다. 예를 들어 최근 화성시 배터리 공장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는 안전불감증의 전형적 사례다. 위험한 물질을 다루는 공장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안전 대책이 마련돼 있지 않아 23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국에서는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는 대형 사고가 너무 많이 일어났다. 몇 년 전, 도심 한복판에서 안전 대책 부재로 수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던 사고가 아직도 생생하다. 이런 사고들은 안전불감증의 위험성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일이 되풀이될 것인가? 일본 사회로부터 배울 점은 배워야 한다.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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