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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이민정책-②문화적 차이 넘으려면]
카메룬 군대 소속 선수, 폭력·고문에 탈출
난민 자격 얻기까지 2년… 인정률 1%대
"신청자 고국·개인 상황 않는 심사 문제"
택배·배우 이어 도로 정비로 '제2의 인생'

편집자주

인구소멸과 기후변화 등으로 구조적 위기가 닥쳐오고 있지만 5년 단임 정부는 갈수록 단기 성과에 치중해 장기 과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입니다. 정권교체마다 전 정부를 부정하는 정치적 갈등으로 정책적 혼선도 가중됩니다. 한국일보는 창간 70주년을 맞아 이런 문제를 진단하면서 구조 개혁을 이루기 위한 초당적 장기 전략을 모색하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카메룬 출신 난민 복서 이흑산씨가 권투 글러브를 착용한 채 주먹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흑산씨 제공


난민 복서.
이흑산(41) 앞에 으레 붙는 수식어다. 지금은 권투를 그만뒀지만 적잖은 사람들이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서른 살까지 '압둘레이 아싼'이라는 이름을 쓰던 흑산은 가혹행위를 일삼던 모국 카메룬 군대로부터 도망쳐 한국에 정착했다. '검은 산'이라는 한국식 이름은 어렵지 않게 얻었지만 그게 우리나라에 머물러도 좋다는 승인은 아니었다. 추방당하는 악몽이 두려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길 2년. 마침내 적법한 체류 자격을 얻었다. 이흑산을 보면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더 많은 이흑산의 정착을 앞두고 그의 스토리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따뜻한 듯 차가운 나라, 한국

카메룬 군대에서 탈출해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이흑산씨가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이유진 기자


아싼은 아프리카 중서부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에서 태어났다. 부모 없이 할머니 손에서 가난하게 큰 그는 어려서부터 권투 경기만 보면 눈이 빛났다. 열 여섯 살 때 본격 운동을 시작해 스무 살 넘어 군대 소속 선수로 발탁됐다.

군대 생활을 묻자 아싼은 "지옥 같았다"며 눈을 질끈 감았다. 군대는 그를 군인 국제대회 출전을 위한 '투견' 취급했다. 정기 훈련도 없었고, 월급은 군 간부들이 중간에서 가로챘다. 생계와 커리어를 위해 2008년 민간 복싱 대회에 몰래 출전한 그는 챔피언 벨트를 목에 걸자마자 군 감옥에 끌려갔다. 군인들은 마치 '스포츠를 하듯' 아싼을 폭행했다. 바닥에 엎드리게 한 뒤 양팔을 붙든 채 벨트로 채찍질을 하고 걷어찼다. 군사 재판도, 소명의 기회도 없이 꼬박 두 달을 갇혀 있었다. 아싼이 카메룬 탈출을 결심한 것도 이쯤이다.
굶어 죽거나, 맞아 죽거나, 버려져 죽을 것 같다는 공포에서였다
.

2015년 기회가 찾아왔다. 경북 문경에서 열린 '세계군인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한국은 그가 처음 맞딱뜨린 아프리카 대륙 밖 공간이었다. 인천국제공항은 깨끗했고, 길거리엔 좀도둑도, 몸싸움을 하는 사람도, 군인과 경찰에게 맞는 사람도 없었다. 선수단 버스가 잠깐 정차한 사이,
아싼은 네 살 어린 동료와 도망쳤다
. 행인을 붙들고 "서울!"만 외쳤다. 서울역에서 헤매던 중 만난 행인은 선뜻 숙소를 잡아줬고, 용기를 내 찾아간 유엔난민기구는 서울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난민 신청을 하라"고 조언했다. "따뜻하고 친절하다." 한국에 대한 그의 첫인상이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난민인정 신청서를 내자 6개월짜리 임시 체류 허가(G-1-5)가 떨어졌다. 그 기간 충남 천안의 한 체육관에서 '러브콜'이 왔다. "무료로 복싱 트레이닝을 해주겠다"고 했다.
'흑산'이라는 이름도 이때 지었다.
알고보니 관장은 악질이었다. "너희는 불법 체류자(미등록 외국인)니 자신 명의로 된 계좌와 휴대폰을 쓰라고 했어요. 그리곤 일용직을 해서 번 돈, 게임에서 딴 파이트머니도 다 가져갔어요." 돌려달라고 항의하자 "감옥 가고 싶냐"는 겁박이 돌아왔다. 서울 출입국사무소로부턴 난민 신청이 불인정됐다는 통지를 받은 뒤라 혼란스러웠던 흑산은 일단 수긍했다.
6개월에 한 번 출입국사무소를 찾아 체류를 연장하면 된다는 건 몇 달 후 알게 됐다. 제대로 설명해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흑산(오른쪽)씨가 2018년 7월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WBA 아시아 웰터급 정마루와 타이틀 매치에서 펀치를 날리고 있다. 연합뉴스


함께 탈출한 동료 선수가 출입국사무소로 잡혀간 2016년 겨울은 그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동료는 면회를 온 흑산에게 "일이 왜 이렇게 된 건지 알아봐 달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너무 무섭다"며 아이처럼 울었다. 장기 탈영 상태인 흑산도 언제 카메룬 군대로 내던져질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매번 마음 졸이며 비자를 8번 연장했다. 재심사가 늦어졌지만 '난민 신청자'라는 불안한 지위로 일단 버텼다.

링에 오를 땐 특히 더 비장했다. 챔피언 벨트라도 있으면 쉽게 추방당하지 않을 거란 마음에서다. 여러 체육관을 전전한 끝에 2017년 5월 한국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승리하며 유명해졌고, 같은 해 7월 드디어 난민 체류 자격(F-2)을 받았다. "운 좋게도 일이 잘 풀렸어요. 이제 맘 놓고 잠을 자요. '나의 나라' 한국에 고마워요."

난민은 밀어내고 보는 나라



흑산은 한국에 "고맙다"지만 그가 난민 자격을 받을 수 있게 도왔던 법무법인 '어필'의 이일 변호사 말은 조금 다르다. '감동 실화'로 인해 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 지난하고 고단한 과정이 묻혀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이 변호사는 난민 신청자 고국의 상황이나 개인의 처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한국의 현행 심사 체계를 가장 먼저 지적했다.

흑산이 망명을 신청한 가장 큰 이유는 군대에서 고문을 당한 데다 탈영으로 인해 처벌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입국외국인청은 "박해 받을 수 있다는 근거 있는 공포로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러차례 불인정했다. 카메룬은 41년째 폴 비야 대통령의 독재가 이어지고 있는 나라다. 국제엠네스티는 2016, 2017년 카메룬 인권동향 보고서에서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고 군대 내 공정한 재판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도 정부 비판적인 언론인이 군에 납치, 구금돼 사망하거나, 군인들이 여성과 아이들을 노상에서 즉결 처형해 국제기구의 지탄을 받았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흑산의 군입대가 개인의 선택이었고, 그가 단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남았다
고 판단했다.

5년 간 난민 심사 건수와 난민 인정 현황. 그래픽=이지원 기자


이 변호사는 "한국엔 난민 신청자 나라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에 대한 독자적 정보 관리 시스템이나 정부 보고서가 없다"며 "난민법이 정한 심사관의 자격(난민업무 경력 2년 이상인 5급 이상 공무원)을 갖추지 못한 심사관들이 위험 상황을 '구글링'으로 얕게 파악하는 게 대부분"이라고 꼬집었다.
난민
신청자를 의심부터 하고, 진술의 신빙성을 파고드는 취조식 조사도 여전하다.
흑산의 난민면접조서만 봐도 "군에는 자발적으로 들어갔는가" "실제 한국에 온 이유가 뭐냐"는 추궁이 주로 이어졌다.

이렇다보니 최근 5년 간 매해 우리나라 난민 인정률은 2022년을 제외하면 2%대를 넘지 못하는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다.
지난해에도 5,950건의 난민 심사가 이뤄져 단 101명(1.7%)만 인정받았다. 지난해 망명 신청 건수가 1만8,838건이나 되는 걸 고려하면 심사 기회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난민 복서, 그 이후의 삶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도 '안착'까지 담보된 건 아니다. 흑산만 해도 당장 혼인신고부터 힘겹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결혼을 하기 위해선 본국에서 미혼 상태임을 증명해야 되는데, 나라로부터 도망쳐 나온 난민들은 증명서를 떼기 위해 영사관을 찾는 것부터 고역이다. 이 변호사는 "국적국으로부터 영사 관련 업무를 받을 수 없는 난민의 특수성을 개별 법령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그래도 흑산은 살아간다. 체력이 떨어져 운동을 그만두자 주변 시선이 차가워져 좌절한 적도 있지만 꿋꿋하게 이겨내고 있다. 링에서 내려온 그는 택배기사, 단역배우를 거쳐 도로정비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해고를 통보 받은 적도 많지만 "내 신분 탓이 아니라 코로나19로 인한 불경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털어냈다.
"어떻게든 한국 사회에 녹아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흑산. 이유를 묻자 "나를 받아준 고마운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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