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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철의 안 보이는 안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9일 평양에 있는 소련군 전사자 추모탑인 해방탑에 헌화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지난 20일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9일 방북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관계에 관한 조약’(조약)에 서명했다. 푸틴 대통령 방북을 두고 ‘유사시 자동 군사개입’ 조항 복원 여부에 관심이 쏠렸는데 눈여겨볼 다른 장면도 있었다.

푸틴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19일 오후 조약에 서명하고 평양에 있는 ‘해방탑’에 공동 헌화했다. 해방탑은 평양 모란봉산 남쪽 기슭에 있다. 이 기념비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북한에 주둔한 일본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은 소련군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9일 평양에 있는 소련군 전사자 추모탑인 해방탑에 헌화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지난 20일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1945년 8월9일 일본의 패망 직전 대일 선전포고를 한 소련은 북한으로 진격했다. 8월15일 일본이 항복했지만, 일본 정부가 일선 부대에 전투 중지와 항복 명령을 내리지 않아 북한 곳곳에서는 8월20일까지 일본군과 소련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소련군은 북한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691명이 전사했다.

해방탑 아래에는 “위대한 쏘련인민은 일본제국주의를 쳐부수고 조선 인민을 해방하였다. 조선해방을 위하여 흘린 피로 조선인민과 쏘련인민의 친선은 더욱 굳게 맺어졌나니 여기에 탑을 세워 전체 인민의 감사를 표하노라. 1945년 8월 15일”이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해방탑의 후면에도 “일본군국주의자들의 강점으로부터 조선인민을 해방하고 자유와 독립의 길을 열어준 위대한 쏘련군대에 영광이 있으라! 1945년 8월 15일”이라고 쓰여 있다.

북한 평양 해방탑. 연합뉴스

‘소련이 조선을 해방했다’는 해방탑 설명문. 조선중앙텔레비전 화면 갈무리

소련과 러시아는 소련군의 주도적 역할로 한반도가 해방됐다고 강조해왔다. “1945년 소련군은 조선 북부에서 일본군에 맞서 전투했고,…소련군의 신속하고도 가공할 타격에 의해 도처에서 일본의 군, 경찰기구가 붕괴되고 식민기관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를 통해 자유와 독립을 향한 조선의 도정에서 주요 장애가 제거되고, 가장 중요한 민족적 과업이 실현되었다.”(1988년 СССР и Корея)

북한도 8·15 광복 뒤 10년 가량은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인식했다. 평양 모란봉 기슭에 해방탑을 세웠고, 사동구역에 북한 내 대일 전투 중 사망한 ‘쏘련군렬사들의 묘’를 조성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북한에서 주체사상이 등장하면서 항일 빨치산이 강조되고 소련군의 ‘해방’의 의미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1964년 조선로동당력사 교재는 소련군의 역할을 “조선 해방”에서 “일제의 패망을 결정적으로 촉진”한 것으로 축소했다. 일제의 항복은 김일성 주석이 주도한 항일 빨치산과 소련군의 공동 작전의 결과로 정리됐다. 이후 북한 사회가 주체사상화되면서 1979년 조선로동당력사의 대일전을 다룬 내용에는 “소련”이란 단어가 한 차례만 등장했다. 1980년대 북한 기록에서 소련군의 빈자리는 김일성 주석이 1932년 4월25일 만주에서 창설했다는 항일 빨치산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으로 채워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9일 평양에 있는 소련군 전사자 추모탑인 해방탑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와다 하루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는 주체사상이 자리잡은 1967년 이후 북한 국가체제를 ‘유격대국가’라고 명명했다. 김일성 주석은 유일 수령으로서 절대화되고 북한 주민은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 식으로’라는 구호를 외쳤다. 북한 전체가 항일유격대처럼 됐다. 만주에서의 항일유격투쟁을 뿌리로 둔 ‘유격대 국가’에서 ‘소련 해방군’이 설 자리는 없었다. 북한 지명이나 길이름에서 ‘해방’이라는 명칭이 사라졌다.

하지만 ‘소련군이 한반도를 해방시켰다’는 주장은 소련이 망한 뒤에도 러시아가 계승했다. 주북 러시아 대사나 평양을 방문하는 러시아 주요 인사들이 빠짐없이 해방탑을 찾았다. 지난 19일 방북한 푸틴 대통령에게 해방탑 참배는 필수였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따라간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북한 관영언론들은 “김정은 동지께서와 뿌찐 동지는 국제주의 위업에 대한 숭고한 사명감을 지니고 조선의 해방을 위한 성전에 고귀한 생명을 아낌없이 바친 쏘련군렬사들을 추모하여 묵상하시였다”고 보도했다. 항일 빨치산이 일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켰다고 믿고 있는 북한 주민들이 ‘소련군이 조선을 해방했다’는 글이 적힌 탑에 고개 숙이는 김정은 위원장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9일 평양에 있는 소련군 전사자 추모탑인 해방탑에 헌화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지난 20일 보도했다. 헌화하는 푸틴 대통령 뒤에서 김정은 위원장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러시아가 푸틴 대통령 방북을 계기로 소련군의 한국참전 사실을 처음으로 공식화했다고 통일부가 지난 20일 평가했다. 푸틴 대통령은 북-러 확대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1950~1953년 (조국)해방전쟁에서 소련 조종사들이 수만번 전투비행을 했다”고 말했다. 통일부는 소련 공군 조종사들이 한국전쟁에 투입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소련과 러시아는 참전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지 않았는데 푸틴 대통령이 이번 방북에서 처음으로 공식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푸틴 방북을 계기로, 195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역사와 북한 주민의 기억에서 희미하게 사라졌던 소련군이 돌아왔다. 70년만의 소련군 귀환은 푸틴 대통령의 의도적 호명 전략이다. 1945년 8월엔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북한을 해방시켜줬고, 한국전쟁 때는 지켜준 `은혜’를 강조한 것이다. 북한더러 우크라이나전쟁에서 고생하는 러시아에게 은혜를 갚으라는 묵시적 압박일 것이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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