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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통의 사건
게티이미지뱅크

경상남도 진주시 한 편의점에서 일하던 이소민(가명)씨는 지난해 11월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일면식 없는 남성에게 무차별적 폭행을 당했다. 이씨가 오롯이 재판에만 매달려 지내는 사이, 가해자는 6차례에 걸쳐 법정에 반성문을 제출했다. 정작 피해자인 자신에겐 직접 사과하지 않은 가해자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내용으로 반성문을 썼는지 이씨는 보고 싶었다. 보아야만 했다. 피고인(가해자) 반성문 등 공판기록 열람을 법원에 신청했다. 지난 7일과 지난달 31일, 이씨는 법원에서 ‘반성문 열람 불허’ 결정을 받았다. 이씨는 “법원 직원한테 ‘반성문은 잘 허가가 나지 않는다. 원래 관행이 그렇다’는 설명만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형사재판에서 피해자가 피고인 반성문 등 공판기록을 열람하기 위한 벽은 높다. 피고인이 방어권 행사를 이유로 피해자가 제출한 ‘엄벌 탄원서’등 공판기록을 쉽게 열람할 수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검사와 피고인이 당사자인 형사재판에서 피해자는 법적으로 제3자에 그치는 탓이다. 제도가 없는 건 아니다. 2007년 법 개정으로 피해자도 재판장의 허가를 얻어 공판기록을 열람·등사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현실에선 이씨 경우처럼 공소장 등 일부 자료만 허락되거나 접근 자체가 차단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일단 법원이 열람을 불허하면 다른 방법을 찾기도 어렵다. 법원은 열람 불허 사유를 명시할 필요가 없고, 피해자는 불허 결정에 이의제기(불복)할 수도 없다. 무엇인 문제인지도 모른 채 법원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보공개 청구도 어렵다. ‘다른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 정보공개청구를 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긴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따른 법률 때문이다. 이씨가 반성문을 보기 위해 결국 택한 방법을 설명했다. “법원이 반성문을 보여줄 때까지 신청서를 내기로 했습니다.”

2022년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 김진주(필명)씨는 형사재판에서 공판기록 열람이 가로막힌 뒤, 민사소송까지 벌여 가해자의 반성문을 보는 데 성공했다. 문서송부촉탁은 민사소송 당사자가 문서 소유자를 상대로 해당 문서를 법원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끔찍한 일을 겪었다. 김씨의 주소가 가해자에 노출돼 보복범죄 위협을 받은 것이다. 민사소송 절차에서 적는 소장에는 소송당사자의 주소,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를 기재해야 하는데, 이것이 소송 대상인 가해자에게도 전해진 게 화근이었다.

김씨는 “공판기록 하나 보기 위해 카드 24개월 할부까지 하면서 민사재판 변호사를 선임했는데 사건 이후 이사 간 집의 주소가 피고인에게 노출됐다”며 “법원도, 국가도 내 편이 아닌 것 같았다”고 말했다. 고통스럽게 받아낸 반성문 내용은 ‘몰라선 안 될 내용’이었다. “내가 엄벌 탄원서를 낼 때마다 그걸 보고 반박하고 재반박하는 식으로 쓴 반성문이었어요.”

일본의 경우 2007년 범죄피해자보호법을 개정하면서 ‘공판기록 열람 원칙적 금지, 예외적 허용’ 규정을 뒤집어 ‘열람 원칙적 허용, 예외적 금지’로 바꿨다. 피해자가 사건의 이해당사자로서 사건 내용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제도가 남용될 것에 대비해 일정 자료에 대해서는 등사를 허용하지 않고 열람만 할 수 있게 하거나, 자료가 부당하게 사용될 경우 명예훼손죄 등이 성립할 수 있게 했다.

피해자의 고통에 견줘 우리 법정의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법무부는 지난해 2월 △‘중대 강력범죄’와 ‘취약 계층 대상 범죄’ 피해자에 대한 재판기록 열람·등사 원칙 허가 △법원이 의무적으로 결정 이유 명시 △법원의 불허 결정에 대해 피해자는 즉시항고·재항고 가능하다는 내용을 담은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해당 법안은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계류되다가 21대 국회에서 폐기됐다. 법무부는 22대 국회에 다시 개정안을 제출하겠다고 지난달 밝혔다.

법원 내 연구모임 ‘현대사회와 성범죄 연구회’ 간사를 맡은 조정민 부장판사는 “헌법에서 보장한 피해자의 재판절차진술권(피해자가 형사재판에 출석해 자신의 피해를 진술할 권리)이 실질화되려면 사건에 필요한 정보가 제공돼야 하지만, 공판기록 열람에 있어 피고인과 피해자의 위치가 대등하지 않게 설계된 상태”라고 했다. 조 판사는 또 “열람 불허 결정에 대한 불복 절차를 만들면 결정례가 쌓여 재판부의 편차를 줄일 수 있다. 재판장 역시 유사 사례를 찾으며 조금 더 신중하게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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